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49화>
48. 거래의 주체를 꿈꾸다
흠?
다른 생각을 하자.
드래곤 레어는 어떤 적이 나올까.
이런 약해 터진 놈들만 나오면 좋겠지만, 레벨 업이 문제긴 하네.
[아우렐리아가 깬 김에 이 요새 건물의 지하로 가 보라고 합니다. 중립 진영 신들의 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신물?
좋아. 무슨 신물일까.
하하하.
그녀의 지시에 따라 계속 계단을 걸었다.
딴생각하지 않기 위해 계단 벽돌의 배열을 보고 숫자를 세고 건물 양식을 감상했다.
참으로 조잡하군. 뭔가 배열이 딱딱 맞물리질 않아.
“여깁니까?”
[아우렐리아가 맞다고 답합니다. 우르크 종족은 지하에 신전을 차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전이라고 하기엔 뭔가 볼품없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온 지하실은 질퍽거리는 흙바닥에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다만 완전히 빛이 없는 것은 아닌 게, 지하실 정중앙에 있는 제단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위에는 누가 봐도 무가치해 보이는 흙으로 빚은 그릇이 있었다.
[아우렐리아가 그릇을 잡으라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라 그릇을 잡자, 제단에서 빛이 폭발하며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빛으로 이뤄진 공간에서 아우렐리아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직접 현신은 하지 않은 상태.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김지호 각성자. 위험할 뻔했군요. 그래도 혼돈의 소질을 열지 않아 다행입니다.]
엇?
알고 있으시네?
[사령대제도 저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단안경(單眼鏡)은 프로메테우스의 눈을 빼서 만든 것. 중립 영역의 힘은 거의 감지하지 못하지요.]
사령대제가 영혼의 일부 조각만 떼서 가져온 거라고 하던데요.
[예. 하필 그 조각에 저의 힘이 담겨 있었지요. 중립의 단말이 아주 미약해서 그로도 감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대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는 되지 않았죠. 그래서 사령대제의 제의를 그대가 받아들일까 아주 염려스러웠답니다. 다행히 현명한 선택을 했어요.]
“혼돈의 소질이 개방될까 봐요?”
[예. 한 인간이 지금처럼 두 가지 진영의 힘을 담는 것도 원래는 불가능한 상태. 여기에 혼돈까지 곁들여지면 영혼이 견디질 못합니다.]
죽을 뻔했던 건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근데 사령대제 말은 어떻게 들으셨어요. 그의 말이 사실입니까?”
[사령대제의 말은 아마 맞을 겁니다. B급이 되면 클래스를 하나 더 선택할 수 있는데 질서 진영에서는 당신을 천사로 만들려고 하겠죠.]
“중립 진영은 이를 막지 않나요?”
[저희는 현시대에는 그다지 힘이 없습니다. 게다가 질서 진영과는 일단 동맹에 가까운 관계라…….]
케브리안에서는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더니 동맹이었어?
[그 이후로 혼돈이 더욱 강해지고 동맹 관계를 맺었지요.]
“그러면 아우렐리아 님도 저 천사 만드실 건가요?”
[후후. 동맹 관계일 뿐입니다. 결국 저희도 다 경쟁 상대죠. 저도 사령대제의 말처럼 SP를 모아 원형 유지 스킬을 갖추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다만 당신은 상태창이 두 개라 SP가 십만 넘게 들 거예요. 그건 감안하세요.]
10만?
에에에엑.
너무 많이 들잖아?
으으으. 그래도 영혼 계열 스킬도 레벨 업했으니 어떻게든 모아 보자.
10만 보상 받을 게 다 날아가겠네.
사령대제한테 빚을 져야 하는 건가.
아니, 그놈한테 빚졌다가는 영혼까지 빼앗길 거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지…….
“알겠습니다. 근데 대체 뭘 경쟁하는 겁니까?”
[아직은 C라 또 SP가 깎일 겁니다. 그건 지금 알려 줄 수가 없군요.]
