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31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4)
오. 효과가 있다.
무서운 공략집…….
“사도님. 제발 방해하지 마세요.”
그녀의 몸에서 사라지던 빛이 다시 올라왔다.
나는 그걸 보고 다시 귀를 쓱 만졌다.
이번엔 별 반응이 없었다.
“지금은 별 느낌 없죠?”
“아…… 네.”
“하이엘프의 신성이 유지된다면 외부의 자극에 무해 하죠. 아까처럼 신성이 약해져 있으면 귀 만지는 것만으로도 놀라잖아요. 느낌이 어땠어요?”
“간질간질하고…… 놀라고, 등골이 자극되고 그랬습니다.”
그래?
갑자기 공략집에서 나온 수많은 포인트가 기억났지만 참았다.
“신성이 미약하게 남은 상태에도 그 정돈데, 완전히 사라지면 무방비 상태라고요. 그러다가 큰일 나요.”
“하지만…… 저는 죽으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자매들을 잃을 수 없어요.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디아나.
다시 주문을 외우려고 하자 내가 다시 귀를 만졌다.
이번에는 참는 듯, 이마에 주름을 진 채 열심히 주문을 외운다.
아 진짜 고집불통이네.
공략집에 나온 직빵 포인트는 지금 입은 갑옷 안쪽이지만…….
거길 만지면 치한 확정이니 또 다른 포인트인 뒷목을 노리자.
주문을 외우는 디아나에게 가까이 다가사서 양 귀와 뒷목을 살살 쓰다듬었다.
찡그린 그녀의 표정은 아름다웠지만 여기서 그녀가 타락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모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하도 만지작거리니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아…… 간…… 간지러워요!”
“아 좀. 왜 이렇게 성격이 무대포야. 제가 해결할게요. 들어가서 잠이나 자요. 그놈의 주문 그만 좀 외우고.”
“사도님…… 여기서 시간이 지체되면 사도님한테도 안 좋습니다. 전 죽음을 각오했으니…….”
으아아아. 답정너야.
아니 왜 이렇게 분노의 정령을 소환하려고 안간힘이야.
그냥 확 타락시켜?
신성 떨어지면 내가 공략집대로 해? 아오?
으으 아냐. 우린 질서 진영이라고.
그래, 질서 진영…….
[폴룩스가 이렇게 된 김에 사고 치고 중립 진영으로 가자고 합니다.]
[아우렐리아가 저런 멍청한 놈은 질서의 신도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제발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입장이 바뀐 거 같은데…….
폴룩스 아저씨는 진짜 중립이나 혼돈으로 가시죠, 그냥.
아우렐리아는 내가 중립 가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아, 몰라. 머리가 더 복잡하다.
디아나부터 말리자, 일단.
“사도님…….”
디아나가 눈을 글썽이며 나에게 호소한다.
아. 앤 너무 미인이야.
심각하게 예뻐. 이러니 내가 나쁜 놈 같잖아. 타락을 막는 내가 악역 같다니…….
하아. 타락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공략도 알긴 아는데…….
뭔가 자꾸 인벤토리 안의 공략집이 ‘빨리 내 말대로 해. 너도 좋잖아. 기대했잖아.’라고 말을 거는 느낌이야.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퀘스트 창이 떴다.
[디아나는 태양의 신 헬레니스가 가장 아끼는 하이엘프였습니다. 신의 사도가 된다면 반신의 자격까지 오를 만한 능력을 갖추었으나, 불행히도 그녀는 살아생전에 태양의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헬레니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으며 그녀의 ‘완전’한 모습을 그리워했습니다. 디아나의 타락을 막으십시오. 헬레니스가 사용자에게 부여한 권능을 강화할 것입니다.]
[특별 퀘스트]
[난이도 미정]
[트레인 요새의 귀환 전까지 디아나의 분노의 정령 소환을 저지하라.]
[퀘스트 완료 보상]
화염전차 소환 스킬 강화.
화염전차 스킬 강화라니.
안 그래도 점점 쓸모 있는 화염전차였는데, 강화까지 해 준다니 눈이 뒤집혔다.
그래. 무슨 타락시켜서 공략집을 따라.
인간으로서 그러면 안 되지. 쓰레기잖아, 쓰레기.
결국 아껴 두었던 스탯 포인트를 마력에 몰빵해야겠군.
어차피 올릴 거, 스킬 강화 받고 올린다고 생각하자.
