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 2개-30화 (30/240)

<내 상태창 2개 - 30화>

29.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3)

불의 성소로 가는 길인 이데아 산의 초입.

그 길목에는 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뼈의 요새가 있었다.

요새는 조악했지만 오크 좀비와 해골 궁수가 군데군데 자리하여 있었다.

“리치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미리 와서 요새화했군요.”

“그렇군요.”

나는 아르테미스의 활을 소환해서 디아나에게 넘겼다.

“이건…….”

“어제 보니 저보다는 디아나 님이 쓰시는 게 나으실 것 같습니다. 저로선 두 개 이상의 화살을 쓰는 게 무리라 리치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꼭 리치를 제압해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리치를 잡으면 SP를 많이 줄 거 같긴 한데 내 활 실력으로는 방어막을 못 뚫으니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아르테미스의 활을 쓰다듬다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다들 병장기를 챙겨 전투 준비를 마치고 서서히 적 요새를 향해 접근했다.

불의 성소를 가기 위해선 꼭 뚫어야 하는 길.

제압해야 한다.

주변 산기슭에서 저들의 기습이 있을지, 아니면 저번처럼 땅속에 숨은 건 아닌지 주의 깊게 보며 우린 천천히 전진했다.

“요새를 뚫어야 하지만 그대로 돌진하면 피해가 너무 크겠죠. 제가 불의 전차를 단독으로 돌진시키겠습니다. 적이 오히려 기어 나오게 만들죠.”

“네. 그럼 저희는 방어 준비를 하겠습니다.”

작전은 간단했다.

불의 전차를 보내서 요새에서 날뛰게 만든다.

그럼 안 보이던 리치가 나와 불의 전차를 없애려 들든가 언데드들이 기어 나오겠지.

리치가 나오면 활로 저격. 언데드가 돌진하면 방어전. 이도 저도 없으면 불의 전차로 요새 태워 버리기.

나머지는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대처하기로 했다.

“불의 전차 소환.”

말은 여전히 2필이지만 예전보다 커다래진 불의 전차.

이번에는 탈 게 아니기에 그냥 바로 출발시켰다.

그러자 바로 예의 음산한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스 월.]

[프로즌 필드.]

[안티 매직 실드.]

요새 위 뼈로 된 망루에서 검은 안개가 일더니 리치가 나타났다.

그리고 일제히 불의 전차를 향해 냉계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사가 없어 미쳐 날뛰었던 트레인 요새 때와는 달리 불의 전차도 기세를 잃고 주춤한다.

야, 그때 마법사 부대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핑. 핑.

리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디아나가 활을 쏜다.

여러 발의 화살이 리치를 향해 동시에 날아가는데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날아가는 빛의 화살.

삐약이도 어느새 날아가 열심히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크으으…… 성가시군…….]

리치의 검은 보호막에 금이 가자 그들은 냉계 마법 쓰는 걸 그만두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러면 화염 전차가 또 활약하지.

“히히히힝.”

리치가 사라지면서 녹기 시작한 얼음벽을 뛰어넘으며 요새 안에서 날뛰는 불의 전차.

좀비들의 육신이 불에 타오르며 불이 순식간에 번진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깎이는 마나.

전차에 탔다면 이렇게까지 빨리 까이진 않겠지만, 리치 때문에 안 타고 원격 조정하니 금방 소진된다.

“소환 해제.”

마나가 반 정도 남았을 때 소환을 해제했다.

혼자 날뛰는 전장이 아니고 리치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니 마나를 다 쓸 순 없지.

“아까 리치는 피해 좀 본 것 같았나요?”

“신수 피닉스께서 입김을 불어넣어 주신 덕에 피해는 입었을 겁니다. 하지만 라이프 베슬 때문에 완전히 소멸은 하지 않았겠죠.”

“라이프 베슬?”

“리치가 계속 언데드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라이프 베슬을 파괴하지 않으면 리치는 계속 부활하죠. 그래도 리치 하나는 이 전장에서 다시 나타날 순 없을 겁니다.”

없애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지금 이 전장에서 보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리치는 디아나의 화살에 혼쭐이 났는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좀비들에게 붙은 불을 끄는 데 열중했다.

그동안 엘프들은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주변을 늪지대처럼 흐물흐물하게 만들고 수비 진형을 짜고 있었다.

[일어나라.]

[돌진하라.]

리치의 외침에 요새의 문이 열리고 오크 좀비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와 동시에 양옆의 숲 쪽에서도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언데드들.

