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9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1)
“라이아나?”
“라이아나가 누구죠?”
고개를 갸웃하는 디아나.
분명 얼굴은 지구에 있는 라이아나였다.
뭐지? 쌍둥이인가?
아…… 아니면 본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
부서진 세계는 과거를 수정하기 위해서 각성자들을 보내고 끊임없이 리플레이되는 세계.
여기서 벌어진 일들은 다 혼돈의 군주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초기화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케브리안의 원래 결말은 멸망이다.
그리고 소수의 엘프와 드워프만이 신의 구원을 받아 신의 사도가 되었다고 했지.
그렇게 사도가 된 그들은 이름도 신이 부여한 것으로 바뀐 채 도우미 자격으로 지구에 왔지.
흠…… 그럼 눈앞의 디아나는 라이아나의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멸망할 세계에서 분투를 벌이다가, 신에게 구원받아 사도가 되어 라이아나라는 이름을 받은 게 아닐까?
“삐약! 삐약!”
삐약이도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바로 날아가서 얼굴을 앵기는 걸 보면, 녀석도 라이아나 느낌이 나나 보다.
디아나는 그런 삐약이를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이 병아리는……?”
“제가 원래 있는 세계에 당신과 아주 닮은 하이엘프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라이아나죠. 그녀가 저 불사조의 부화를 도와주었는데, 그래서 녀석이 그녀를 떠올리나 봅니다.”
“저랑 비슷한 하이엘프라니…… 신기하군요.”
“예. 생긴 게 비슷해서 쌍둥이인 줄 저도 착각했습니다.”
그녀는 삐약이를 몇 번 더 쓰다듬다가, 나에게 녀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쌍검을 다시 뽑아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디아나 님? 왜 갑자기…….”
“제 호위대의 시신을 리치가 농락하게 둘 순 없습니다.”
“그럼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 제 불찰로 이렇게 언데드가 된 동료들입니다. 제가 직접 하게 해 주십시오.”
고통스럽고 우울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 엘프 시체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시신 하나하나에게 말을 거는 디아나.
“프레데리카. 72년 전부터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던, 다정한 친구이자 충직한 호위여. 나의 불찰로 꽃다운 그대가 졌다…… 나 디아나를 용서하지 마라.”
“엘리자. 그대는 언제나 싱그러웠지.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 봐도 되겠냐고 할 때의 그대 모습이 잊히지가 않아…… 너의 심장에 내가 칼을 꽂다니…….”
부대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칼을 찌르는 그녀.
그때마다 엘프 시체는 모두 정화되어 먼지로 사라졌다.
어느새 도착한 에쉴의 2부대와 알피드도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쩝…….
내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군.
마지막 엘프까지 정화시킨 그녀가 등을 돌렸을 때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푸르렀던 그녀의 눈이 새빨개져 초점이 흐렸다.
피눈물이 흐르는 양 뺨에도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갑자기 공략집의 내용이 떠올랐다.
[하이엘프 디아나에게 내가 이렇게 서술했던 조교를 가한다 한들, 사실 그녀의 정신에 크게 타격이 가해지진 않지. 하이엘프는 종족이 거의 반신급이라서, 애초에 타락이 안 되는 것들이야. 하지만, 그녀의 부대원을 그녀의 눈앞에서 하나하나 죽이고 능욕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그녀가 스스로 분노하고 분노해서, 스스로가 타락하기를 바라며 분노의 정령을 끌어올릴 때. 그녀가 본인의 신성을 포기하고 분노에 감정을 맡겼을 때. 그때 내가 서술했던 내용들이 도움이 될 거고 약들도 잘 먹히지. 흐흐흐…… 아무튼 분노의 정령에게 먹힐 첫 징조는 눈 색깔이 달라지는 거다…….]
진짜 눈 색깔이 바뀌지 않는가?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저걸 막아야 해.
“디아나 님. 정신 차리십시오! 분노에 잡아먹히시면 안 됩니다.”
“사도님…….”