“디아나. 당신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그 숭고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전 당신이 이대로 타락 엘프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 있습니다. 저만 믿어요. 당신 혼자 모든 걸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말구요.”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질서 진영 SP는 어느새 1000에 가까웠다.
원래 부서진 세계에 있을 땐 794였는데, 지구에 가면서 하루 100씩 불로소득이 꼬박꼬박 저축된 결과였다.
거기에 질서 진영 추가 능력치는 9.
나는 일단 SP를 모두 마력 강화에 쏟아부었다.
1포인트 올릴 때마다 100씩 들었기에 마력은 45.7이 되었다.
거기에 추가능력치 받은 9개까지 모두 투입했다.
그러자 54.7이라는 마력 수치가 나왔다.
단번에 마력이 35.7에서 반이 넘게 오른 상황.
거기에 아테나의 축복으로 능력이 2.5배 증가하니 마력 증가폭이 어마어마했다.
“삐약! 삐약! 삐이이약!”
작업이 끝나자 삐약이가 갑자기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온몸에 불꽃이 치솟기 시작했다.
서서히 몸집이 커지며 신체가 병아리의 몸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타난 것은 완연한 불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새.
생긴 건 독수리 같은 맹금류처럼 사납고 위엄 있게 생겼는데 온몸이 불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게 늘어진 불의 꼬리도 특징적이었다.
크기는 참새보다는 조금 크고, 비둘기보다는 작은 정도. 그래도 화염으로 이루어진 몸에 달라진 외양 때문일까.
병아리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엄이 느껴졌다.
난 마력 올려서 화염전차를 강화하려고 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삐약이가 진화했네.
[인간. 드디어 날 성장시켰군. 생각보다 빨랐어.]
귓가를 울리는 근엄한 음성.
이거 설마 삐약인가?
삐약이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날 노란 불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 삐약이, 말도 가능하냐?”
[삐약이는 집어치워라, 인간.]
“쳇. 그 이름 정들었는데…….”
[하지 마.]
“예예.”
삐약이는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런 진화에 놀란 건지 디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삐약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엘프여. 이제 분노의 정령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 주인이 자신의 미래와 잠재력을 희생하여 나를 진화시켰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잠재력을 희생하셨다니요?”
그러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사조님.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전사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그 재능, 반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그 잠재력을 지금 모두 끌어오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했다. 모든 잠재력을 마력을 올리는 데 끌어 쓴 것이다. 하이엘프, 너를 위해서.]
“어째서…….”
디아나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나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스탯 포인트와 SP는 또 받을 텐데.
삐약이를 힐끗 보니 녀석이 윙크를 했다.
[그녀 같은 타입은 이래야 미안해서 네 말을 듣게 된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 바로 들어오는 음성.
헐…… 얘도 한 뻥 하는구나?
나도 질 수 없지.
“어째서 그런 희생을 하신 겁니까!”
“태양의 신께서 주목하는 하이엘프가 이대로 타락하는 걸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희생은 아닙니다. 마력이 강해졌으니.”
“하지만 마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반신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그걸 포기하신 거라고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아나. 당신이야말로 반신이 될 자질이 있는 분입니다. 태양의 신께서도 그래서 완벽히 준비가 된 이후에 사도로 임명하려고 하시는 거고요. 그런 분이 분노의 정령에게 몸을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전 신의 사도로서 그런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불사조. 가죠.”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한 후 멍한 표정의 그녀를 지나쳤다.
그리고 향한 곳은 불의 성소의 고목.
아 이렇게 잔뜩 설교하고 불 안 붙으면 완전 쪽팔리는데.
[내 차례군.]
불사조가 나무로 날아가 입에서 불길을 내뿜었다.
작은 체구에서 내뿜는 불길은 커다란 고목을 단번에 감쌀 정도로 커다랬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마력 엄청 뛰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흐으읍!]
한 번으로는 불이 안 붙는지 두 번, 세 번 불길을 내뿜는 불사조.
근데 이 고목은 불이 붙을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아 안 돼 여기서 안 붙으면 무슨 개쪽이야. 삐약이, 너도 잔뜩 폼 잡고 이러면 안 되지.
표정은 세상 심각하게 유지하지만 속으로는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섯 번이 넘어 거의 열 번째쯤 되자 마나량이 거의 바닥이 났고, 아 망했다 싶었을 때…….
화르르륵!
