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53화>
52. 디아나가 변했다(2)
“오셨군요!”
부대에 복귀하자 나에게 뛰어와 안기는 디아나.
가슴이 그대로 밀착한다.
“디아나 님…….”
“너무 변하셨어.”
“그래도 외모를 보셨는데…….”
마지막 누구야.
딱 달라붙은 엘프의 녹색 가죽옷을 입은 디아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도 솔직히 못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같이 있으면 그냥 한 마리의 오징어다.
차라리 갑옷에 투구 쓸 때면 괜찮았는데 벗은 지금은…… 흠…….
동료 엘프들도 놀랄 정도니 너무 변했는데.
이쯤 되면 태양신이 나 꼬드기라고 혹시 정신 조작이라도 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지금은 근데 꼬드김에 넘어가도 나한테 뜯어 갈 게 없을 텐데.
애초에 질서 진영은 거의 나를 다 잡아 놓은 물고기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이지.
거기에 그녀의 조언에 따라 마법진 부쉈다가 이득만 엄청 봤잖아.
드래곤 하트도 일부 흡수하고.
일단 두고 보자.
명경지수가 있으니 눈 돌아가서 유혹에 넘어갈 일은 없을 거야.
“지호 님. 마침 숙영지를 다 건설했어요. 같이 가요.”
품에서 나와 내 손을 잡아끄는 디아나.
화염 전차에서 그대로 이끌려서 갔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군.
넘어갈 일 없겠지……?
에비강 근처에 설치된 숙영지.
드워프가 진두지휘했는지 하루 잘 건데 작은 요새 같았다.
땅의 정령 덕에 간이 성벽까지 있고 막사도 큼지막하다.
사령부의 막사에서 주요 인물들이 모여 간단히 회의를 가졌다.
“여신의 사도님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적 요새를 돌파하고 흑룡의 숲마저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적이 가장 큰 난적입니다.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
“에인션트 드래곤이자 광폭하기로 유명한 용입니다. 작은 원한도 기억하여 백 배로 갚아 준다고 해서 악명이 자자하죠. ‘망각하지 않는 용’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입니다.”
“드워프의 붉은모루 부족이 레어 공사를 담당했는데 벽돌 하나 떨어졌다고 부족을 멸망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드워프 로드 암브로시안의 말에 좌중에 침음이 흘러나왔다.
와. 성격 더러운 건 알겠다.
“정말 잊지를 않는군요…….”
“아카르디안은 완전한 새끼 용, 해츨링을 낳지 못하고 불완전한 용 드레이크만 하나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저희가 드레이크를 죽였으니 원한이 엄청날 겁니다. 이번에 어떻게든 제압을 해야 하는데…….”
암브로시안이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었다.
에인션트 드래곤이다. 솔직히 게임 하면 최종 보스 급이어야 할 몸인데…… 뭐 벌써 싸우게 되냐.
이게 1단계라는 게 더 욕 나온다.
사도가 된 디아나가 합류했지만, 블랙 드래곤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데…….
정면으로 맞붙으면 힘들 것 같아.
공략집에 나온 대로 해 보자.
“결국 아카르디안의 목적은 혼돈의 문을 여는 겁니다. 일단 그걸 방해합시다. 저와 디아나 님이 아카르디안의 주의를 끌 테니, 나머지는 모두 혼돈의 마법진을 부숩시다.”
“예. 그 길밖에는 없겠군요.”
모두 이 방침에 동의하며 자세하게 전략을 짜려 할 때, 막사에 각성자 한 명이 급히 들어왔다.
“대장님. 용인들이 대화를 요청합니다.”
“용인들이요?”
“예. 숫자는 열셋입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핀 절벽에서 싸우던 그들인가?
벌써 내려왔나. 너무 빠른데?
“질서의 사도. 맞는가?”
막사에 들어온 용인은 내가 그때 봤던 자들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갑옷을 입은 장신의 용인.
내가 보았던 용인보다도 한층 더 큰 키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아카르디안 님의 치프 가디언 알베롯사다. 아카르디안 님이 자신의 변절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내보내셨다.”
“변절을 인정해……?”
“그래.”
알베롯사는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아카르디안은 질서의 상위 종족 천사를 제압하고 큰 상처를 입은 채 레어로 돌아왔다 했다.
그 후 제압한 천사의 시체를 이용하여 혼돈의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 알베롯사가 중립 진영의 소속으로서 간언을 해도 듣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지시더니 우리를 레어에서 내보셨다. 우리보고 하루라도 더 살라고 하면서. 그리고 너희들에게 레어의 문은 활짝 열렸으니 48시간 내에 들어오라고 전하라 하셨다.”
이 용인이 같이 수비에 가담했으면 꽤 까다로웠을 거 같은데.
13명의 용인은 상당히 강해 보였다.