제약이 참 많네 많아…….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제가 명경지수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스킬이 발동하는 동안에 제가 당신의 사념이 폴룩스에게 퍼지지 않게 제거하겠습니다.]
“평소에는 사령대제가 한 말에 대해 생각을 해도 되는 겁니까?”
[네. 너무 많이만 하지 말고요. 입 밖으로는 절대 꺼내지 마세요. 대신 명경지수를 자주 발동시켜야 하는데…… 주변에 여자가 있으니 가능하겠죠.]
입가에 미소를 짓는 아우렐리아.
거참.
야한 생각 자주 하라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주위로 시선을 돌려 볼게요.
[명경지수 스킬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명경지수 LV2]
[패시브 스킬.]
[B급 패시브 스킬.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자아를 유지한다.]
스킬 내용은 똑같군.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중립 쪽으로 갈까요?”
[중립으로 온다 한들 탐욕스러운 대신은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B급이 되면 클래스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 천사나 드래곤을 택하지 말고, 영혼 계열을 또 선택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거래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다시 인벤토리를 열어 보시길…….]
자기 진영도 디스해 주시는 아우렐리아 님.
아아. 진정한 수호신이시다.
빛이 사그라진다.
흐으음.
명경지수 레벨 2라…….
이거로 하데스 관련 생각을 막을 수 있는 건가.
[폴룩스가 또 명경지수냐고 아우렐리아를 질타합니다.]
하데스 이야기를 해도 뭐라 안 그러는 거 보면 효과가 있나 보군.
다행히 들킬 가능성은 없어졌으니 생각을 정리해 보자.
질서 진영이 나를 천사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두 진영에서 그렇게 예측하고 있고, SP 분할 지급 하는 꼬락서니를 봐도 그래.
쳇. 어쩐지 스킬 너무 퍼 주더라.
SP를 아껴 두긴 해야겠다.
지구를 포기했다는 말.
이건 잘 모르겠다.
신들이 축복을 나에게만 퍼 줬다고 그런 건가.
그럼 만약에 지구가 멸망하면 나는?
나는 어디서 살지?
천사를 거부해도 지구가 없으면 살 터전이 없네.
잘해 봐야 라이아나처럼 던전 나오는 세계에 가서 안내원 하는 건가?
아. 씨. 그건 싫은데…….
지구를 내 한목숨 바쳐서 지키기는 좀 그렇다.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거든.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서 지키고 싶은 터전이다.
사실 지구 이외의 삶은 별로 생각을 안 해 봤으니까.
케브리안만 클리어하면 던전이 생성돼서 몬스터나 튀어나오는 줄 알았단 말이지.
그럼 거기서 제일 잘나가는 헌터인 내가 대장 먹으면서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단 말이야.
근데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해. 정말 최악을 가정하고 질서 애들이 지구 버리고 나를 천사로 만들어서 내빼려 한다 치면…….
으으. 개 같은데?
이 새끼들 완전 나쁜 놈들이잖아.
안되겠다.
B급이 되면 혼돈에서 정식 이적 제의를 하겠다고 사령대제가 그랬지?
그때 제의를 들어 봐야겠어.
그리고 아우렐리아의 말대로 영혼 계열 직업을 택해서 거래를 붙인다.
좋아. 질서 애들에게 경매 붙였던 것처럼 이번엔 세 진영과 대대적으로 거래하는 거다.
이대로 무력하게 신의 종으로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양다리든 세 다리든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다 할 거다.
일단은 케브리안을 클리어하면서…… B급을 노리되 SP 10만 넘을 때까지 레벨을 천천히 올리자.
질서네도 B급이 되어야 날 천사로 만드니까.
하아아아. 열 받으려고 하질 않아도 열이 오른다.
영문도 모른 채 신의 꼭두각시가 될 뻔했다. 지구는 멸망하고 하나의 전리품으로 딸려 갈 뻔했다.
