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52화>
51. 디아나가 변했다(1)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드레이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피가 한데 뭉쳐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은 피.
뭐냐 저건 또.
[질서의 사도인가! 신들의 왕이 누구인가.]
“주피터입니다만.”
제우스가 자동으로 필터링되어서 주피터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일그러지는 용의 얼굴.
[주피터? 아직도 그놈들인가…… 나의 안식을 깨우기에 다른 상황이 벌어졌나 했거늘. 이번 세계도 멸망해야겠구나.]
“예?”
[나는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 혼돈의 문을 열 것이다. 막고 싶으면 레어로 오거라.]
아카르디안이었다고?
안식?
뭐지…… 왠지 이놈 잡으면 안 되었던 거 아냐?
공략집을 봤다.
[두 개의 마법진을 부수자 확실히 혼돈의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타락한 디아나에게 분노의 정령을 부르라고 시키자 거대한 분노의 정령과 블랙 드래곤이 서로 맞붙었다. 블랙 드래곤은 이성이 반쯤 사라진 모양새라 기계처럼 ‘마법진을 복구해야 해. 복구해야 해.’ 하면서 마법진을 보다가 디아나를 상대하다를 반복하는데, 바보 같아서 상대가 어렵진 않았다. 용은 어차피 칼도 안 박히니 마법진이나 마구 부수다 보면 이놈이 자기 드래곤 하트를 바치고 혼돈의 문을 연다. 그럼 그때 2페이즈로 가는 거지. 암펠리안과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는 거야. 이때가 드래곤 때보다 더 힘들지.]
공략집 말대로라면 블랙 드래곤이 마법진 신경 쓰다가 디아나 신경 쓰다 자멸했다는 거구나.
흠…… 공략집대로 반쯤 혼이 나간 상황이면 내가 디아나 역할을 하고 나머지가 마법진 부수는 역할을 하면 될 거 같은데,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는군.
“대단합니다!”
“증폭하는 얼음검이라니…… 엘라임의 일격 같군요.”
“엘라임은 또 뭡니까.”
“물의 정령왕입니다. 제가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레블로 이 아저씨도 저놈들한테 전염되었나…….
“……그건 됐고요. 마법진이나 부숩시다.”
“알겠습니다!”
다들 마법진을 둘러싸서 집중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스레 공격하던 사람들이 곧 눈을 부릅떴다.
“마법진을 때리기만 해도 경험치가 올라!”
“와! 미쳤네. 전사들도 갑시다.”
경험치 오른단 소리에 흉흉한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마법진을 두들기는 전사들.
지금까지 제일 몹 잡는 데 소외되어서 그런지 아주 열심이었다.
엘프, 드워프도 도와주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인간들이 하도 경험치에 눈이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혼돈의 잔재를 부술 때 공적 인정이 됩니다. 저들이 하게 놔두시죠.”
“예. 알겠습니다.”
3천 명이 30분을 두들기자 완전히 쪼그라드는 마법진.
다들 레벨 업했다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걸 보니 괜히 그리핀 절벽에 용인들을 보냈나 싶었다.
에비강의 용바위에도 있다고 했지?
“마법진 하나를 더 파괴하고 가도록 하죠. 혹시 용바위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한 엘프의 안내에 따라 에비강으로 간다.
흑룡의 숲을 지나 길 따라 쭉 가면 레어.
옆으로 새면 강이다.
강 쪽으로 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물 위 용 형상의 바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둥둥 떠 있는 3차원의 입체 마법진까지.
물고기는 죄다 죽어서 그 시체가 강가에 떠밀려 내려가 있고 강물은 탁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지키는 존재는 없네요.”
“네. 그냥 부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들 경험치를 기대하고 신나 하며 무기를 들었을 때.
하늘 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하늘 위에!”
“유성입니다!”
태양 빛 아래서 새하얗게 불타오른 채 내려오는 유성.
정확히 마법진 가운데, 용바위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앗. 마법진이 부서지겠어!”
부서지는 게 원래 좋은 건데, 고놈의 경험치 때문에 안타까운 음성을 흘리는 사람들.
그 와중에도 경험치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화살과 마법을 날렸다.
그들이 한 번 정도 공격했을까.
유성이 그대로 용바위를 강타했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마법진의 규모가 눈에 띄게 작아진다.
튕겨 나가는 유성.
아니…… 자세히 보니 화염 전차다?
그 위에는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두 팔 벌려 손을 흔들고 있었다.
“김지호 님! 여기 계셨군요!”
“어? 디아나 님?”
