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40화>
39. 만신전의 초청(2)
포탈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보이는 것은 새하얀 구름의 세계.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대리석 바닥이었다. 내 몸도 그 위를 딛고 서 있었다.
시야는 안개처럼 뿌옇게 보였지만, 라이아나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몇 분 정도 걷자 우리의 양옆으로 사열하듯이 늘어선 대리석상이 보였다.
인간, 드워프, 엘프와 여러 종족의 석상이 같이 있어 크기는 다양했으나 다 실제 인물인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대리석상이 사실적이네요.”
“전설 등급 가운데서도 업적이 높은 분은 대리석상으로 만들어져 만신전의 입구에 자리를 지키게 되죠.”
“전설 등급이면 B등급이죠? 그럼 라이아나 님도 찾다 보면 있나요?”
“저는 그 정도로 업적이 높질 않아서…… 영혼 중개자님은 워낙 빨리 성장하시니 여기에 언젠가 석상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네요.”
B등급에서도 윗줄은 이런 데서 대리석상으로 만들어질 정도인가. 물론 대리석상이 끝도 없이 쭉 늘어서서 있긴 했다만.
B는 엄청 윗등급이라기보단 좀 어중간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희소한가 보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대리석 석상의 크기가 달라졌다. 갑자기 가만히 서서는 무릎까지밖에 안 보일 정도로 거대해진 석상.
그리고 평지였던 길도 한 칸, 한 칸 계단형으로 지형이 바뀌었다.
석상이 양옆에 하나가 있고, 한 칸 올라가면 하나가 또 있고.
석상이 워낙 커서 계단 하나하나의 공간도 폭이 넓었다.
“이 사람들은 A급인가요? 근데 왜 이렇게 커요?”
“A급은 반신의 경지입니다. 육신을 초월하며, 석상에서도 보셨듯이 거대화가 가능하죠.”
반신급이 되면 저렇게 거대해질 수 있는 건가.
거대 석상을 구경하며 수십 분을 걷다 보니 라이아나가 멈춰 섰다.
“만신전 입구에 다 왔군요. 이동 포탈이 생겼습니다. 김지호 헌터님 혼자서만 입장이 가능하네요.”
“그런가요?”
“예. 정식 입구로 들어가기엔 아직 영웅 등급이라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신들께서 따로 장소를 마련하셨습니다.”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랑은 대조적으로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서 와.”
“폴룩스?”
“얼굴을 다시 보는 건 오랜만이네.”
금발의 털북숭이 미남, 폴룩스가 바닥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뼉을 치자 갑자기 빛이 밝아졌다. 사방이 검은색의 흙벽으로 막혀 있는 공간.
천장에서만 빛이 발하고 있었다.
“혼돈의 주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길 골랐지.”
그러고 보면…… 사령대제가 날 주시한다고 했지.
“혼돈의 주목을 받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죠?”
“문제가 아주 많지. 영혼 중개자라서 문제고. 영혼 약탈자라서 문제고. 너무 세서 문제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면서 말하던 폴룩스.
“다행히 아직 저쪽에서 완전히 걸릴 정도로 강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 뭔가 이상한데 선은 안 넘었네 생각할 거야. 뭐, 불사조로 난리 피운 건 좀 시선을 살 만했지만,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흠…… 사령대제라면 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서 영혼부터 굴복시키겠지. 그의 영혼 고문은 전 우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거다.”
폴룩스는 그러며 아쉽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원래는 세 신에게 다 영혼 중개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눈에 띄니 한 자리만 진행하도록 하자고 이야기가 나온 상태야.”
“한 자리요? 그럼 영혼 중개 두 자리는 언제 채우나요?”
“요새 수비 메인 퀘스트를 깨면 그때는 괜찮아. 그동안은 한 자리로 참아 줬으면 해. 중립신들이 한 명은 더 해도 된다고 해도 그 말 듣지는 말고.”
“백 일 동안 성 지키라는 메인 퀘스트요? 근데 그거 깨면 뭐가 달라지나.”
“달라지지. 봐 봐.”
내 말에 바닥에 앉아 있던 폴룩스가 검지를 대리석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땅을 죽죽 그어 3단계의 계단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중 첫 번째로 그은 맨 아래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케브리안의 트레인 요새를 지키는 전장은 엄밀히 말하면 1스테이지에 해당되지. 우리와 혼돈의 군주는 첫 단계에서는 D에서 C등급까지만 메인 스테이지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합의를 봤어. 근데 네가 상태창이 두 개인 데다가 신들의 축복을 독점하고 있으니…….”
