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19화>
18. 부서진 세계(1)
“설명에 앞서, 각서를 썼음에도 이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이 정말 없었을까요?”
헌터들은 말이 없었다.
솔직히 정보가 고픈 상류층들이 돈으로 꼬드기면 유포했을 거 같은데.
재벌가에도 그래서 얻은 정보가 많잖아.
“세간에는 D급 던전에 대한 소문, 심연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심연의 주인이 기계 문명을 멸망시킨다는 이야기 말이죠. 하나 그건 각서에 담긴 비밀 엄수 마법이 작동되어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비밀을 엄수하지 않았을 시, 기억이 왜곡되어서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거든요. 그렇게 비밀 엄수를 하지 않아 기억이 왜곡된 D급 헌터가 상당히 많습니다.”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강시아가 재벌가의 정보라면서 가르쳐 준 게 알고 보니 왜곡된 정보였다니.
“기억이 왜곡된 D급 헌터는 이 공간에 들어오면 다시 기억이 돌아오지만, 여기서 나가면 다시 기억이 왜곡됩니다.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마세요. 이렇게 말해도 꼭 말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기계 문명을 파괴하는 심연의 주인.
D급 던전에 대한 소문.
이런 건 모두 허위 정보이며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D급 헌터가 가는 곳은 바로 여기, 부서진 세계라고 합니다. 부서진 세계는 혼돈의 영역에 잠식당해 멸망을 당한 세계를 뜻합니다. 혼돈은 우주를 완전히 무(無)로 되돌리려는 세력. 현존하는 모든 지성체의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지구도 이에 포함되어 있죠.”
그녀가 손을 천장으로 뻗자 푸른 행성이 클로즈업되었다.
모양새는 딱 봐도 지구.
그 지구를 향해 붉은빛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시선이 선을 따라가니, 5개의 검은 행성이 보였다.
“지금 보이는 행성이 바로 지구입니다. 1981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지성체가 살아 숨 쉬는 곳. 이 지구와 붉은 선으로 연결된 행성이 보이시나요?”
D급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 행성은 모두 질서 영역, 중립 영역의 생명체가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지역이었습니다. 하나 혼돈의 창궐로 행성은 파괴되었고 삶의 터전은 사라졌죠. 그리고 이 부서진 세계에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몬스터가 나오며, 저희의 영역을 침범하게 됩니다.”
그녀의 설명은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앞의 다섯 행성은 지구에게 있어선 성벽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기가 뚫리지 않았으면 작금의 던전이나 몬스터 사태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이쪽이 뚫리면서 몬스터가 끊임없이 침공하는 거라 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보았던 던전은 모두 수준이 낮았을 겁니다. 그건 저희가 난이도 높은 던전을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모두 클리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 이제 그것도 끝이 납니다. 저희 질서의 사도는 도우미로서 이 세계를 이 년간 수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년의 반이 넘게 지났습니다.”
“이 년 지나고도 더 있을 수는 없나요?”
“저희에게 허용된 시간은 이 년까지입니다. 만약 더 머무른다면, 혼돈에서 더 큰 재앙을 가져올 것입니다.”
질서 영역의 수호자들이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혼돈 영역의 침범자들도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것이 세계의 균형.
둘 사이에서 피 터지는 건 지구의 생명체뿐이다.
그래서 엘프와 드워프들이 2년만 머무르고 철수하는 거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질서와 혼돈이 본격적으로 맞붙게 된다면 그 전투의 여파만으로도 이 지구는 멸망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저희가 철수하게 된다면 지구가 겪을 몬스터 사태는 최대 B에서 C등급 정도일 것입니다. 과학 기술 문명이 발달한 이 세계라면 혼돈의 침공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부서진 세계가 하나라도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손가락을 다섯 행성을 향해 뻗었다.
“각 행성에는 세계를 부순 혼돈의 군주들이 있습니다. 내년까지 이들 중 하나라도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지 못한다면…… 혼돈의 군주 다섯이 모두 지구를 침공할 테고, 다섯 세계의 괴수들이 차원 문을 통해 범람할 것입니다. 지구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섯 세계의 침공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라도 제압한다면 혼돈의 군주의 강림 조건이 안 되어 몬스터만 침공해 올 것입니다.”
어. 저기…… 그럼 1년 후 지구 멸망인가요?
그래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한 건가.
1년 후 세계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혼란이 극에 달할 테니.
그래서 비밀 엄수 마법을 쓰는 건가…….
“저희는 D급에 불과한데 가서 혼돈의 군주를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긴 한가요? 세계를 부순 자인데.”
“지금 바로 쓰러뜨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서진 세계는 사실 완벽하게 부서진 것이 아닙니다. 대신 제우스의 개입으로 부서지기 전의 시간대로 멈춰 있습니다.”
부서진 세계는 아직 완전히 끝장난 게 아니다.