게다가 혼돈으로 타락하지도 않아서 신성력도 쓸모가 없을 테고.
너무 좋은 조건에 레인저 단장 레블로가 입을 열었다.
“함정 아닐까요?”
“함정은! 용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엘프가 그것도 모르느냐?”
“그건 아직 중립 진영이었을 때의 이야기지. 혼돈에 물든 용이다. 거짓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
“으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카르디안 님은 레어의 방어진도 모두 부수라 명하셨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레어의 방어진을 부수고 길을 트고 나오는 길이다.”
“대체 의도가 뭐지?”
“나도 모르겠다…….”
안타까움이 담긴 음성.
알베롯사는 막사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들의 손을 통해 안식을 바라시는 건가? 하지만 사도 둘 빼고는 쓸 만한 전력이 전혀 없는데…… 어쨌든 이틀 내에 오지 않으면 혼돈의 문이 열리고 세상은 지옥이 될 테니, 막고 싶으면 빨리 오라고 하셨다.”
다른 마법진을 다 부쉈는데도 이틀밖에 시간이 안 주어지다니.
하긴…… 뭐 시간을 끈다고 좋을 건 없다. 시간 끌면 드래곤 하트를 바치지 않고도 마법진 완성이 가능하겠지.
그럼 혼돈 세력에 블랙 드래곤까지 합세할 테니 그대로 멸망 시나리오다.
이렇게 보면 아직도 난이도는 불가능에 가까운데 말이야.
“너희는 이제 어쩔 건가. 아카르디안의 변절이 확인되었으니,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나?”
“아니…… 등을 돌리긴 했지만 원주인에게 칼을 향할 순 없다. 그냥 이대로 물러서겠다. 행운을 빌지.”
아깝지만 어쩔 수 없군.
그들이 물러서자 우리는 하루 쉬고 내일 아침 던전 레어에 돌입하기로 확정했다.
48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야밤에 가기는 무리.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입하는 게 낫지.
나름 대장 막사라고 제일 큰 막사에 드워프제 침대에 누웠다.
이 전장에 어떻게 이런 걸 가져오나 했는데 땅의 정령이 도와줬다고.
정령은 뭐 만능이네.
나는 공략집을 꺼내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아카르디안 파트에서 디아나가 주의를 끌고 나머지가 마법진을 맹공하면 이긴다고 했는데…….
어째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는 공략집이랑 내용이 너무 다르군.
뭐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겠느냐마는.
괜히 주의를 끄느니 그냥 모두 마법진을 두들기는 게 나으려나.
공략집 뒤페이지는 여전히 내용이 없어 그냥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 드래곤 공략법에 대해 생각했다.
“지호 님.”
“디아나 님?”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디아나가 왜 이 야밤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오늘 그녀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모가 너무 초월적이니 이성과는 별개로 뛰는 심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만 마주치면 진짜 IQ가 반은 떨어지는 거 같아.
[명경지수가 발동합니다.]
이거 없으면 진짜 거하게 사고 쳤을 거다.
[아우렐리아가 생각해 보니 무한 정력의 임신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태양신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뭐? 임신?
그러고 보면 무한 정력에 상대방을 바로 임신시킨다는 효과가 있었지.
그리스 로마 신답다 생각했는데…….
헉. 뭐야. 아기 가지게 해서 설마 협박하나?
명경지수 때만 비밀리에 알려 주는 아우렐리아의 충고.
이번 충고는 등골이 싸늘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애로 협박? 아니면 영혼 중개자라는 특이 클래스를 지녔으니 내 애로 실험?
둘 중 뭐가 됐든 간에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질서라면서 하는 짓이 왜 이렇게 더럽냐.
물론 둘 중에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조심하자. 언제든지 뒤통수는 맞을 수 있어.
거기에 무한 정력, 이 임신시키는 건 진짜 부담스럽네. 이거 어떻게 봉인할 방법 찾지 못하면 성생활에 심각한 애로 사항이 펼쳐지겠어.
흠. 스킬 끄면 되려나?
와! 근데 그러면 뭔 쓸모야…….
19금 때 언젠가 쓰길 바라고 있었는데…….
“지호 님?”
“아. 네. 디아나 님. 앉으시죠.”
내가 멍하니 있던 탓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디아나를 막사의 책상 의자 쪽으로 안내했다.
흰 천의 나이트 드레스를 입은 디아나.
치마 길이가 긴 게 아쉽기는 했지만 적당히 타이트해 그녀의 몸매가 잘 드러나 있었다.
마치 정석과도 같은 S라인의 몸매.
그림으로 그리면 저럴까?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몸매가 미의 정점을 찍었다.
“지호 님도 참…….”
내 시선에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 짓는 디아나.
[명경지수가 발동되었습니다.]
와. 진짜 사람 돌게 하네.
임신하면 좆 된다. 참자. 지호야.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블랙 드래곤 때문이에요.”