태양신의 사도로 임명받고 떠났던 디아나다.
오. 교육은 끝난 건가?
마침 좋은 타이밍이다. 드래곤이랑 싸워야 했는데 잘됐어……?!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화염 전차로 나에게 달려오던 디아나.
나와 가까워지자 화염 전차를 역소환하고 내 품에 안겨 왔다.
억? 뭐지??
“디아나…… 님?”
“태양신께 저의 원래 운명을 말씀 들었어요. 절망의 구렁텅이에 놓일 뻔하던 저를 구해 주시고 신의 사도로 승격하게 해 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니 이분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내 품에 안겨 생글생글 웃는 디아나.
맨날 엄격, 근엄, 진지에 우울 4종 세트 얼굴이던 그녀였는데 이런 변화가 아주 낯설었다.
고마운 건 이해하는데 사람, 아니 하이 엘프가 뭔가 밝아졌어.
이거도 사도가 돼서 그런 건가?
내 품 안에 안겨서 날 올려다보는 디아나.
안 그래도 미친 미모인데 올려다보면서 해맑게 웃는데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게다가 가슴에 닿는 가슴이…….
어우…… 야…….
미치는데 이거.
[명경지수가 발동됩니다.]
[아우렐리아가 태양신의 마력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아직 레벨도 낮으니 케브리안에서는 질서 진영에서 도우면 도왔지 이상한 짓은 안 할 거라고 합니다.]
명경지수를 틈타 조언하는 아우렐리아.
일단은 디아나의 이 변화, 믿어도 되는 건가?
“흠흠…… 지호 씨. 총공격을 명할까요?”
헛기침을 하며 강시아가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도 뭔가 뜨겁다. 엘프들은 아주 경악을 하고 있고…….
“아. 그래 주세요.”
“그리고 군율을 위해서라도 좀…… 떨어지심이…….”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강시아의 지적에 수긍하며 물러나는 디아나.
맞는 말이긴 한데…….
아. 뭔가 아쉽네.
“제가 꼭 지호 님께 보답할게요. 일단 이건 제 약소한 선물이에요.”
그녀는 나에게 작은 배낭 꾸러미를 주었다.
배낭을 열어 보니 세계수의 잠재력 세트였다.
오오. 이거 아주 필요했는데!
잎 다 먹고 껍질 섭취 중인데 아주 좋아.
“사실 이거보다 정말 꼭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은 저분 말대로 전장이니 안 되겠네요. 이번 전투 끝나도 꼭 이 세계에 머물러 주세요. 아셨죠?”
“예. 알겠습니다.”
“헤헤. 약속하신 거예요.”
애교를 부리는 디아나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찌하리오.
남자는 미인에 약한 생물인 것을…….
“자. 그럼 저도 마법진 파괴를 돕겠습니다.”
“아. 그건 저들에게 맡기죠. 공적…….”
“아하…… 경험치 때문에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디아나.
아, 얘는 진짜 뭔 표정을 지어도 이쁘구나.
“사도가 되신 후 아셨어요?”
“예. 신께서 총애를 내려 주신 덕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면, 혼돈의 마법진이 그리핀 절벽에 있는데…… 그곳은 지호 님이 직접 가시는 게 어떠세요?”
“그리핀 절벽에 저 혼자요?”
“예. 지호 님도 경험치를 올리셔야죠. 그리고 거기는 지형이 험해서 대군이 가기에도 힘들고요.”
용인 녀석들에게 맡겨 두긴 했는데 그녀의 말을 들으니 갔다 올까 싶었다.
근데 위치를 모르긴 하는데…….
“위치는 제가 바람의 정령을 붙여 줄게요. 이들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세요.”
그녀가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고 길 안내까지 한다고 하자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SP 모을 때까지는 천천히 성장하려고 했는데 지금 속도로는 굳이 안 그래도 레벨 업이 느렸다.
레벨 100까지 올리기 전에 SP 10만 모을 거 같아. 흥청망청 쓰지만 않으면 될 듯싶어.
그리핀 절벽은 지형도 안 좋은 거 같으니 혼자 갔다 오자.
“알겠습니다.”
“네. 실프. 지호 님을 이끌어 줘.”
그녀의 외침에 나온 바람의 정령.
초록색의 작은 소녀 같은 정령이 나에게 손짓하더니 훨훨 날아간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나에게 두 팔 벌려 배웅하는 디아나.
그간 갑옷에 가려 안 보였던 흉부가 크게 흔들린다.
아…….
뭐지. 너무 변했는데?
어두운 거보다 밝은 게 좋기는 한데 너무 변해서 당황스럽네.
