소설리스트

내 상태창 2개-55화 (55/240)

<내 상태창 2개 - 55화>

54. 블랙 드래곤의 몸속에 들어오다(2)

눈앞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어느새 나는 앉아 있었다.

엉덩이 쪽에는 동그란 나무 의자.

앞에는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작은 초와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는……?”

주변은 어두컴컴하다.

의자에 앉아 있긴 한데 바닥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발도 닿지 않는다.

“몸 안에 내가 잠시 만든 공간이다.”

눈앞에서 갑자기 반투명한 노인이 나타났다.

조각 같은 외모지만, 피곤함이 깊게 서린 얼굴.

긴 흑발은 정돈이 안 되어 푸석하고 난잡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어…… 혹시 아카르디안?”

“맞다. 내가 아카르디안이다. 네 녀석, 올림포스 놈들의 축복과 관심이 너무 과하군. 오래 이야기는 할 수 없겠어.”

폴룩스? 아우렐리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지만 그들의 응답은 없었다.

흠. 차단된 건가.

드래곤 별 걸 다 하네.

“덕분에 시간이 없으니, 내 저주를 일단 공유하지.”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이 ‘망각하지 못하는 자’ 저주를 공유합니다.]

시스템 창이 짤막하게 떴다.

망각하지 못한다고?

지금 정신 보호가 몇 겹인데 그냥 뚫리네.

근데 딱히 저주 받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카르디안이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자. 십자가를 상징하는 신, 종교가 뭐지?”

“그거야 제우스…… 아 아니…….”

머리가 갑자기 빠개질 듯이 아파 왔다.

그리고 기억나는 당연한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지. 종교야 기독교, 카톨릭.”

불 끄면 언제든지 십자가가 빛나는 기독교 공화국 대한민국.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근데 이걸 왜 잊고 있었지?

“크큭. 남의 땅에서만 그 짓거리를 하는 줄 알았더니 모행성도 똑같이 구는구나. 언제부터 기억이 끊겼냐?”

“어. 그게…….”

기억을 잠시 되살려 보았다.

몬스터가 튀어나오기 하루 전, 지하철에서 전도하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와! 이런 기억도 다 나네.

이것도 저주 탓인가?

근데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이 애초에 그런 종교는 없었던 것처럼 치부했다.

세계 각지에 이미 만들어져 있던 교회나 절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른 신에게 배정되었지.

오딘, 토르 같은 북유럽의 신은 하나의 설화로 취급되었고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다.

와.

하루 만에 세상이 싹 바뀌었구나.

전혀 몰랐네?

“몬스터가 튀어나오고부터.”

“날짜는 언제부터였나?”

“유월 일 일. 내가 일 년 지나서 유월 일 일에 각성했으니 틀림없다.”

“흐음…….”

그 말에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카르디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지구의 신을 아는 거지?”

“어스는 나도 자주 놀러 갔었으니까. 파프니르라고 아나?”

“아니.”

“지크프리트는?”

“그는 알지. 용 잡은 용사? 그런 설화 아닌가?”

“그가 잡은 용이 나다. 타 차원이니까 적당히 놀아 줬지.”

지크프리트 무용담에 나오는 용이었다고?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아카르디안이 슬쩍 웃었다.

“네놈도 우리 행성에 오는데 나라고 못 갈 게 뭐 있겠느냐? 에인션트 드래곤은 신위에 근접한 존재니라.”

“신위면 S급?”

“그래. A의 끝에 달했지…… 결국 신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 망할 어스의 신들 때문이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아카르디안.

“녀석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하데스와 협력 중인데, 영 진척이 없어.”

“왜 파멸을 시키려고 하지?”

“우리의 신을 없앴으니까. 우리 행성의 중립 진영 신은 원래 용신 드라키아다.”

용신?

용신은 내가 D급 때 잠시 본 적이 있었다.

용족으로 클래스 선택할 때.

[용족]

[중립 진영의 최고위 종족이자 대지의 지킴이입니다.

용신의 자손으로 신의 피를 잇습니다.]

“내가 클래스 선택 때는 용신 이야기 있던데?”

“올림포스 놈들. 시스템까지는 손을 뻗치지 못했나 보군. 아니, 그런데 용족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네가? 근데 왜 안 했지?”

