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1화>
20. 부서진 세계(3)
화염 전차 소환.
아폴론에게서 얻은 A급 스킬.
마력의 소모가 상당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탈 게 아니다.
스킬을 사용하려고 하자 그 동작 원리와 어떻게 시전해야 하는지가 본능적으로 파악되었다.
사다리가 하나둘씩 내리꽂히는 성벽의 앞 공간을 보았다.
저기에 소환한다.
화르르르.
허공에서 일렁이는 불길은 곧 한데 모여 형상을 이룬다.
화염마 한 필과 그 뒤에 연결된 불의 전차.
라이아나가 소환한 것에 비하면 말도 한 마리에 몇 배나 작고 볼품없었지만, 그럼에도 존재만으로도 근처의 사다리를 단숨에 태워 버렸다.
하나 두 개 태운 거로는 부족하다.
움직인다.
현재의 마나 상태로 보아 왼쪽. 오른쪽 중 한 방향만 가능하다.
전장을 바라보니 사다리는 왼쪽이 더 많은 거 같군.
달려라. 화염 전차. 성벽과 연결된 사다리를 모조리 태워라.
일직선으로 쭉 달려!
“히히히힝!”
화염마가 앞다리를 크게 들더니 허공을 질주한다.
자동차보다도 빠르게 달리며, 뛰어가는 허공의 길이 모두 불에 타오른다.
거리가 멀어지며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심장이 조금씩 아프지만 참는다.
조금이라도 더 달려야 한다.
“으아아악!”
“불이다!”
“사다리에서 벗어나!”
불의 궤적은 성벽을 보호하듯이 길게 타올랐다.
성벽과 연결된 사다리는 모두 불타오르고.
사다리 위에 있는 오크들의 몸도 모조리 불에 휩싸인다.
하나 불은 성벽 위에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오로지 사다리와 오크를 삼키는 태양신의 전차.
장하다. 장해. 이런 게 A급 스킬이지!
두근.
크윽…… 마나가 다 떨어졌나. 가슴이 아프다.
왼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데…….
“저기 질서의 사도다!”
“죽여! 지금 죽여야 한다!”
오른쪽은 남았었지.
성벽 위의 질서 진영 병사들을 쓸어 버리면서 우르크들이 몰려온다.
“사도님을 지켜라!”
“모여라. 어서!”
우리 편 부대들도 모이려 하지만 패색이 워낙 짙었던 탓일까.
병사들이 그다지 모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병사가 별로 없다.
다 죽어 버렸으니까.
나는 등의 칼집에서 양손 검을 꺼내 쥐었다.
검은 검신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며 일렁였다.
어…… 이거 설마 신성력인가?
아테나, 사랑해요.
휭.
우르크 부대 앞 열이 달려오며 일제히 손도끼를 던졌다.
예전 승급전 때 날 고생시켰던 그 손도끼군.
한데 지금은 느려 보였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이.
“전신의 가호.”
전신 아레스에게서 받은 스킬.
모든 원거리 무기가 빗나가고.
힘과 체력이 오르며 피부가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도끼의 궤적이 묘하게 비틀린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강화되는 몸.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니 모든 움직임이 더 느려 보인다.
이젠 확신이 든다.
지금의 나는 사냥감이 아니라 포식자다.
우르크 부대에게 달려든다.
도끼는 모두 내 몸을 피하듯 옆으로 스치고 우르크는 나에게 철 몽둥이를 내리찍으려 한다.
하나, 느리다.
슬로우 비디오 속에서 나만 정상 속도, 아니 초인의 속도다.
촤아아악!
“으아아악!”
일 합의 가로 베기에 우르크의 몸이 단번에 썰리고.
옆 우르크의 가슴을 찌르며 그대로 검을 내리찍는다.
갈라진 배. 쏟아지는 내장.
붉은 피가 성벽을 적신다.
“죽어!”
위험 감지도 발동하지 않는 느릿한 공격.
모두 간단히 피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굳이 피할 필요가 있나?
겨우 사냥감에게.
검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쇠몽둥이를 받는다.
헤파이스토스의 갑주.
전신의 가호로 단단해진 피부라 그럴까.
아프지가 않다.
“이게…… 무슨 힘……!”
그대로 몽둥이를 빼앗고 뛰어올라 우르크의 목을 날렸다.
날아가는 목과 함께 터져 나가는 핏물.
하나 나의 도약은 끝나지 않았다.
“으으, 강한 사도다!”
“조심해라. 진형을 유지해!”
우르크의 거대한 쇠몽둥이.
이 정도면 투척 무기로 쓸 만하지.
도약이 멈추고 몸이 서서히 떨어지려던 찰나에 눈에 사다리가 들어왔다.
그래. 저걸 부수자.
쾅!
“사다리. 사다리를 노린다!”
“빨리 죽여!”
우르크가 나름 밀집 대형을 펼친 채 다가온다.
커다란 덩치의 우르크 넷이 전열을 유지하자 성벽이 꽉 막힌 느낌이다.
내가 왜 사다리를 부수는지 아직 모르는군.