부서지기 직전 제우스의 개입으로 시간을 멈추고 되돌린 채 정지해 둔 상태.
영화 엔딩을 보기 전에 앞부분을 다시 보려고 되돌리고 정지 버튼 누른 상태라고 보면 되었다.
“여러분은 이 다섯 행성 중 D급에 걸맞은 전장으로 가게 될 겁니다. 수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D급에 오르신 여러분이라면 잘 적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차근차근 강해지면 언젠가는 혼돈의 군주에 도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들도 대신의 견제로 인해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든요.”
“근데, 도우미 분들이 클리어하는 지구의 D급 던전을 저희가 돌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되지요. 하지만 이제 던전에서 죽으면 끝입니다. 죽습니다. 부서진 세계에서는 죽어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보상도 던전과 비교가 되지 않고요. 그래서 저희는 웬만하면 이쪽을 추천 드립니다.”
질문한 헌터는 죽는단 이야기에 금방 수긍했다.
지금까진 던전에서 죽어도 살아 돌아왔지만, 이제는 죽는다는 이야기에 다들 긴장한 기색이었다.
“여러분은 부서진 세계에서 신의 임시 사도가 되며, 세 번의 부활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각 세계의 난이도에 따라 신의 가호는 달라질지언정 부활의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무한정 사는 건 아니구나.
3번의 기회라…….
“D급 각성자 분들이 들어갈 만한 행성의 전장은 모두 다섯 곳. 저희가 자체적으로 난이도를 나누었습니다. 왼쪽부터 에슈타르, 칼바인, 듀브론, 알아스마, 케브리안 행성입니다.”
나는 어제 본 공략집의 지명을 떠올렸다.
공략집에서는 분명히 케브리안 행성을 지목했다.
이곳을 자신이 완벽하게 공략했다고.
무조건 이리로 가라고 했다.
무조건.
“제가 말한 순서는 난이도에 따른 것입니다. 에슈타르가 가장 쉽고, 케브리안이 가장 어렵습니다. 전 솔직히 모든 각성자 분들께 에슈타르의 전장에 진입하라고 권합니다. 케브리안은…… 보상은 막대하나 갓 D급이 된 각성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전장이 아닙니다.”
근데……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가장 높은 난이도인 것 같다.
아. 믿어도 되는 거겠지?
지금까지 그래도 대부분 적중했던 공략집이다.
거기에 지금까지는 튜토리얼에 불과했고, 이제부터가 진짜 자신의 노하우를 다 풀겠다고 공언했던 바로 그 전장이었다.
믿어도 되는 거겠지?
지호야. 응?
넌, 나잖아.
맞아. 그리고 높은 난이도일수록 보상도 큰 법이지.
원래 던전도 이지 난이도는 보상이 낮아서 안 깨잖아. 게이머들은 어떻게든 높은 난이도를 깨려고 하지. 안 그래?
“케브리안 D급 전장의 최종 적은 데스 나이트 킹 암펠리안. 자신의 등급을 임의로 조종하면서 적을 농락하는 최악의 적입니다. 그의 ‘최종 폭주’ 스킬로 인해 죽은 각성자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모든 각성자들에게 말합니다. 다른 전장은 괜찮으나 케브리안만큼은 선택하지 않기를. 아니, 암펠리안이 있는 전장만큼은 선택하지 않기를.”
“그런데 왜 이런 전장을 고르신 거죠?”
엘프 알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케브리안 행성을 바라보았다.
“케브리안에서는 이 전장이 그나마 제일 쉽기 때문이지요…… 암펠리안은 혼돈의 군주 사령대제(死靈大帝)의 멸망의 네 기사 중 가장 약하거든요. 여기는 그냥 안 고르시는 게 낫습니다.”
아! 왜 이렇게 겁주는 거냐.
사람 고민 때리게 만드네.
“모두들 제 말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D급입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난이도에 진입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지구의 운명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하나의 행성만 구하면 됩니다. 제 고향은 케브리안이지만…… 여기는 택하시면 안 됩니다.”
아…… 케브리안이 분명했는데.
이 엘프는 왜 이렇게 케브리안만큼은 선택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거냐.
케브리안을 클리어하면 고향 행성이 살아나는 거 아닌가?
근데 가지 말라고 단언을 하네.
음…….
아니야. 나는 나를 믿어.
공략집을 믿는다.
“케브리안만은 제외하고 고르시기를 권장합니다. 데스나이트 킹 암펠리안이 있는 이상, 이곳은 도전해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
여자 엘프 알레나는 다시 한번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행성을 선택하라고 했다.
다들 에슈타르를 지목했다.
D급, 그것도 가장 밑바닥의 D급인데 가장 쉬운 난이도를 택하는 건 아주 상식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나도 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공략집만 아니었으면 사실 에슈타르에 모두가 몰빵해서 이 세계를 구하는 게 합리적이긴 하지…….