덩치 큰 해골 기사가 선봉에 서고 그 뒤에 해골과 좀비가 따라왔는데, 딱 봐도 요새의 오크 좀비들보다 이들이 더 강해 보였다.

삼면으로 포위된 형국.

“제가 좌측을 맡겠습니다. 여신의 사도님께서는 우측을 부탁드립니다.”

“예. 활은 가지고 계세요. 리치 견제도 필요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우측에 가기 전에 일단 정면을 정리하기로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오크 좀비들에게 화염 전차를 한 번 더 돌진시켰다.

오크 좀비들의 몸에 붙어 번지는 불.

이번에는 리치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본다.

화염 전차를 한바탕 휘젓게 한 후 마력이 거의 남지 않을 때 우측으로 달려갔다.

가기 전 좌측 방향을 잠시 바라보니 디아나가 혼자 날뛰고 있었다.

늪지대를 평지처럼 휙휙 뛰어오르며 해골 기사에게 돌진하는 디아나.

쌍검을 휘두르는데 강해 보이는 해골 기사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간다.

확실히 세긴 세단 말이야.

케브리안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믿음직한 동료다.

나도 질 수는 없지.

내가 맡은 방향으로 단숨에 도약하여 해골 기사 앞에 선다.

해골 기사가 단숨에 나에게 뼈로 만들어진 대검을 휘두르지만 신성력이 담긴 내 검을 이기지는 못한다.

단숨에 반 토막 나며 쓸려 나가는 해골 기사들.

신성력이 닿는 부위가 새하얗게 타오르며 빛에 잡아먹혀 소멸한다.

언데드한텐 신성력이 진짜 직방이네.

“으어어…….”

오크 좀비들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다가온다.

늪지대에 발이 잠기는데도 동료의 몸과 머리를 짓밟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언데드들.

하지만 그 움직임이 너무 느릿느릿해서 나에겐 아무런 위협이 안 된다.

마력은 최대한 아끼면서 검을 크게 회전한다.

급소가 아니더라도 몸이 베이기만 하면 새하얀 불꽃에 잠겨 소멸하는 언데드.

발이 잠기지 않게 언데드들을 디딤돌 삼아 전장을 주파한다.

어쩌다 그들의 공격이 닿아도 헤파이스토스의 갑옷은 전혀 뚫지 못한다.

언데드라서 동료가 죽어도 그냥 무식하게 부나방처럼 다가오는 좀비들.

엘프 본대에 다가가지 않도록 헤이스트로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좀비들이 날 타깃으로 삼도록 했다.

나야 쉽지만 엘프 본대에게는 인해 전술을 막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우측에서 몬스터를 학살하면서 보니 엘프 본대는 정면을 막기에도 버거워 보인다.

신성력이 담기지 않아 좀비들이 화살을 맞는다 한들 금방 기어오고, 다리를 부숴도 팔로 기어오니깐.

불의 마법도 간간이 나왔지만, 불의 정령이 개방되지 않은 일반 클래스 마법이라 그렇게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삐약아. 니가 본대를 좀 도와줘라.”

“삐약!”

삐약이가 열심히 날갯짓하며 본대를 향해 날아간다.

이거 뭐 말이 본대지 제일 쓸모가 없구먼…….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서 도와줘야겠어.

대검을 큰 동작으로 휘두르며 좀비들을 학살할 때, 갑자기 시야가 붉어지며 전신이 따가워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위험 감지.

느끼자마자 일단 뒤로 크게 점프했다.

[데스 레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커다란 청록색의 빛 무더기가 그대로 꽂힌다.

무슨 레이저처럼 뻗치는 강맹한 죽음의 빛.

빛에 닿은 언데드가 모두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와. 저거 맞았으면 장담 못했겠는데.

[데스 레이.]

그때 또다시 들리는 데스 레이.

디아나에게 데스 레이가 꽂히나?

하지만 데스 레이의 목표는 엘프 본대였다.

오크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어서 그런가, 이들은 나처럼 데스 레이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직격당했다.

빛이 하늘에서부터 뻗어와 땅바닥을 크게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10여 명의 엘프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가루로 사라졌다.

아…… 이거 엄청 센데?

“안 돼!!”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빛의 화살.

수십 발의 화살이 순차적으로 날아가 하늘 위의 두 리치를 덮친다.

그들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화살을 맞았다.

[크어어억…… 암흑 마력이…….]

[그래도…… 목표는 이루었다…….]

