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 2개-26화 (26/240)

<내 상태창 2개 - 26화>

25. 잠시간 귀환(2)

협회 최상층에서 케브리안 행성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내가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영혼 중개자님. 대체 어떻게 그 지옥에서 열흘이나 계실 수 있었습니까?”

“트레인 요새. 정령력이 봉인된 채 오크에게 동료들이 학살당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몰려들던 적들, 우르크 부대가 성벽에 올라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드워프고 엘프고 할 것 없이 모두 와 가지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자기들 기억이 온전하질 않아서 옆에 있는 엘프와 드워프가 서로 동문이 먼저 뚫렸네, 서문이 먼저 뚫렸네, 하며 싸우기까지 했다.

“귀 큰 놈 니들이 지키기로 한 동문이 먼저 뚫려서 우리가 후방에서 공격을 당해 죽었어! 정령 없이는 대체 쓸모가 뭐야?”

“이 땅꼬마들이! 키가 작아서 우르크 발목만 치다가 죄다 밟혀 죽은 주제에! 뚫린 건 서문이 먼저다!”

“저기요. 내가 보니까 엘프, 드워프 같이 합심해서 성의 각 문을 막고 있었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먼저 뚫린 건 남문이 먼저였을 거예요. 제가 거기 소환되었으니깐.”

“그렇군요…….”

아, 이 답 없는 놈들.

질문을 해도 옆에 있는 놈이 ‘아, 그거 아닌데?’ 이러니까 머리가 뒤죽박죽되었다.

짝짝!

“아, 정말! 다들 여기 모여 있지 말고 일하러 가세요. 영혼 중개자님이 오히려 혼란스러워하잖아요!”

그 꼬락서니를 보던 알레나가 손뼉을 치며 이들을 해산시켜 주었다.

“죄송해요. 다들 케브리안 행성에서 살아남으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저러네요.”

“뭐 그 정도로 어렵진 않던데요?”

“영혼 중개자라서 그러신 건지…… 원래는 삼면에서 무너지는 요새를 막기란 불가능하거든요. C등급이라 해도 역부족일 텐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알레나.

얘도 왠지 눈을 반짝이는 게 질문 공세를 펼칠 것 같다.

내가 선빵 치자.

“근데 몬스터가 혼돈 영역이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중립 진영과 싸우는 겁니까? 원래 다 싸우는 건가요?”

“중립 진영에 대해서도 아셨군요…… 하긴 D급 헌터 분들은 부서진 세계에 가시면서 점차 아시게 되니…….”

질서와 중립 진영은 애매한 관계. 혼돈의 영역이 강한 행성에서는 둘은 동맹을 유지하고, 케브리안 행성처럼 혼돈의 영역이 거의 없던 세계라면 행성의 주도권을 놓고 싸운다고 했다.

다만 이 싸움이 각 진영의 멸망까지 갈 정도로 크게 번지지는 않고, 그저 서로 누가 주도 세력인지 확인하는 선에서 그친다고 하였다. 케브리안 행성 때처럼 세계수를 부수거나 하는 행위는 거의 없다고.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이 혼돈의 마수에 넘어가 독자적으로 꾸민 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드래곤들은 그가 일을 그렇게 크게 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카르디안의 말에 속아 그와 함께 천사들을 견제했다 합니다.”

“용 하나가 독자적으로 꾸몄다고 그렇게 밀려 버리나요?”

“용은 그만큼 강대한 존재지요. 굳이 그럴 의지가 없을 뿐. 의지가 생긴 용이 작정하고 일을 펼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 줬죠…….”

그렇게 센 놈들이었어? 용족이 갑자기 좀 아쉬워지는데…….

아냐. 내가 사라지면 그게 꽝이지.

“그럼 트레인 요새만 사대 성소 개방하고 막으면 해결되는 건가요? 혼돈의 문은 안 열리고?”

“글쎄요…… 그랬으면 난이도가 불가능까진 아니었을 테죠. 결국 혼돈의 영역과도 충돌할 거예요.”

지금 요새 막아 봤자 혼돈 애들과도 싸우는 건가?

도움 되는 아군이 있냐 없냐 차이인 건가…….

오크 선봉대한테도 쓸려 나가던 요새 수비군이 생각났다.

하. 뭔가 답 없어 보이는데.

다른 행성은 할 만한가?

“에슈타르나 이런 덴 어때요?”

“저희가 그쪽 세계까지는 잘 모르지만 케브리안에 비하면 훨씬 할 만하죠. 에슈타르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에 던전이 생성되는 행성이라 어찌 보면 지구랑 비슷해요. 케브리안은 양 진영이 사생결단 내며 전쟁 중이라 어렵죠. 다른 세계는 일단 질서와 중립이 케브리안처럼 적대적이지가 않아요. 혼돈이 창궐하면 힘을 합치기도 하고요.”