첫 번째 바닥에서 올라온 선, 첫 번째 계단 상단에 점을 찍는 폴룩스. 그리고 옆으로 선을 쭉 긋더니 ‘고자’라고 썼다.
“그거 설마 저는 아니죠?”
“왜. 너 고자 맞잖아. 정력 스킬을 쌈질에만 쓰다니. 쯔쯔. 진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뭐 고자라고 칩시다. 그럼 지금 제 능력이 벌써 C등급 제한이 넘을 정도로 올라서 주시를 받은 건가요?”
“어. 불사조로 화려한 불꽃 쇼를 한 게 결정타지. 아우렐리아는 안 그랬어도 어차피 들켰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알아차리는 시간은 늦었겠지. 내 생각엔 불사조만 아니었으면 C급의 상위 이삼십 퍼센트 수준이라고 보는데.”
“그래도 불사조가 없었으면 성이 함락되었을 겁니다.”
“그럼 뭐 어때? 에슈타르 가는 거지. 애초에 부서진 세계에 너무 미련을 가지지 마. 망한 행성들이니깐.”
SP 10만 보상을 주는 메인 퀘스트 때문에 사력을 다한 거지. 누가 사령대제의 주시를 받을 줄 알았나?
“애초에 왜 그런 합의를 한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지구의 신규 각성자들을 위해서지. 쟤네들이 작정하고 전력을 다하면 B급, A급이 가도 힘들어. 이미 세계를 장악한 애들이거든.”
“아하. 지구인들이 너무 어렵지 않게 난이도를 조정한 거군요.”
“응. 케브리안이 초반에 심각하게 난이도가 어려운 거지 다른 동네는 초반에 할 만해.”
“그건 이해했습니다. 근데 혼돈의 군주들은 뭔 이득이 된다고 이를 찬성한 건가요?”
그는 계단 옆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여러 선을 그어 버렸다.
그리고 선 옆에 ‘쾅. 콰직. 펑펑.’ 이런 효과음도 써 놓았다.
음…… 이거 설마 부서진 세계인가.
신이라고 다 예술적이진 않군. 초딩 그림 같은데.
“저들은 이 년간 전장의 구성과 대신의 제약에 합의하고, 우리는 대신 이 년 후 부서진 세계의 완전 소멸을 승인했지.”
“완전 소멸요?”
“어. 아무리 부서진 세계라고 해도 대신께서는 아직 영향력이 있거든. 그래서 이 년간 우리의 의도대로 하고 안 되면 우리는 완전히 손 떼기로 계약했지.”
자기가 그려 놓은 동그라미에 X 표시를 그린 폴룩스.
그는 다시 계단 그림으로 손을 옮겨 두 번째 계단을 찍었다.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두 번째 단계로 오르게 되어 있어. 그럼 그때는 우리가 정한 제한선이 B로 확장되니 문제없지. B로 확장한 건 혼돈 녀석들이 여기서 C는 말도 안 된다고 해서 정한 거긴 하지만, 네 경우엔 전화위복이네.”
“아하. 그럼 클리어 때까지 눈에 안 띄는 게 낫겠군요.”
“어. 그래서 오늘 선택할 신들의 보상도 눈에 안 띄거나 봉인된 것으로 준비했다고 들었어.”
그가 손으로 바닥을 두들기자, 땅이 우르르 울리더니 원형의 황금 기둥이 4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 눈높이 정도에서 멈춘 황금의 기둥 위에는 신들의 보상이 놓여 있었다.
작은 단검,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빛 보석, 두꺼운 책, 백색의 과일.
“물건 앞에 가서 확인해 봐. 메시지 창이 뜰 거다.”
난 나한테서 가장 가까운 작은 단검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증폭검 여의(如意).]
[아이템 등급 A]
[헤파이스토스가 설화에 영감을 얻어 만든 역작. 검의 예리함, 강도, 크기, 무게, 형태를 모두 사용자의 능력이 닿는 한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하다. 이 외에도 마나, 영력, 신성력 등 검에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기운의 효율을 증폭시킨다.]
이거 여의봉이랑 느낌이 비슷한데?