“당신이 분노에 잡아먹혀 신성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그게 저들이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 기분은 알겠으나 복수를 위해서라도 냉철해지셔야 합니다. 분노의 정령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나의 말에 디아나가 눈을 감으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물의 정령의 힘은 돌아왔습니다. 저번에 보니 물의 정령으로 활력 증진과 회복 마법을 펼치시던데, 디아나 님에게도 좀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던 엘프 2부대도 얼른 디아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위로했다. 부대원들의 위로 덕분인지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디아나.
어휴. 한숨 돌렸네.
“사도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성을 잃어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동료들이 죽었는데 당연한 분노지요. 다만, 거기에 잡아먹히는 것이야말로 적의 의도에 말려들어가는 거니 주제넘지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아아…… 제게 사도님 같은 냉철함과 지혜가 있었더라면…… 우리 자매들을 희생시키지 않았을 것을…… 이렇게 언데드가 돼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되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또 그쪽으로 간다, 또.
급 우울해지다가 여기서 분노가 터질 수도 있다.
이럴 땐 일을 시켜야지.
“그 생각은 일단 접어 둡시다. 불의 성소를 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빨리 이데아 산으로 갑시다.”
“예. 전신의 사도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출발합시다.”
알피드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디아나도 마음을 추스린 후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여기 모인 엘프의 숫자는 30여명.
지금까지 죽인 엘프 좀비 숫자가 200은 넘었던 거 같은데…… 이 정도면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군.
이 숫자로 불의 성소도 물의 성소 때처럼 쉽게 열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분위기가 워낙 다운되어 있으니 불의 성소로 일단 가기로 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침묵이 감돈 채, 우리 일행은 계속 나아갔다.
“여기에서 쉬었다 가야겠어요. 부대원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디아나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쩐지 이동 속도가 느려진 느낌이더라.
일행이 늘어서 알피드 때처럼 업고 갈 수는 없는 상황이니…… 쉬어야겠군.
“공터를 찾아볼까요?”
“저희는 나무에 기대 자도 괜찮습니다만, 사도님께서는 어떠신지…….”
아, 그래. 엘프였지.
알피드 업고 다니다 보니 숲의 종족이란 걸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서 쉬도록 하죠.”
엘프들은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사방에 흩뿌렸다. 물어보니 불침번을 대신하는 역할이라 하기에 나도 그거 믿고 좀 쉬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케브리안에서는 처음 자 보는 건가. 처음 자는 게 숲속이라니…….
엘프 일행들은 속속 나무에 기대 잠을 청했다.
외모가 외모다 보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침체되어 있어 별로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시스템 창을 보니 언데드 군단은 SP도 거의 주지 않았고 능력 흡수도 없었다. 시체들이라서 그런가…… 와. 이건 너무 쓰레긴데.
다만 경험치는 좀 올라 있었는데, 그래도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용인을 죽였을 때랑은 보상이 너무 차이가 나서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았다.
전투는 그때보다 쉽지 않았는데. 리치를 내가 못 죽여서 그런가? 보상이 짜네.
“신의 사도님.”
능력치를 찍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디아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투구를 벗은 채 순백의 갑옷만 입은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신의 사도 그 자체였다.
“아까 일,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지요.”
헤파이스토스의 갑옷을 해제하고 있던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화답했다. 지구에서는 슈퍼 갑이나 다름없었던 라이아나, 아니 디아나가 이렇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니 좋은데? 느낌이 새롭구먼.
“그리고……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태양의 신 헬레니스께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시나요?”
“네?”
“화염의 전차는 헬레니스께서 그분이 대단하다고 인정한 사도에게만 내리는 권능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지호 사도님께서는 그만큼 그 분의 총애를 받는다는 뜻이겠지요…….”
말문을 흐리며 표정이 어두워지는 디아나.
아니 아폴론인지 헬레니슨지 어쨌든 태양신이 좋아하는 건 그쪽이 더 잘 알 텐데.
태양신의 사도는 원래 그쪽이시잖아요.
아. 맞아.
“SP 아세요? SP 좋아합니다.”
“네? 그게 뭐죠?”
