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8화>
27.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1)
트레인 지역의 불의 성소는 휴화산인 이데아 산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하이 엘프 디아나 부대와 조우할 것 같았는데, 그녀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헤이스트.”
3서클 마법 배운 김에 속도 빨라지는 헤이스트를 써 가며 열심히 뛰어갔지만, 이데아 산의 중턱에 위치한 불의 성소에도 디아나 일행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흠…… 주변에 오크의 권역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오크 마을이 있긴 합니다만…….”
“그리로 가 보죠.”
알피드의 방향 지시 아래 뛰어 보니 확실히 3서클을 잘 배운 것 같았다. 공격 마법도 여럿 있지만, 헤이스트처럼 보조 마법도 아주 쓸 만했다.
“삐약. 삐약.”
어느덧 석양이 지고 어둠이 깔린 시간.
숲을 헤치며 열심히 달리는데 머리 위에서 쥐 죽은 듯이 있던 삐약이가 갑자기 날개를 뻗었다.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금 더 가 보니 공터가 드러났는데, 어째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 보니 놀랍게도 엘프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데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엘프 부대와 달리 그들을 공격하는 엘프들은 온몸이 부패하였다.
“디아나 님의 부대원들입니다만…… 왜 서로 싸우는지. 아! 좀비!”
내 등에서 전장을 살펴보던 알피드가 탄식했다.
그래. 좀비구나, 저게.
원래부터 좀비였을 리는 없고, 이들을 좀비로 만든 놈들이 있을 텐데.
일단 도와주자.
“알피드. 먼저 활을 쏘겠습니다. 그대도 준비하시죠.”
“예…… 엘프를 좀비로 만들다니…… 대체 어떻게…….”
아르테미스의 활을 들자 빛의 화살이 생성된다.
나는 100구는 넘어 보이는 좀비 엘프들을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퍽!
화살에 먼지처럼 재가 되어 사라지는 좀비들.
신성력이 담긴 화살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제압이 잘된다.
“원군이다!”
좀비에게 포위되어 절망에 빠져 있던 엘프 부대도 힘을 냈다.
그들이 열심히 좀비 엘프의 공격을 막는 사이 온 마나를 쏟아부어 화살을 쏴 댔다.
“으으…….”
뒤에서 동료 좀비가 죽어 사라지는데도 좀비들은 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엘프만을 노리는 좀비.
그러니 맞추기가 쉬웠고, 전투는 너무 일방적이었다.
마지막 한 마리를 쏴 먼지로 만들자, 살아남은 엘프 부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아…….”
“살았다…….”
“나스가 좀비가 되다니…… 흑흑…….”
몇몇 엘프들은 좀비가 된 동료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눈물을 흘렸다.
처연하고 울적한 분위기.
그래도 이대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알피드. 가죠.”
“네…….”
엘프들에게 가려고 하니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화살에 맞은 좀비는 신성력으로 정화되어 사라졌지만, 엘프 부대가 직접 잡은 좀비는 아직 남아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채 기어 다니는 좀비. 목이 날아갔음에도 눈알을 움직이며 경련하는 좀비. 완전히 불타 가루가 되지 못한 채 반은 부패하고 반은 그을린 좀비 등…….
원래 아름답던 종족이 이리되니 더 그로테스크했다.
“전 이들을 신성력으로 정화시켜야겠군요. 알피드 님이 부대원들에게 먼저 말해 주십시오.”
움직이지 못하는 좀비들을 빛의 화살로 하나하나 정화했다.
그렇게 장내를 거의 다 정리할 때쯤, 엘프들이 다가왔다.
“알피드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전쟁신의 사도이시여. 저는 디아나 수호대의 제이 부대장 에쉴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에 들어서서 거의 처음 본 게 아닌가 싶은 여자 엘프.
먼지와 피로 더러웠지만 역시 엘프답게 아름답다.
부대원들도 대부분 여성 엘프였는데 디아나가 이끌고 간 부대는 여자가 많았나 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리치…… 리치가 나타났습니다.”
“리치요?”
죽음을 거부하여 자신을 스스로 언데드화한 고위 마법사이자 언데드 중 강력한 축에 드는 몬스터.
지금까지 마법사 몬스터는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긴장되었다.
용인은 뭐 입에서 불만 뿜었으니.
“예.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신의 사도님! 디아나 님이 위험합니다!”
“빨리 그리로 가죠.”
에쉴의 인도로 오크 마을 쪽으로 이동하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하이 엘프는 엘프로 치면 왕족이나 다름없는 존재.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하이 엘프인 디아나는 그녀를 수호하는 디아나 수호대를 두 부대 거느리고 있었는데, 불의 성소를 찾는 과정에서 1부대의 절반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 흔적을 따라가 보니 나타난 건 불의 성소에서 가장 가까운 오크 마을.