탐난다.
“여의는 헤파이스토스 님이 최근에 만든 역작이지. 사실 S급이 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손이 삐끗해서 아쉽게 A급이 된 무기지. 그건 가지고 나가면 메인 퀘스트 깰 때까지 무조건 봉인이야.”
“여기서 시험 삼아 쓰는 건 어때요?”
“여기선 괜찮아. 나도 구경하자.”
폴룩스가 선선히 허락하자 난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단검이었는데, 검신 가운데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음…… 커져라. 두꺼워져라. 길이는 현재 대검 정도면 되나?
윙.
그렇게 생각하자 검신이 살짝 울리더니 불쑥 커져 내가 쓰던 양손검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오! 신기해. 한번 천장까지 뻗어 봐.
그러자 불쑥 솟아오르며 천장에 닿는 검 끝.
외날 형태의 도로 변해 보라고도 하고, 강도를 극도로 약하게 하여 부러뜨리기도 해 보고 이런저런 실험을 해 봤는데 다 내 의지대로 검이 움직였다.
그렇게 검의 형태를 바꿀 때마다 마나가 소모되었지만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강시아가 준 검 날이 다 상했는데…… 하! 이거 탐나네.
으. 오늘이 아니더라도 3개 중에 하나는 무조건 너다.
나는 아쉬움에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시 원위치에 놓고 이번엔 보석을 확인해 보았다.
[아스트라페의 파편.]
[스킬 등급 A]
[제우스의 번개, 아스트라페의 파편이 보석화한 물건. 흡수할 시 뇌신(雷神)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이것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뇌신?”
내 질문에 폴룩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뇌신? 아버지 제우스의? 아니 그게 왜 여기 있냐…… 그건 선택하지 마. 그 스킬 습득하고 나가면 사령대제의 주시가 확신으로 바뀔 거다. 큰일 나 진짜.”
뭐야. 봉인도 안 되는 건가?
애초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 여기 왜 있냐고 아버지가 또 장난친 거냐고 폴룩스가 투덜거렸다.
이것도 탐나긴 하지만 반응 보니 안 되겠네.
이번엔 책을 구경해 보았다.
[마법 총서.]
[스킬 등급 A]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질서 영역의 마법을 필멸자에 맞게 정리한 책. 사용자의 마력에 걸맞은 마법과 마력 활용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각성자도 쓸 수 있도록 수면 중에 자동으로 교육을 진행한다.]
이 책도 좋네.
이거 있으면 마법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마력량이야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저절로 교육도 시켜 준다니 아주 좋은데.
내 능력에 발맞춰서 마법을 가르쳐 주는 거니까 갑자기 확 강해지거나 이런 것도 아닐 테고.
“이것도 봉인인가요?”
“마법 총서? 저절로 이해? 자면서 가르쳐 줘?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킬이…… 머리 달리면 못 배우는 마법의 단점을 완전히 없애 버렸잖아. 이건 고위급 마법만 안 쓰면 괜찮을 것 같긴 하다만…….”
폴룩스는 마법 총서를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더니 갑자기 나를 무섭게 노려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아테나 여신께서 직접 만드신 거 같은데. 그 바쁜 여신께서 보통 생각하지 않고서야 만들기가 힘들 텐데…… 여신님의 총애를 받다니!”
아니 수호신이 날 질투해서 어쩌려고요?
“혹시라도 아테나 여신님 만나게 되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거다.”
툴툴거리던 폴룩스는 이건 굳이 봉인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이러면 갑자기 마법 총서로 마음이 쏠리는데…….
그래도 다 확인해 봐야지.
[세계수의 첫 번째 열매.]
[아이템 등급 A]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첫 번째로 수확한 세계수의 첫 번째 열매. 사용자의 모든 잠재 능력치를 크게 확장시킨다.]
이거는 디아나한테 받은 거랑 비슷한 거네?
약간 김이 새는군.
아직 나뭇잎으로도 오르는 잠재력인데 벌써 이걸 먹을 필요 있을까?
“그러고 보니 폴룩스 님.”
“왜?”
“제 잠재 능력치 아세요?”
“네 잠재? 초반에 받은 능력치가 뭐였는데?”
“555요.”
“호. 그래서 성공을 한 건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폴룩스는 나한테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한계…… 최악이네. 555 받은 게 놀랍다.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