어둠의 보호막이 사라진 채 소멸하는 리치.

둘이 사라지자 언데드들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는다.

“에쉴마저…….”

디아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데스 레이를 맞고 사라진 동료들이 있던 자리에서.

남은 엘프는 스물 남짓.

일행의 3분지 1이 사라졌다.

“인비저블 마법을 통해 접근해서, 소멸을 도외시하고 최고위 암흑 마법 데스 레이를 쓰다니…… 지독한 놈들입니다.”

내 곁에 알피드가 다가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마 불의 성소를 개방하지 못하도록 이쪽으로 데스 레이를 쓴 것 같습니다. 성소를 개방하는 데 불의 정령을 다루던 엘프들이 여럿 필요하니까요.”

아.

“아무리 라이프 베슬이 있다 한들 신성력이 담긴 공격으로 소멸하면 지닌 마력을 상당히 소모할 텐데…… 일반적인 리치답지 않군요. 마력밖에 모르는 놈들이 이 정도 각오라니.”

우리는 일행을 어찌어찌 추슬러 불의 성소에 도착했으나 분위기는 다운된 상태였다.

물의 성소 때가 쉬운 거였군.

갑자기 난이도 어려운 게 실감 난다.

방금은 내가 뭘 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으니…….

“숫자가 부족하지만……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혹시 사도님께서도 가능하시면 도와주십시오.”

“제가요?”

“예. 피닉스의 힘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성소에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이 위치해 있었는데 여기에 불이 붙어야 불의 성소가 개방된 것이라 했다.

엘프들은 모두 정체불명의 주문을 외우고 나는 디아나의 지시에 따라 삐약이를 시켜 나무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하나 물의 성소 때와는 달리 3시간이 넘게 지나도 나무에 불이 붙을 징조는 없었다.

숫자가 부족해서 그런가.

“반응을…… 하지 않는군요.”

“불의 전차도 써 보겠습니다.”

A급 스킬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불의 전차를 나무에 보내니 전차가 갑자기 조각조각 불길로 분해되며 쭉 흡수되었다.

“효과가 있습니다. 한 번 더 가능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흡수될 때 마나가 다 빨려 들어갔다.

다시 회복을 해야 가능한데…… 남은 SP로 마력 수치를 올릴까.

흠.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그러고도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떠오르도록 고목은 변화가 거의 없었다. 불의 전차를 엄청 삼켰을 때 미약한 불길만 붙었을 뿐.

디아나는 태양의 힘이 가장 강한 내일 낮에 다시 하자며 휴식을 제안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흠…….

리치 같은 원거리 마법 몬스터 대처 방안을 좀 생각해야겠네.

투명화에 날아다니고 보호막까지 있으니 골치 아프단 말이야.

무한 정력 때문에 눈은 감았지만 잠이 안 와 이리저리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일행 다 자게 하고?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삐약!”

삐약이가 나보다 먼저 나는 듯이 디아나에게 날아갔다.

나도 얼른 녀석의 뒤를 쫓았다.

“나 때문에 나의 자매들이 희생되었다. 불의 성소는 반드시 깨워야 해. 이 방법밖엔 없어…… 리치가 언제 올지 몰라.”

중얼중얼하며 눈이 새빨개지는 디아나.

몸을 은은히 감싸던 빛은 오히려 줄어 있었다.

아, 이거 설마 또 분노의 정령?

말 더럽게 안 듣네.

“디아나 님! 멈추세요.”

“사도님…… 그럴 수 없습니다.”

“내일은 충분히 열 수 있습니다.”

“언제 리치가 당도할지 모릅니다. 더 이상 자매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호위대가 거의 전멸해서 멘탈이 터졌구나.

하지만 니가 타락하면 어쩌라는 거야.

계속해서 뭔가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디아나.

뭔가 눈이 풀린 게 위험해 보인다.

아. 젠장.

난 그녀 앞에 달려갔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의 귀 가운데 뒤편이 자극 포인트지. 타락하기 전에는 그저 간지러워하지만, 신성의 빛이 멎고 타락하게 되면 자극이 아주 강해진다…… 약물과 같이 배합하면 효과가 좋지.]

갑자기 공략집의 문구가 떠올랐다.

김지호 이 쓰레기 새끼 끌끌 하면서도 머릿속에 속속 들어왔던 문구들.

마침 은은하게 빛나던 신성이 거의 멎어 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휙.

“아…… 아앗. 뭐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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