“케브리안에 도전하는 사람 또 없답니까?”

“미국이나 러시아 등에서 촉망받던 헌터들이 도전했다가 몇 시간도 못 버텼어요. 그들 중 오크들에게 농락당하거나 해서 세 번이나 고통스럽게 죽어 폐인이 된 사람도 있죠…… 영혼 중개자님은 별로 안 힘들어하시는 것 같지만.”

투석기 돌 맞고 죽어서 그런가.

‘아, 죽어서 너무 무서워. 부들부들. 다시는 안 싸울 거야. 흑흑.’ 이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날 이렇게 굴욕적으로 죽이다니 다 쓸어 주마 이런 복수심만 불타올랐지.

“그래서 케브리안은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예요. 폐인이 되지 않아도 세 번 죽으면 레벨이 3이나 떨어지는데, 그러면 떨어진 3레벨을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가 열 배잖아요? 촉망받던 헌터들도 괜히 행성 잘못 선택했다가 엄청 뒤처져서 땅을 치며 후회한다고 해요.”

“그래요? 근데 전 이미 8레벨이나 올려서 34레벨인데.”

“에엑. 34레벨요?!”

정확히 말하자면 34.2.

용인 잡으니까 34.2가 됐네.

“아니 34레벨이라고!”

“대체 어떻게?!”

“일해요. 당신들은!”

아, 일하라고 했었는데 또다시 몰려온다. 알레나가 다행히 일하라고 해서 다들 투덜거리면서도 돌아갔다.

“34레벨이라니! 정말 잘됐어요! 두 번 더 죽으셔도 되겠네요. 제가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는 자살 마법 알아봐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요?”

“그럼 케브리안에 계속 계시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나를 전쟁의 여신의 사도라고 추앙하던 케브리안 행성 엘프들이 생각났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미 망한 세상의 잔재…….

결국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지구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데, 공략집이 중립 진영 공략집인 게 드러난 이상 케브리안 행성 클리어 확률은 그리 높진 않겠지.

여기에 계속 있는 게 과연 맞을까? 차라리 나같이 센 녀석이 에슈타르 가서 클리어 후딱 도우는 게 낫지 않겠어?

오늘 강시아 만나니까 한번 물어봐야겠다. 에슈타르는 어떤지.

아, 그러고 보면.

“케브리안은 좀 더 생각해 보고……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이제 돈 뭐로 벌어요?”

“네?”

“아니, E급 때는 지구 던전 클리어하고 마나석으로 돈 벌었는데 D급은 부서진 세계잖아요.”

“아…….”

“이건 뭐 결국 행성 보스를 잡아야 클리언데. 그 전까지는 돈 안 줘요?”

“마나석이나 던전핵 조각 없으세요? 아…… 맞다. 케브리안은 던전이 아니었지?”

뭐?

“에슈타르는 던전 위주라서 지구처럼 마나석이 나오거든요. 거기 던전 클리어하면 던전핵도 나오는데 이걸 저희한테 가지고 오시면 돈이 돼요.”

“헐. 아니 케브리안은 그런 거 없던데…… 마나석도 안 나오던데…….”

“거기야 던전이 아니라 전쟁터잖아요. 마나석이 나오겠어요? 아. 그래도 혹시 정령석 가져다주시면 저희가 품질 보고 비싸게 매입할게요. 요새가 정령 요새가 되면 정령석도 나올 거예요.”

정령 요새?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와. 진짜 이렇게 무급 봉사 하는 거예요? D급인데?”

“저희 쪽에서 매입할 건 없지만 협회에선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니…….”

알레나는 잠시 기다리면서 전화 통화를 했다.

드워프들은 날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어려운 행성인데 돈도 못 벌고…….”

“에슈타르 D급 마나석만 해도 개당 일억인데.”

“던전핵은 훨씬 비싸잖아.”

“젊음의 비약에 쓰이는 거였지 그거? 지구인들은 참 젊음에 집착해.”

와!

어이가 없네.

D급 마나석이 1억에 던전핵은 훨씬 비싸다고?

아, 당장 케브리안 가서 자살할까?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거린데.

내 빚이 5억이야. 5억이라고!

“제가 물어보니 25레벨부터 30레벨까지는 1레벨당 2억의 수당금, 30레벨부터 35레벨까지는 5억의 수당금을 드리겠다고 하네요. 다른 D급 헌터들은 에슈타르에서 던전 돌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김지호 씨만 한 푼도 못 벌었다고 하자 특별히 예산 집행했다고 합니다.”

“오! 그렇게 많이 줘요?”

협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30억 받는 거네?

와…….

갑자기 현실감이 아득히 사라진다.

“25레벨부터 레벨 업 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김지호 헌터보다 일 년 전에 각성한 대한민국 최고 레벨 헌터 유진태 씨도 레벨이 44밖에 안 되었어요. 50렙이 되어야 C급이 되는데…….”