열불이 터져 침대를 발로 한 번 더 차려고 했다.
“아오!”
[명경지수가 발동합니다.]
이거, 그래…… 화날 때도 발동하는구나. 머리의 스팀이 강제로 빠지자 이 스킬이 왜 벌써 발동되었나 생각했다.
혹시 너무 그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인가? 들킬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일단 지구인들을 키우면서, 천천히 성장해 나가자.
신들의 축복이 좋은 것만은 아니군.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SP 모을 때까지 천천히 성장하는 거다.
그동안은 최대한 원정대를 밀어 줘야겠다.
어차피 잡몹들 경험치도 안 되는 거, 이번 기회에 좀 키워 주자.
다음 날 우리 원정대는 지구로 귀환했다.
에비우드 요새를 원정대의 거점으로 만들었으니, 다시 진입하면 이리로 오게 된다.
“매일 쪽은 어쩔까요?”
지구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물어보는 강시아.
매일? 아, 그 기업.
하도 여러 일이 생겨서 잊고 있었다.
“음. 그냥 적당히 맛을 보여 주고 그만하죠.”
“적당히요?”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 감정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일개 기업에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이 정도면 그런 객기는 안 부리겠죠. 케브리안 쪽이 더 신경 쓰이니까.”
“하긴, 워낙 여러 군데서 두들겨 맞았으니 다신 안 그럴 거예요. 아,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비밀 회동을 한다는데 지호 씨를 초대했어요.”
“네? 절요?”
“네. 이번 회의는 아주 중요하다고 하네요. 지금 진전이 있는 부서진 세계가 케브리안밖에 없는데, 지호 씨에게 의견을 듣고 D급 헌터를 모조리 투입할지 말지 결정한다고 해요.”
그렇군.
다른 세계는 너무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 그나마 진척이 있는 케브리안에 몰빵할지 말지 결정한다 이거지.
“에슈타르는 아직도 다음 단계 진입이 되지 않았죠?”
“네. 다들 포기 상태예요.”
“그럼 모두 케브리안에 집중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대규모 전투가 여럿 있을 테니까. 그렇게 건의해야겠어요.”
에슈타르에서 던전을 선점하고 있는 사람이 지구인 중에선 가장 정예.
그들까지 정부에서 강제로 불러 모은다면 케브리안 공략 가능성은 더 올라갈 것이다.
사실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지.
“네. 그럼 뉴욕 유엔 본부에 가실 때 저희 그룹 전용기 타고 가실래요?”
“전용기요?”
“네. 주로 공적인 업무에만 쓰게 되어 있지만, 이번 일처럼 중요한 일도 없으니까요.”
전용기라니??
요즘 한창 일을 시키던 강시아가 갑자기 재벌집 딸내미로 보였다.
내가 너무 잘나가는 집안 자제를 자꾸 부려 먹은 거 아닐까?
어휴. 그때 사고 쳤으면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겠네.
[폴룩스가 병신이 병신 소리 하지 말라며…….]
메시지 창을 치워 버리고 대답했다.
“저야 좋죠. 황송해서. 전용기 언제 타 보겠어요.”
“지호 씨…… 이상한 데에서 스케일이 작아지시네요. 미국 정부한테 전용기 달라고 그러면 바로 대령할 거예요. 어제 지호 씨가 성벽 가르고 원맨쇼한 거 영상 돌면 또 저한테 이적 제의 엄청 들어올 텐데…….”
“거참. 갑자기 메시나 호날두가 된 거 같아.”
강시아가 내 말에 피식거렸다.
“그 둘 열 명씩 합쳐도 지호 씨 몸값엔 미치지 못할 거예요. 축구보다 생존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래. 사는 게 더 중요하지.
“근데 언제 모이는 거예요?”
“일주일 후요. 이번에도 삼 일 쉬기로 했으니, 한 번 더 원정 가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요?”
한 번은 더 갔다 와도 된다 이거지.
이번엔 드래곤 레어까지 길을 좀 터야겠군.