아. 블랙 드래곤?
하하하.
그쪽 이야기였구나.
괜히 임신이고 뭐고 해서 오버했네.
“블랙 드래곤이요?”
“네. 제가 태양신께 말씀 듣기로는 블랙 드래곤의 이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호 님과 비슷한 공략법을 가르쳐 주셨는데요.”
태양신이 그걸 알고 있었다고?
흠. 이 세계도 주관했으니 아나?
“근데 아까 용인들의 말은 좀 달랐습니다. 블랙 드래곤이 이성을 회복한 거 같은데, 그럼 전군이 모조리 가는 건 위험 부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신의 사도, 각성자 분들께서는 부활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진영을 귀환 거점으로 만들고 각성자로 이루어진 부대를 먼저 보내는 게 어떨까요?”
“각성자만으로요?”
“예. 저도 태양신께 세 번의 부활의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성이 돌아온 드래곤이 어떤 술수를 쓸지 모르니, 각성자 부대로 먼저 적을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블랙 드래곤의 이성이 돌아왔으면 마법진 좀 부서지게 내버려 두고 드래곤 브레스를 갈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5천 명이 다 죽을 필요는 없지.
게다가 레어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5천 명이 다 들어가기는 좁을 텐데, 차륜전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지호 님도 세 번의 부활 기회가 있으시죠?”
“아. 저는 한 번 전사해서…….”
“지호 님이 전사하셨다고요? 그렇게 강하신데…… 대체 어떤 숨겨진 적이…….”
“하하. 디아나 님을 만나기 전입니다. 불의의 일격이었지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는 디아나.
자세히 설명하기는 쪽팔려서 그냥 넘어갔다.
“그 계획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각성자 부대 천 명을 편성해 보내 보죠. 그래도 저희 둘이 드래곤의 시선을 끌어야 하긴 합니다만…….”
“네.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녀는 그러며 의자에 일어서 침대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좋은 향이 물씬 났다.
어, 이거…… 예전에도 맡아 본 거 같은 향인데…….
그녀가 침대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몸을 숙이는 그녀.
나이트 드레스도 같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이제 보니 가슴이 좀 파인 드레스.
새하얀 나이트 드레스와 더 하얀 살덩이가 두 눈을 어지럽힌다.
그녀는 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지호 님께 빨리 보답을 하고 싶은데…… 내일 중요한 일이 있으니 오늘은 참을게요. 오늘은.”
[명경지수가 발동합니다.]
와! 이거 없으면 진짜.
오늘 침대 박살 났다 아오.
[폴룩스가 제발 그 망할 스킬을 끄라고 합니다.]
아오. 무한 정력 쓰다가 애 생기면 어쩌려고!
[폴룩스가 애기를 그냥 낳으면 되지 걱정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걸린다면 무한 정력, 명경지수 다 끄고 그냥 하라고 합니다.]
[아우렐리아가 쟤는 그냥 무시하라고 합니다.]
하아아.
잠시 흔들렸다.
아니 계속 흔들리나?
[명경지수가 발동됩니다.]
[아우렐리아가 꼭 무한 정력이 아니더라도 임신은 할 수 있다고 주의를 줍니다.]
그녀의 계속된 주의가 없었으면 사달이 날 뻔했다.
솔직히 더 밀어붙였으면 어찌 될지 몰랐는데, ‘다음에는 꼭 중요한 이야기해요!’ 하며 디아나가 나갔다.
하나 계속 중요한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아아.
침착하자. 침착해.
미인계다. 미인계.
계획을 수정하고 마법사 각성자들을 모집해 이 진영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럴 거면 더 튼튼하고 위엄차게 지을 걸 그랬습니다.”
암브로시안이 마법사들을 보며 아쉽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드워프 시선에서는 영 부족한가 보다.
아침이 되자 나는 사도 지휘대에 속한 각성자만 일단 데리고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가장 경험치도 많이 먹었고, 데스 페널티도 반으로 감소하니까 먼저 도전하자고 했다.
다들 내 말에 순순히 동의하여, 부대는 빨리 편성되었다.
오히려 나머지 인원 중 자기도 가고 싶다는 걸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대장 따라가서 지금까지 이득 본 게 얼만데.”
“마법진 경험치 엄청나던데, 죽어도 되니 도전하고 싶어요.”
“전설의 블랙 드래곤이랑 이런 때 말고 언제 싸워 보겠어요?”
많은 이들이 전투를 원해서 2진과 3진을 편성하고 전투가 수월하면 바로 투입하기로 했다.
엘프와 드워프는 각성자들이 모두 투입된 이후에 상황 봐서 진입하기로 하고.
이렇게 기본 틀이 짜이자 5천 명의 군단이 전진을 시작했다.
각성자들의 사기는 최강.
금방이라도 용을 잡을 듯, 위풍당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