너무 느리다니까요. 하고 알레나가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느리지.

흠…… 하긴 내가 싸운 건 아예 대규모 부대 단위였지.

몬스터 찔끔찔끔 잡는 거랑 대규모 학살은 얻는 경험치가 다른가.

“상태창에서 레벨 확인만 하면 바로 돈을 입금한다는데. 어쩌시겠어요?”

“아니 그 거액을 지금 바로요?”

“삼십억이 거액인가요? 김지호 헌터님 능력에 비해 너무 작은 대우라고 생각하는데요.”

하하하하.

엘프들이 돈 관념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긴 곧 떠날 사람들인데 당연히 그러겠지.

“그 엘프가 맞는 말 했네요.”

“네?”

“당장 미국에서 지호 씨 귀화한다고 하면 천만 달러는 보낼 거 같은데요. 너무 싼가?”

강시아에게 연락받고, 마중 나온 롤스로이스를 타고 안내받은 식당.

청담동에 위치한 코스 요리 전문. 한 층에 손님 한 팀만 받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래서 나름 차려입고 삐약이는 그냥 집에 놔두고 왔지.

“천만 달러면 백억 아니에요?”

붉은빛의 원피스를 입은 강시아는 TV에서 보던 도도한 화장까지 하여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를 자랑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폴룩스가 자꾸 가자고, 정력을 드디어 쓰자고 시스템 창을 울려 댈 정도.

소음 공해라 꺼 버렸지만.

눈이 즐겁네.

“신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헌터. 희귀한 특이 클래스 헌터. 세계 최고가 될 게 확실시되는 헌터를 귀화시키는 데 백억이면 싸죠.”

그녀는 익숙한 손짓으로 스테이크를 썰며 입에 가져갔다.

“부서진 세계 중 하나를 복원하려면 B에서 C등급 정도의 몬스터와는 싸운다잖아요. 미국에서 김지호 씨 정보가 맞다고 확신하면 귀화 권유하러 제의가 들어올 거예요. 얼마나 안보를 중요시하는 나라인데요.”

“그런가요. 그다지 실감은 안 나는데.”

나는 세팅된 와인을 마시며 대꾸했다.

“아마 에슈타르 행성을 선택하셨으면 벌써 거기서부터 지겨울 정도로 제의가 들어왔을 거예요. 거긴 가지각색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활동하거든요.”

“아. 에슈타르 행성. 거기는 어떤 느낌이죠?”

“평화로운 판타지 세계 같아요. 중세 시대 풍이긴 하지만 마법이 발달해서 생활이 불편하지도 않고. 도시도 발달해 있고.”

에슈타르 행성의 마법 도시 에룬달이 D급 헌터들이 시작하는 장소인데, 여기서 신의 전사라고 불리며 신전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게 신전에 베이스를 마련하고 도시 밖에 생겨나는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에슈타르 행성의 기본 행동 방침이었다.

“이게 근데 난이도가 쉽다고는 해도 사람 수에 비해 적정 난이도의 던전은 적은 편이에요. 어떤 데는 너무 어렵고, 어떤 데는 너무 쉽고. 그래서 던전 색에 따라 경쟁이 치열한 편이에요. 사람들이 길드를 이뤄서 무리 지어 다니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그리고 또 특징이라면, 현실에서 36일이 지나면 세계가 초기화된다는 점이죠.”

“네? 36일이면 그쪽 세계로 일 년?”

“네. 그때가 되면 혼돈의 군주가 대마법을 발동해서 모두 죽는대요. C급은 되어야 즉사 마법에 안 죽는다고 하네요. 그렇게 멸망하면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처음부터 시작.”

36일마다 초기화되는 세계라.

별로 난이도가 쉬워 보이진 않는데…….

결국, 깨려면 C급은 돼야 하겠네.

“별로 쉬워 보이진 않는데요.”

“케브리안은 어때요?”

내가 케브리안에서 겪은 전투를 대강 이야기해 주니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공성전에 군단을 상대하다니…… 난이도는 어렵지만 레벨은 빨리 올릴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죠. 벌써 34렙이니.”

“네?! 34요!?”

난 아까 협회 관계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 찍었던 내 상태창 사진을 보여 주었다.

능력치는 손가락으로 살포시 가리고 레벨 부분만 보여 준 사진.

그녀는 말문을 잃은 채 레벨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핸드폰을 들었다.

“기사님. 펜과 아까 부탁했던 것 좀 가져와 주세요.”

뭐지?

곧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운전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강시아에게 흰색 봉투와 펜을 건네주고 다시 나갔다.

그녀는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몇몇 부분에 줄을 쫙쫙 그었다.

“아까 잘난 듯이 미국은 천만 달러 이런 이야기 했는데, 정작 제가 김지호 씨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아요.”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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