“아, 소울…….”
[SP가 1 감소합니다.]
엑? 왜?
[폴룩스가 SP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합니다.]
[아우렐리아가 사용자의 등급이 낮아 SP를 누설하면 SP가 감소한다고 경고합니다.]
헐…….
그런 경고 사항이 있으면 미리 알려 주실 것이지.
이 시스템이 참 친절한 거 같으면서도 불친절하다니깐.
어쨌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 여자부터 납득시키자.
“아…… 천상의 용어를 잘못 이야기했군요. 실언이 나왔습니다. 헬레니스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라…… 근데 그게 왜 그것이 궁금하신가요?”
질문에는 질문으로.
그럼 SP도 잊겠지.
그녀는 별 의문을 가지지 않고 내 질문에 대답해 줬다.
“제가 그분의 사도가 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운명이요?”
“예. 지금껏 하이엘프 중 태양신의 사도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태양신의 사도가 되기만을 고대하던 중, 제가 태어났을 때 태양신의 축복이 내려왔습니다. 저희 일족은 모두 제가 태양신의 사도로 내정받은 거라고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근데 막상 성년이 지났음에도 그분의 음성이 들려오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신의 사도로 내정된 분들은 모두 성년이 되어 사도로 인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뇌에 가득 잠긴 표정으로 말문을 이어 나가는 디아나.
이상하네. 지구의 라이아나는 태양신의 사도인 자기가 총책임자여서 A급 두 개 주는 거라고 했는데…….
여기선 또 태양신한테 인정을 못 받고 있고.
뭐야 대체.
하, 이거 뭐 그리스 로마 신화라도 공부해야 하나?
내가 답을 못하고 난처해하자 디아나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이라도 알고 싶어 여쭤 보았습니다. 혹시 그분의 총애를 얻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해서요.”
긴 귀도 축 처진 디아나.
지구의 자신만만하던 라이아나랑은 너무도 딴판이다.
이쯤 되니 사실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하이엘프는 다 비슷하게 생겼을 수도 있잖아?
에휴. 그래도 우리 팀의 최강 전력 중 하난데 기운 떨어지게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이렇게 우울해지다가 화내고 타락 엘프 될지도 모르잖아.
그냥 아무 말이나 해서 기분 좀 풀어 주자.
“디아나 님.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저 천상에서도 태양신께서는 그대를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아…… 태양신께서 저를 바라보셨다고요?”
“예. 디아나 님은 지금 태양신께 보다 더 완전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년이 지난 이후 사도가 되지 않았다고요? 당연하지요. 그렇게 바로 될 거였으면 하이엘프 중 태양신의 사도가 왜 지금까지 안 나왔겠습니까. 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지금 사도 지정을 못하실 뿐, 태양신께서는 그대를 주시하고 계십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의 귀가 쫑긋했다.
엘프들 순진해, 참.
이런 구라 해도 바로바로 먹히고.
“사도님은 정말 친절하시군요…… 감사드립니다.”
“뭘요. 곧 천상 세계에서 뵐 분인데 이 정도 말도 못하겠습니까? 하하.”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는 디아나에게 자신 있게 웃어 주면서 잔뜩 뻥을 쳤다. 태양신은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 언제 그대가 자각할 수 있는지 노심초사하신다. 이러면서.
어차피 이 세계 멸망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데 MSG좀 뿌려도 되잖아?
내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귀가 쫑긋하며 펴지는 얼굴을 보니 참 순진하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공략집에서 이르길 그녀의 귀가 아주 강력한 공략 포인트라고 했던가…… 흠흠.
“좋은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근심을 덜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어두운 표정으로 온 거에 비하면 밝아진 채 돌아가는 디아나.
그걸 본 다른 엘프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디아나 얘, 부대 차원에서의 걱정거리 아냐?
지구에서 그 자신만만해 하던 라이아나랑은 너무나도 딴판이다.
으음…… 라이아나=디아나 맞는 거 같긴 한데 이렇게 나오니 동일인 맞는지 참…….
좀 더 두고 보자.
뭔가 더 있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