디아나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오크 마을을 습격하기로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리치의 함정이라고 했다.
“오크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고 마을 가운데에 저희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하려고 했지만…… 그건 리치가 이미 좀비로 만든 후 피부색만 들키지 않게 마법으로 변형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헐. 머리도 쓰네.
지금까지 단순 무식 돌격했던 애들과는 좀 다른데?
하긴 고위급 마법사였으니 그 정도 속임수는 식은 죽 먹기겠지.
“디아나 님이 일제히 후퇴를 명령해서 전 제이 부대를 추스르고 후퇴했습니다만…… 디아나 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디아나 님의 성격상 홀로 언데드 부대를 막고 계실 겁니다.”
부하들이 도망갈 시간을 번다 이건가. 아니, 하이 엘프가 하이 엘프 수호대를 지키면 어쩌자는 거야.
여기서 잡혀가서 저쪽 진영에서 타락하면 골치 아픈데.
갑자기 공략집에 김지호가 쓴 19금 공략법이 떠올랐다.
아, 이 상황에 왜 또 그런 게 떠올라. 흠흠.
“시간이 없습니다. 디아나 님이 없으면 불의 성소도 열지 못합니다!”
“방향은 이쪽 맞죠? 일단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불의 전차 소환.”
거의 다 왔다는 느낌이 들자 바로 불의 전차를 소환했다.
여자 엘프들이 휘둥그레 놀라는 모습에 약간 어깨가 으쓱여졌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바로 출발했다.
영체화를 한 채 말을 달린다.
허공을 짚고 한 발, 한 발 쭉쭉 나아가는 불의 말.
한결 늘어난 마력 덕분에 무리 없이 달리다 보니 금방 오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그곳은 오크 마을이라기보다는 시체들이 모두 일어난 공동묘지 같았다.
“이건 뭐 죄다 언데드 천지잖아.”
엘프와 오크 좀비가 같이 흐느적거리면서 걸어 다니며, 하얀 뼈갑주를 입은 덩치 큰 해골 기사가 이를 통솔한다.
그들이 해일처럼 몰려들고 있는 곳은 마을의 한 중심 공터.
언데드 사이에서 빛이 번쩍거리며 신성력이 느껴지는 게, 저게 하이 엘프 디아나인가 싶었다.
[누구냐.]
귓가에 꽂히는 음산한 음성.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린다.
그쪽을 바라보니 로브를 입은 해골이 공중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골 주제에 눈빛만 붉게 빛나는 게 섬뜩하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활을 들어 기습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신성력이 담긴 화살.
잘만 맞추면 리치에게도 유효타가 되었겠지만…….
그의 몸을 보호하듯 검은색 보호막이 형성되더니 화살을 튕겨 냈다.
[신성력이 담긴 화살…… 네놈이 질서의 사도구나.]
검은색 보호막도 금이 간 게 완전하진 않았다.
데미지가 먹히긴 먹히는군.
불의 마차를 언데드 사이로 달리며 하늘 위로는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마차를 타면서 화살을 날리는 건 처음이라 다 맞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 적중하는 화살.
보호막에 금이 심하게 가자, 리치가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바로 복구되는 보호막.
흠. 만만치 않은데?
[다크 플레임.]
마차의 진로 방향에 갑자기 어둠의 불꽃이 벽처럼 치솟는다.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건 영체화를 해도 타격을 입는다고.
그냥 뚫고 들어가야 하나?
“삐약! 삐약!”
그때 삐약이가 삐약거리면서 입으로 검은색 화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냥 불뿐만이 아니라 저런 암흑불도 먹을 수 있는 거야?
[불사조라니! 신들의 총애를 받는 사도군. 흐흐흐. 좋아.]
위에서 음산하게 웃는 리치.
당장 마차를 위로 끌고 올라가 제압하고 싶지만 구출이 먼저였다.
언데드 군단을 모조리 불태우며 전진하니 엘프들이 그토록 구해 달라고 했던 하이 엘프가 눈에 보였다.
하이 엘프 라이아나처럼 온몸에 은은한 빛을 뿜고 있는 여인.
새하얀 갑주를 입은 그녀는 양손에 하나씩 검을 들고 화려한 검무를 추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백금발에는 피가 묻어 있고, 흰 갑옷도 피와 적의 시체 조각으로 지저분했다.
그렇지만 갑옷과 검에서 은은한 백광이 흘러나와 아름답고 경건했다.
신의 전사는 시커먼 갑주 입고 다니는 나보다는 이쪽 같은데?
“디아나 님 맞습니까?”
“예. 제가 디아나입니다. 태양신의 화염 전차라니…… 당신은 누구죠?”