니들 도망가지 말라고 하는 건데.
너희가 전열을 유지해 봤자 양 떼지.
촤아아악!
베기 한 번에 우르크의 몸이 찢기며 두 동강 난다.
“이…… 이럴 수가.”
쾅! 쾅!
왼손에 주워 든 몽둥이로 다리를 분지르고, 주저앉은 우르크의 머리통을 깨부순다.
팍!
“어떻게든 죽여!”
“아냐. 후…… 후퇴해야 해!”
펑!
너무 세게 내리찍어서 쇠몽둥이가 부서지면, 그냥 성벽 밖을 향해 발로 차 버린다.
“도망가!”
헤파이스토스의 갑옷을 입은 전신은 이미 적의 피가 계속 흐르고 있고, 사방이 우르크의 피와 시체로 가득하다.
죽이고 죽인다.
전신의 가호가 끝나기 전까지.
“전쟁신의 사도다! 후퇴해야……!”
콰직!
몽둥이를 던져 시끄럽게 떠드는 우르크의 머리를 깨부수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우르크들이 이제는 스스로 몸을 던져 성벽 밑으로 떨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없이 죽이고 죽이며 나아갔다.
도망치는 녀석들을 아쉬워하며 베어 넘겼다.
그러던 때.
[전신의 가호가 해제되었습니다.]
몸에 힘이 스르르 빠졌다.
갑자기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 잠깐 사이에 내가 죽인 우르크가 기백이 넘으니.
한 동작에 하나 이상을 죽이려 했기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힘을 쏟았다.
이제는 이들의 공격이 아까처럼 느려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못 죽일 건 아니었지만 아까처럼 혼자 무쌍을 찍을 순 없겠어.
이제 한 호흡 고를까. 마력도 찼을 텐데…….
[무한 정력의 효과로 체력이 회복됩니다.]
갑자기 온몸에 활력이 돈다.
마치 처음 전장에 섰을 때와 같은 만전의 느낌.
전신의 가호로 인해 무리하게 움직였던 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회복이 되며 시야도 다시 밝아졌다.
쓸 만한데?
전투에 피가 쏠렸던 머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흠. 생각을 정리해 보자.
이 정도로 적을 쓰러뜨렸으면 영혼 약탈로 상당한 SP를 모았겠어. 이걸 다시 스탯에 투자하면 전신의 가호를 받았을 때처럼 강해지지 않을까?
중립 진영의 SP를 보니 무려 511에 달했고, 신체 능력은 C++로 +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오우거보다는 약한 녀석들이겠지만 가까이서 죽여서 SP 흡수가 많았나 보다.
잠시 우르크를 바라보다가 물러섰다.
녀석들은 갑자기 내가 가만히 있으니 내 눈치를 보며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이때 빨리 스탯 찍자.
일단 오늘은 신체 강화부터 간다.
C++++까지 가니 SP가 30이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능력을 강화해도 등급이 오르지 않았다. C++++에서 포인트는 소모되는데 등급은 그대로였다. 거기에 소모되는 SP는 40으로 늘었다.
등급 제한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도 올릴 수는 있으니 계속 눌러 보았다.
그러자 40 소모가 4번 된 이후엔 올릴 수도 없게 멈추었다.
[현재 등급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라는 메시지 창과 함께.
결국 C++에서 C++++ 맥스까지 190이 든 셈인가…….
남은 SP는 321.
일단 모든 능력치를 C++++로 만들자 SP 140이 날아갔고 남은 180은 마력에 몰빵했다.
이로서 신체, 마력은 한계에 도달하고 기예, 행운은 C++++이 된 셈.
SP도 21이 남았다.
능력치 포인트는 레벨이 24에서 26으로 올라 레벨 다운으로 인해 날린 포인트 1에 26이라 1포인트를 더 얻어서 2포인트가 있었다.
이건 일단 아끼기로 했다. SP 얻기가 생각보다 쉬워서.
[이름 - 김지호
클래스 - 영혼 약탈자
수호신 - 화산의 신 아우렐리아
칭호 - 없음
레벨 - 26
신체 ? C++++(한계), 마력 ? C++++(한계), 기예 ? C++++, 행운 - C++++SP ? 21.7]
능력치가 갑자기 엄청나게 오르니 전신의 가호를 썼을 때와 힘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과 기예가 강화되어, 그때보다 더 강한 느낌이다.
“사도의 힘이 다 떨어졌나 보다.”
“지금이다. 지금 제압해야 한다!”
“죽여! 죽여!”
내가 계속 가만히 있으니 우르크들이 다시 전의를 되찾은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질서 진영의 병사들도 움직였다.
“전신의 사도님을 지키자!”
“우르크 숫자도 이제 얼마 없어. 이길 수 있다!”
아까보다 사기를 되찾은 병사들의 음성.
하지만 굳이 내가 처치할 수 있는데 병력을 아깝게 희생시킬 순 없지. 재들은 내 몫이기도 하고.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르크의 몽둥이를 들었다.