고목의 왼쪽 나뭇가지 쪽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성소의 고목은 크게 왼쪽, 위쪽, 오른쪽, 가지군 세 군데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그중 왼쪽이 해결된 거다.
“불이…… 붙었어?”
“사도님! 불을 붙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역시 전신의 사도, 최후의 전사이십니다.”
이젠 거의 내 신도 수준인 알피드가 어느새 깨서는 나에게 다가왔다. 다른 엘프들도 잠에서 깨 다들 불이 붙은 고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불이 붙었어…….”
“원래는 엘프 60명은 있어야 작은 가지가 불이 붙을까말까일 텐데…….”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다들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가 확 살아나며 엘프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장내가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남탕만 전전하다 꽃밭에 오니 마음이 훈훈하군.
나에게 존경의 눈빛을 표하는 여자 엘프들도 심심치 않게 보여 괜히 어깨가 더 으쓱해졌다.
“디아나 님. 아직 모두 불을 붙이진 못했지만, 이쯤 되면 성공이라 봐도 되겠죠?”
“예…….”
“전 이제 나머지 부분에 불을 붙이도록 할 테니, 모두들 쉬고 계십시오. 디아나 님도요.”
내가 깨어난 일행에게 손짓하자 엘프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도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저희만 쉴 수는 없습니다!”
“알피드. 저랑 뛴 거 기억나지 않습니까? 제가 피로를 느끼지 않는 몸인 것도 아시고요. 괜히 오늘 밤새웠다가 내일 늦어지면 그게 더 곤란합니다.”
“아…… 예.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알피드는 그때를 떠올리는지 창백한 낯빛으로 수긍하며 엘프들을 설득했다.
알피드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엘프들은 나에게 거의 절하듯이 인사를 하며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
다만 디아나는 아직도 우두커니 서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아나. 가서 쉬세요.”
“아니…… 제가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사도님에게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죄 아닙니다. 잠재력이야 다시 생겨날 수도 있는 것. 디아나가 타락 엘프가 되는 거에 비하면 이건 대가라고도 부를 수 없어요.”
“하지만…….”
“아. 정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다음부터는 제 말에 잘 따라 주세요.”
“네. 이제부터 저는 사도님만 믿겠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제 죗값을 치르기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흠. 그러면 트레인 요새 방어가 끝난 후 저한테 선물이나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자꾸 책임을 더 지고 싶어 하기에 난 가볍게 이야기했다.
하이엘픈데 뭐 아이템 같은 거 있지 않을까? 게임에서 흔히 나오는 세계수의 열매 이런 거 있잖아.
퀘스트 보상도 있지만 이런 부수입도 스스로 창출해야지. 흐흐.
“선물…… 잠재력…….”
“아니, 꼭 잠재력이랑 연관시킬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적당히 알아서 주시면 됩니다.”
적당히에 악센트를 넣었다. 디아나라면 이렇게 말해도 좋은 걸 주겠지. 책임감이 과한 성격이니까.
“예……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네. 그럼 쉬고 계세요.”
생각에 잠겨 나무에 기대 앉은 디아나. 몸을 웅크려 무릎을 껴안은 채 시선은 여전히 나와 불사조를 향하고 있었다.
흠. 쉬러 들어가면 좀 퍼질러 누워 있다가 마력 차면 다시 불 붙이고 이럴 텐데. 왜 자꾸 쳐다보는 건지 원.
콘셉트를 해치면 안 되니 마력이 떨어지면 앉아서 명상하는 척을 했다.
“선물…… 잠재력…….”
자꾸 날 보면서 저 두 단어를 중얼거리는데 왠지 무서웠다.
마나를 완전히 채워 불을 지피고, 다시 채워 불을 지피고 하는 과정은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각보다 꽤 오래 걸렸는데, 처음에 불 붙은 건 예전에 시도했던 게 축적돼서 빨리 터졌던 것 같았다.
그래도 해가 뜸과 동시에 고목은 완전히 불타올랐고, 불의 성소도 개방되었다.
모두들 몸을 펄쩍 뛰고 기뻐했지만, 디아나만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멍한 듯하면서도 내가 그녀를 돌아볼 때마다 묘하게 반짝였다.
“선물…… 잠재력…….”
아. 그 소리 좀 그만 해.
괜히 말했나 싶을 정도다.
으으. 저 정도로 이야기 하는데 좋은 걸 주겠지.
소름이 돋는 걸 참고 선물이나 기대해 보자.
주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