“그럼 이번엔 별일 없으면 열흘만 있다가 돌아오죠.”
“네.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강시아가 웃으며 그리 대답했다. 나는 집으로 가며 하루에 얻는 SP가 얼만지 계산해 보았다.
영혼 중개로 중개하는 신은 6명.
폴룩스, 아우렐리아, 아폴론,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제우스.
이들 중 아우렐리아는 60 정도 올랐고, 질서 진영의 신들은 한 명당 200 조금 넘게 주었다.
하루에 벌어들이는 SP는 결국 1,060 정도.
100일이면 10만 모으겠네.
이거 생각보다 엄청나구나.
SP는 지금 3만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
10만 이상 SP를 모으긴 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투자를 하는 게 낫겠다. 8만을 할부로 받긴 할 테고, SP가 이렇게 많이 쌓였는데 쌓아 두기만 하면 괜히 의심 살 수도 있지.
거기에 능력치가 너무 달리면 사령대제에게 제압당할 확률이 높다. 능력을 갖춰 두는 건 필수지.
현재 68인 마력부터 일단 찍었고, 80이 되자 SP는 7천 정도 소모되었다.
80에 일단 모두 맞춰 보자고 생각하고 힘과 민첩도 싹 다 찍었다.
추가 포인트까지 합해서 찍은 결과 모든 능력치를 80으로 맞출 수 있었다.
SP가 11밖에 안 남았지만. 뭐, 금방 차겠지.
중립 진영은 전반적으로 B 채워진 정도를 싹 맞추려고 조절하며 SP를 1,000정도 남기고 모조리 써 버렸다.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내 육신.
[폴룩스가 이 정도면 B등급에 근접할 거라고 감탄합니다.]
[아우렐리아가 비상으로 사용할 SP를 조금 남겨 두라고 충고합니다.]
폴룩스의 감탄이 그저 좋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우렐리아의 말에 이제야 깨달은 듯 말한다.
“그래. 이제 SP 좀 아끼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제부턴 모을 명분이 되리라.
투자한 SP가 워낙 많아서 그럴까.
힘 조절을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걷다가 딴생각하자 아스팔트 위에 발이 푹 하고 박혔다.
푹. 푹.
아. 이거 안되겠네.
두 걸음 걸어도 푹푹 박히자 그때서야 더 집중하자고 생각하며 다시 힘 조절을 했다.
수치상으로만 힘이 2배 이상 뛰었으니…… 거기에 실제로 오른 힘은 차원이 달랐다.
“어…… 저 사람 봐.”
“헌터인가?”
“내가 아는 오빠도 헌턴데 저러지는 않던데…….”
“나 저런 거 처음 봐.”
주위에서 놀란 듯 구경하는 사람들.
몇몇은 핸드폰도 들고 있었다.
“찍으시면 안 됩니다!”
“거기 여성분, 핸드폰 주세요. 국가 공무에 관련된 일입니다. 영상 삭제하겠습니다.”
갑자기 협회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영상을 지우고 해산시키는 남자들.
“에이 씨. 뭐야.”
“저 사람 유명한 헌턴가 봐.”
“티브이에서 본 적은 없는데?”
투덜거리며 해산하는 사람들.
검은 양복 중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김지호 헌터님. 상부에서 꼭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져서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잘했어요. 근데 이 아스팔트는 어쩌죠?”
“이건 저희 측에서 복구하겠습니다. 김지호 헌터님께서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검은 양복.
나는 집에 가려다가 다시 협회 건물로 걸어갔다.
지하 트레이닝 센터에 가서 힘 조절 좀 하고 가야겠다.
3일간 불어난 능력치에 적응했다. 그 후 또 늘어난 각성자 부대 3,500명을 이끌고 케브리안으로 진입했다.
드래곤 레어.
처음 올 때는 투석기 돌멩이에 맞아 죽었던 내가 어느새 5,500명을 이끌고 드래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