“다들 다른 쪽을 방어해 주세요. 이놈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사도님! 무사하셨군요!”
“예. 다른 쪽도 위태할 텐데 그쪽 방어해 주세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바로 우르크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우르크들이 놀라며 방어를 하려 했지만, 이미 강화가 끝난 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억…….”
마지막 하나까지 단숨에 베어 넘기며 검에 흐르는 피를 털었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무한 정력 스킬로 인해 피로가 쌓이다가도 금방 풀리고 전신이 활력 충만한 상태로 유지가 된다.
이런 쓸모가 있는 줄은 몰랐네. 진작 쓸 걸…….
[폴룩스가 드디어 알았냐며 우쭐해 합니다.]
이번에는 인정해 드립니다.
그러며 성벽 아래를 보니 아직 오크 군단은 건재한 채 있었다.
뛰어들까?
무한 정력도 있고 우르크도 이렇게 약한데 오크 따위는 더 쉬울 것 같은데…….
“여신의 사도님! 동쪽 성문에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곧 뚫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인간 전령이 이쪽으로 달려와 긴박하게 외쳤다.
흠. 그래 일단 성벽부터 잘 방어하자.
군단 전체와 상대하기엔 리스크가 있지…….
그래도 가면서 마나가 찰 테니.
“삐약아. 투석기 좀 더 부수고 가자.”
“삐약!”
활을 다시 소환해서 투석기 10개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마나양이 늘어서 불사조도 강화된 건가.
이 정도 하고 나니 근처에 투석기가 보이질 않았다.
이 성벽은 안전하겠다 싶어서 이제 동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전령이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 달린다.
한 발, 한 발에 바닥이 패이고 몸이 쭉쭉 나아간다.
바람처럼 나아가니 어느덧 동쪽의 성벽.
성벽 위는 오크 무리와 우리 진영의 숫자가 비슷할 정도였다.
성벽 아래에서 그대로 점프를 한다.
성벽을 뛰어넘고 그 위까지 오르는 몸.
순식간에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양손에 만든 파이어 볼은 이제 사람도 들어갈 만한 엄청난 크기가 되었다.
오크 무리를 향해 착지하며 그걸 그대로 내던진다.
콰과과광!
“크아아악!”
터져 나가는 오크들.
불타오르는 사다리.
하지만 이미 성벽에 설치된 사다리가 너무 많다.
“삐약이 너 영체화해서 사다리만 태울 수 있어?”
“삐약!”
삐약이가 사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날아갈 동안은 영체화를 해서 오크들의 공격은 모두 피하고, 사다리 앞에서는 입김을 뿜어 불을 지르고 다시 영체화를 했다.
똑똑한데?
오크들 중 마법을 쓰는 몬스터가 없어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사다리가 불타오른다!”
“사다리를 지켜라!”
“니네는 나랑 놀아야지!”
우르크보다 덩치도 작고 왜소한 오크.
투핸드 소드의 가로 베기 한 번에 순식간에 셋의 몸이 반 토막 난다.
“죽여!”
캉!
적의 공격, 피하지도 않는다.
갑주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간지럽기만 한 공격.
그대로 맞아 가면서 검을 풍차처럼 돌린다.
모조리 잘려 나가는 오크의 육신.
사다리가 모조리 불타오를 때쯤 성벽에 있는 오크들은 이미 와해된 후였다.
나는 지치지도 않은 채 기계처럼 학살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사도님! 서쪽 성벽이……!”
아오! 바쁘다. 바빠.
무한 정력이 없었으면 이미 녹다운되었을 터.
온 김에 여기도 투석기를 파괴하고 다시 서쪽으로 달렸다.
달려서 오크들을 학살하니 이젠 아까 지켜 줬던 남문에서 SOS 콜.
아니 무슨 두더지 게임도 아니고 하나 정리하면 하나가 또 위기야.
해질 녘까지 나의 뺑뺑이는 계속되었다.
남에서 동. 동에서 서.
아주 고정적인 위기 패턴이었다.
북쪽은 침공 루트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구먼…….
다행히 성벽을 오르는 몬스터들 중 강력한 몬스터라 해 봤자 우르크가 전부.
이제 투핸드 소드도 그냥 한 손으로 휘두르며 왼손으로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무기를 던져 가며 학살에 치중했다.
그래도 각 성벽당 3번씩 막으니 이제 재들도 사다리가 없는지 슬슬 물러나는 상황.
적들이 물러서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종족 불문 모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실 가장 지칠 사람은 난데 이 스킬 때문에 아직도 몸이 너무 쌩쌩했다.
뭔가 인간이 아닌 느낌인데…….
하나도 안 피곤한데 왠지 계속 죽이고 죽이니 질려서 스킬 OFF하고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데 편하게 잠을 잘 수는 없지.
“미네르바의 사도님. 요새 사령부에서 사도님을 정중히 모셔 오라는 전갈이 내려왔습니다.”
온몸에 피가 덕지덕지 묻은 엘프 전령이 나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존경심마저 보이는 정중한 태도.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요새 사령부라는 곳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