목소리도 라이아나랑 비슷하다.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하이 엘프는 다 비슷비슷한가.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의 사도 김지호입니다. 태양신께도 따로 축복을 받았고요. 일단 시간이 없으니 전차에 올라타시지요.”
불길이 이글거리는 화염 전차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잠시 멈칫했다.
타기 무섭나?
“그쪽, 불에 안 탈 겁니다. 그 정도 조절은 할 줄 알아요.”
“아…… 알겠습니다.”
화염 전차 스킬을 쓰면서 그런 운용은 터득한 나다.
뭐, 솔직히 일반인 태우면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녀는 강하니까 괜찮겠지.
주변의 좀비들을 단번에 쓸어 버리고 몸을 휘리릭 날려 전차에 착지하는 디아나.
마치 무협 영화를 보는 거 같았다.
“조금…… 뜨겁네요.”
“그래도 견딜 만하죠? 달리겠습니다.”
흠. 잘 조절한 거 같은데 뜨겁다 하네. 일반인 안 태우기를 잘했다.
바로 전차의 방향을 돌렸다. 주변의 좀비들이 불타는 것을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지만, 마차의 넘실거리는 불길만으로도 덤비자마자 타올랐다.
그러고 언데드 군단을 짓밟으며 전진할 때.
[본 월.]
[다크니스 핸즈.]
[다크 플레임.]
[화염 마법은 쓰지 마라. 불사조가 있다!]
하늘 위에서 각기 다른 세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눈앞 땅바닥에서 뼈의 벽이 물샐틈없이 솟아오르고, 전차의 뒤로는 어둠의 불꽃이, 위에서는 검은색 커다란 손이 생겨난다.
이대로라면 포위당할 게 뻔한 상황.
“익스플로전. 익스플로전.”
5억이나 주고 배운 3서클 폭발 마법 익스플로전을 겹쳐서 사용한다.
펑!
뼈의 벽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더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쌍검을 내던지는 디아나. 신성력으로 물든 검이 교차하며 본 월을 쓸고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부서지는 벽.
검은 그대로 회전하며 그녀의 손에 탁 돌아왔다.
[체인 라이트닝!]
“안티 매직 실드. 안티 매직 실드.”
하늘에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벼락.
이놈들이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바로 안티 매직 실드를 시전했는데, 타이밍이 거의 동시다.
보랏빛의 보호막이 그대로 벼락을 흡수하여 사그라뜨린다.
하. 50억 받은 거 3서클에 퍼부은 보람이 있다.
[아이스 필드.]
[본 미사일.]
[라이트닝.]
그래도 계속해서 마법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성가셨다. 나는 아르테미스의 활을 소환해서 디아나에게 넘겼다.
“이게 뭐죠?”
“엘프니까 활 쏠 줄 알죠? 쟤네 좀 어떻게 해 봐요. 전 실드 쓰기 바빠요.”
“화살이 없습니다만.”
“그거 마력 화살이 자동으로 생기는 거예요. 시위에 손만 대면 돼요.”
그녀는 내 말에 활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하늘 위를 향했다.
그리고 활의 시위에 빛의 화살 2발이 생성된다.
뭐야. 2개도 만들어지나?
아니 2개를 한 번에 어떻게 쏴.
하지만 그녀는 쐈다.
투둑, 투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엔 시위에 화살 3개가 놓인다.
그리고 바로 발사되는 화살.
3발이 일제히 날아가고…….
그다음엔 4발.
4발째가 되니까 하늘 위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한 신음.
[크윽! 크아아아! 나의 마나가, 나의 암흑 마력이…… 새어 나간다…….]
[다크니스 실드를 뚫다니.]
[저 무기, 신의 물건이다. 철수한다!]
하늘 위를 바라보니 리치는 하나밖에 없었다. 몸에 빛의 화살이 2발이 꽂힌 리치. 화살에서 새하얀 불꽃이 일렁이며 그의 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리치는 어느새 도망쳤는지 아무리 쳐다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 엘프의 활쏘기가 기똥차긴 하구나.
어떻게 4발을 동시에 쏘냐?
툭. 툭.
마차를 미친 듯이 쫓아오던 언데드 군단이 하나둘씩 자빠진다.
그리고 리치들이 철수하자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지는 언데드 군단.
덩치 큰 해골 기사만이 그대로 서 있다가, 발부터 시작해 땅바닥 아래로 파고들 듯 사라진다.
“후우…… 잠시 멈춰 주시겠습니까?”
하이 엘프의 정중한 부탁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나도 없었는데 잘됐다.
그녀는 불의 전차에 내리더니 투구를 벗었다. 하이 엘프답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는데…….
어?
저 얼굴, 라이아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