날 의아하게 쳐다보던 아카르디안.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혼 계열이군! 설마 그런 자질이 있을 줄이야……!”

이미 내가 영혼 계열일 거라고 확신한 눈빛이다.

지쳐 보이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활기를 띤다.

“그래. 영혼 계열이었어. 어쩐지 축복을 이렇게 준 이유가 있군. 근데 중립 진영의 신도 축복을 준 거 보면…… 두 진영의 클래스를 얻은 거야. 그것도 영혼 계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카르디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 신의 꼭두각시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군. 알고 있나?”

“설마 B급이 될 때를 이야기하는 거냐?”

“호오. 알고 있구나. B급이 되면 너를 어떻게든 천사로 만들려고 할 거다. 그러고 싶은가?”

내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자 입가에 미소가 짙어지는 아카르디안.

“그럼 대책은?”

“나름 마련하고 있지.”

“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은 건 아니고?”

“내가 미쳤냐?”

“호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들키지 않다니, 무슨 수를 쓰나 보군. 마음에 들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면 아카르디안이 말문을 이었다.

“그럼 나의 힘을 흡수하거라.”

“뭐?”

“너도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으니, 뭔가 준비해 둔 것이 있겠지. 하지만 대책이 하나 더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

“대책을 하나 더?”

“그래. 네가 순순히 천사가 되면 올림포스 것들이 막대한 이득을 보겠지. 그 꼴을 보느니 전력으로 방해하겠다. 어차피 곧 죽을 몸…….”

지금 A의 끝자락에 있는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이 힘을 준다는 거지?

끌리긴 하는데.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적이었다. 쉽게 믿음이 가진 않아.

“널 어떻게 믿고?”

“그래. 쉽게 믿을 수 없겠지. 그러니 네 능력으로 나를 흡수해라. 영혼 계열 클래스가 된 너라면 나의 힘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EEEE로 시작했을 테니까.”

EEEE?

이거 질서 때의 10, 10, 10이랑 비슷한 의미인가 보지?

나는 분명히…….

“나 F-로 시작했는데.”

그러자 아카르디안이 화들짝 놀랐다.

“F-라고? 진짜?”

“그래.”

“하. 어쩐지 그렇게 자질이 뛰어나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면 내 힘을 다 소화하지 못하겠구나. 질서에 중립, 거기에 혼돈의 힘까지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내게 남아 있는 용의 힘, 거기서도 아주 일부만 줘야겠구나.”

“아니 뭐, 더 주셔도 되는데…….”

갑자기 나오는 존댓말.

아주 일부만 준다고 하니까 급 아까워졌다.

“아니. 내 능력을 모두 흡수하면 네 미천한 자질로 봐서 강제로 완전한 용족화가 진행될 거다. 그럼 아스가르드 쪽이 득을 보는 건데 그 꼴도 볼 수는 없지.”

용족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말에 좀 믿음이 갔다. 근데…….

“중립 진영이 아스가르드인가? 오딘 쪽?”

“그래. 나머지 신은 모두 잊었는데 오딘, 토르는 왜 기억이 났겠느냐? 둘은 아마 동맹 관계일 거다.”

그러네.

그럼 질서는 올림포스.

중립 진영은 아스가르드가 먹은 거군?

근데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강한가? 나머지를 다 쓸어 버리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제외한 신들이 사라졌지. 우리 행성만 그렇게 진행되나 했더니 지구도 이미 그런 상태였군…….”

“그래…….”

“네가 아마 영혼 계열의 천사로 그들에게 가세하면 더 막을 수 없겠지. 그 꼴은 볼 수 없다.”

큼. 사실 나야 뭐 올림포스가 장악하든 아스가르드가 장악하든 상관은 없는데.

날 천사화시키는 게 문제지.

천사가 되면 그냥 내가 사라지고 죽는 거나 다름없잖아?

SP로 원형 유지 싹 다 사면 방어 가능하다지만 용이 주는 것도 받아서 이중 안전망을 택해 보자고.

“근데 네 힘을 흡수하면 천사화를 막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네가 너의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만 있다면.”

“좋아. 그럼 줘.”

“그래. 그럼 하트의 일부를 정리해 나누어 주지.”

참.