하지만!
난 케브리안으로 간다.
완벽 공략된 공략집과 함께 보상 받으러 간다.
“김지호 님. 케브리안을 가신다고요?”
“네.”
“저희 모두 영혼 중개자님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케브리안이라니요…… 차라리 에슈타르 말고 그다음 행성, 칼바인이나 듀브론 정도에 도전하시는 건 어떠세요? 이곳만 해도 엄청난 보상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전 케브리안을 택하겠습니다.”
“하아…….”
엘프 알레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케브리안은…… 이미 끝난 전장입니다. 여기를 되돌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하고 싶으신가요?”
“예.”
“한번 행성을 선택하면 부서진 세계를 클리어하거나, 세 번 죽기 전까지는 행성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세 번 죽는다고 실제 지구의 육신이 죽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타격이 오게 됩니다. 레벨이 죽을 때마다 다운되며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열 배 증가합니다. 그런데도 정말 케브리안 행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 선택하겠습니다.”
고 하자.
스페셜 클래스도 공략집 덕에 얻었잖아.
상태창 2개도 그렇고.
불가능한 난이도를 깨면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겠지!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근데 스페셜 클래스라니…… 뭐냐, 그건.”
“머리에 병아리는 뭐야? 미친 거야? 근데 너무 귀엽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긴 한데…….”
D급 헌터들은 날 보고 속닥거렸고.
“케브리안이라니…….”
“이곳을 선택하는 각성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신들이 주시하는 분인데 뭔가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고향 행성이긴 하지만 저긴 불가능한데. 애초에 저 행성엔 왜 갈 수 있게 한 거야? 그냥 에슈타르만 열면 될 텐데.”
“그걸 저희가 여나요. 신들이 하시는 거니 무슨 뜻이 있으시겠죠…….”
엘프와 드워프도 동요하며 서로 말이 끊이지 않았다.
엘프 알레나는 계속 날 말렸다.
진짜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10분, 10분이 지나도록 계속 설득했다.
“다시 생각해 보시죠.”
“가겠습니다.”
“김지호 헌터님.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알아요.”
“제발 다시 생각해 보시죠.”
“간다니깐요.”
내가 계속 가겠다고 하자 소리를 빽 지르기도 했다.
“아! 정말! 죽어요. 죽는다고요! 가면 오크랑도 싸워야 해요. 오크들은 포로의 사지를 부수고 데굴데굴 굴리다가 괴롭힐 만큼 괴롭히고 죽여요. 영혼 중개자님이 아무리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할 거예요. 트라우마 생겨요. 제발. 신들의 가호와 관심을 받고 계신 분인데 여기 선택하시면 안 돼요.”
오크? 오크랑 싸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혼돈 영역이랑 싸우는데.
“그래도 가겠습니다.”
“아…… 그러면 안 돼요. 제발…….”
“아, 그냥 보내 주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 결심 확고합니다.”
“하아아아아. 이젠 저도 모르겠네요. 여러분. 저 충분히 말렸죠?”
엘프 알레나는 주변 엘프와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케브리안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으득…….”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케브리안 행성 쪽으로 걸어가니 뒤에서 드워프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 얼마 만에 돌아올까?”
“시간 비율 십 대 일이고. 귀환은 그 세계에서 열흘 있어야 가능하고. 그럼 내일 돌아오지 않겠어?”
“넌 그 케브리안에서 열흘이나 살 수 있을 거 같아?”
“아. 그렇군. 하루는 버티겠지. 2.4시간에 일억 베팅 간다.”
“난 한 시간 뒤에 온다에 일억 베팅.”
“그래도 스페셜 클래스인데 난 다섯 시간에 일억.”
이 새키들이…….
왠지 오기가 생긴다.
형이 완전 정복하고 온다.
공략집에서 완전 공략되어 있다고. 이제야말로 공략집의 진가가 나올 거라고 꼭 케브리안으로 가라고 했지.
자세한 내용은 가야 나오나 보지만 어쨌든 그거 보고 내가 가서 평정한다.
나중에 니네 고향 행성 회복시켜 준 구세주라고 찬양할 준비나 해라. 땅꼬마들아.
나는 그렇게 호기롭게 떠났고.
[사망하셨습니다.]
[레벨이 1 낮아집니다.]
[레벨이 1 낮아집니다.]
[스테이터스 포인트가 깎입니다. 마력이 1 낮아집니다.]
[스테이터스 포인트가 깎입니다. 마력 등급이 C-로 낮아집니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 부활합니다.]
바로 돌아왔다.
“와. 벌써 죽었나 봐.”
“최단 시간 갱신이네…….”
“어떻게 하면 바로 돌아오지? 가자마자 죽은 건데?”
“역시 케브리안은 미쳤어.”
“내기는 모두 실패다. 정말 대단한 각성자구먼.”
……뭐지?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