그리고 세계 탑미녀가 이렇게 푸시해 오니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뭐 어때. 케브리안 한정인데.
나 좋다는데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잖아?
태양신에게 명령이라도 받았나 싶었지만.
아우렐리아 말마따나 케브리안 한정해서는 일단 돕겠지.
일단 하데스를 방해해야 할 테니까.
“저기니?”
끄덕끄덕.
날이 저녁으로 저물 때까지 날아오자 그리핀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 길은 상당히 험난해서 사실 날지 않고서는 가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이름은 그리핀 절벽인데 그리핀은 없었다.
“이름만 그리핀인가? 아…… 아니구나.”
절벽 끄트머리 입구 쪽을 보니 검게 물든 그리핀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의 몸통을 지닌 몬스터.
그들이 입구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파 사이트(Far sight).”
마법을 써서 자세히 보니, 내가 꼬드겼던 용인과 그리핀들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용인들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긴 했지만, 그리핀들이 총출동해서 막는지라 뚫지를 못한 상황.
이거 본의 아니게 빈집털이 하겠네.
“커져라, 여의. 뇌신.”
여의를 확장하고 뇌신을 부여해서 거대한 마법진을 싹둑싹둑 잘라 냈다.
마법진은 어디를 잘라 내도 규모가 전체적으로 축소되었다.
왼쪽만 부숴도 줄어드는 건 원 전체가 조금씩.
그래서 그런지 베기도 쉬웠다
[레벨 업하셨습니다.]
벌써? 와 오르는 속도 실화냐.
[마력이 오릅니다.]
마력도 오르고 레벨도 오르고.
와. 이런 개꿀이 있나.
디아나 이 복덩이 같으니라고.
[영혼 흡수로 여과된 혼돈의 마법진이 재활용 창에서 하나의 스킬로 형성됩니다. ‘혼돈의 마법진 소환’ 스킬을 일회용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응? 재활용 창 이거 개봉만 되고 한 번도 안 썼는데.
다른 몬스터들은 그렇게 학살해도 안 주더니 바로 튀어나오네…….
마법진을 반 정도 줄이니까 그리핀들이 이상을 느낀 듯 나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하지만 뭐 용인도 못 이기는 것들이 상대가 될까.
“파이어 스톰.”
일단 오는 경로에 파이어 스톰을 뿌리고 신나게 칼질을 지속했다.
너무 하늘 위에만 있으니 마나가 안 차서 절벽 한편에 섰다.
[땅을 디디고 섰을 시 신체 재생력이 증가하고 마력 회복력이 증가합니다.]
대지의 여신 스카디의 축복대로 마나 회복력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럼 더 써도 되겠군.
“화염 전차, 너도 부숴라. 불사조 넌 그리핀 막고.”
[알겠다.]
불사조가 날아다니고 불꽃 폭풍이 휘몰아치자 다가오지를 못하는 그리핀.
녀석들에게 보란 듯이 마법진 해체를 지속한다.
“캬! 마력 쭉쭉 오르네. 또 레벨 업!”
“키에에에에엑!”
그리핀들이 애처롭게 울었지만, 열심히 칼질을 지속했다.
마법진이 점차적으로 작아지며 종국에는 한데 뭉치더니 검은 보석 모양이 되었다.
저런 거는 처음 보는데? 트렌트 콜로니에서나 아까 용바위에서 부술 땐 없었는데.
푹 하고 검으로 찌르자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콰과과광!
그와 함께 따라오는 거대한 폭발.
그리핀 절벽이 통째로 폭발하며 내 몸도 충격파에 의해 휭 하고 튕겨 나갔다.
그다지 아프진 않은데…… 마력이 엄청나네.
“플라이.”
비행 마법으로 하늘에 서니 새로운 메시지 창이 눈에 띄었다.
[마법진의 핵, 드래곤 하트 조각을 흡수했습니다.]
[마력이 7 증가합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차후 용족-성룡(成龍)으로 클래스 선택이 가능합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 재생’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아직 불완전한 스킬입니다. 드래곤 하트 조각을 더 흡수해야 스킬이 사용 가능합니다.]
오오 드래곤 하트라니.
디아나 이 복덩이!
사랑한다!
갑작스러운 대박에 전율이 흘렀는데, 갑자기 귓가에 위엄찬 음성이 들렸다.
[나의 하트까지 흡수하다니…… 이번 질서의 사도는 무언가 다르구나. 오라. 질서의 사도여. 레어에서 기다리겠다.]
드레이크를 죽였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