입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는 영락없이 사망 확정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대박이냐?

“그럼 그렇게 나눠 주는 김에 혼돈의 문을 안 열면 안 되냐?”

“그건 불가능하다. 지금 너에게 하트를 나눠 주는 것도 상당히 무리하는 거다. 이렇게 힘을 많이 쓰게 되었으니 이성이 사라지겠지…… 그리고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테고.”

짙은 피로감이 깃든 얼굴.

그 모습에 갑자기 나에게 공유된 ‘망각하지 못하는 자’라는 저주가 떠올랐다.

“망각하지 못하는 자라는 저주, 설마 케브리안이 멸망했다가 다시 초기화될 때도 적용되나?”

“그래. 나는 언제나 기억한다. 하데스와 계약을 맺고, 멸망의 문을 여는 꼭두각시 역할을 하지.”

“그렇군.”

“신위에 오르기 위해 받았던 저주가, 이렇게 날 영원히 괴롭힐 줄은 몰랐군.”

“근데 우리는 케브리안 도전이 처음인데? 그럼 너도 이번이 처음이어야 하는 거 아니냐?”

“후후. 내 기억 속에서 멸망은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만 도전하는 게 아닌가……?

“한가로이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군. 일단 받아라.”

테이블 위에 주먹만 한 붉은 보석이 올라왔다.

크기도 크기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엄청나다.

이 공간의 마력 밀도가 단숨에 몇 배는 짙어진 것 같다.

“내게 남아 있던 중립 진영의 힘. 그것의 일부를 모았다. 드래곤 하트의 조각으로 정제하여.”

“오오…….”

“네 방식대로 흡수해 보거라.”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저절로 두둥실 떠올라 나에게 다가온다.

갑옷과 옷도 다 타올라 알몸인 내 가슴에 닿은 드래곤 하트.

나는 그걸 손에 쥐어 힘을 주었다.

와드득 부서지는 드래곤 하트.

심장의 일부임에도 영혼 약탈이 발동하며, 능력이 흡수된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마력이 느껴졌다.

[드래곤 하트 조각 일부를 흡수하였습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 재생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중립 진영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차후 용족-고룡(古龍)으로 클래스 선택이 가능합니다.]

음?

능력치가 뭔가 팍팍 상승하나 싶었는데 이게 끝?

고룡으로 클래스 선택이야 안 할 거니까 결국 남는 건 소폭의 능력치와 스킬뿐인데.

[드래곤 하트의 마나 재생 LV1]

[스킬 등급 A]

[사용자의 마력 저장 장소가 사용자의 심장과 드래곤 하트로 두 개가 됩니다. 사용자의 몸에 있는 마력을 우선으로 사용하며, 마력이 다 떨어지면 드래곤 하트에서 마력을 끌어옵니다. 마나 회복력이 대폭 늘어나며 마나 친화력이 강화됩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 재생’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드래곤 하트 조각을 더 흡수한다면 ‘드래곤 하트’ 스킬로 업그레이드 가능합니다.]

흠. 보조 배터리가 생긴 격인가?

마력 능력치 자체는 변화가 없네.

드래곤 하트 흡수라니 ‘오오오’ 하면서 기대했는데 스킬만 얻다니 조금 실망스럽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카르디안이 충고했다.

“여기서 눈에 띄게 강해져 봤자 신들의 시선만 더 살 뿐이다. 필멸자여. 나에게 막대한 힘을 얻으면 그들이 더욱 그대에게 신경을 쓰겠지.”

“그건 맞는 말이지. 근데 이것과 천사화를 막는 건 영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드래곤 하트 스킬은 얻었지?”

“그렇다만.”

“그럼 가능하다. 걱정하지 마라.”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아카르디안의 얼굴도 뭉개지기 시작한다.

“그럼 이제 작별할 시간이군. 자유를 계속 갈망하는 그 마음, 잊지 말거라.”

몸이 붕 떠오르며 다시 어딘가로 쏜살같이 날아간다.

어느덧 다시 선 땅은 레어 안.

아직도 브레스의 여파 때문인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블랙 드래곤은 멍하니 선 채 있었다.

[드래곤 하트에 잊힌 신, 용신 드라키아의 인장이 찍힙니다.]

엥? 용신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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