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9화>
8. E급 던전에서 만난 사람들(2)
다음 날 협회에서 사람을 붙여 줬다.
“13기가 벌써 E급이라니. 경험치 두 배를 발견했다며? 그래도 레벨이 낮을 테니 발목만 잡지 마라.”
40대 대머리 아저씨가 도끼를 들고 잔뜩 폼을 잡으며 나와 던전에 들어섰다. 이번엔 철저히 마법사를 연기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마법만 줄곧 썼다.
그렇게 마법만 써도 이번엔 보스 몬스터도 없어서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런 덕일까.
[마력 능력치가 F+에서 E-로 올랐습니다.]
던전 클리어할 때쯤 마력이 올랐다.
그리고 쉽게 깨자 아저씨의 대우가 달라졌다.
“자네. 마법사로서 능력이 대단한데. 우리 길드 들어올 생각은 없나? 여기는 간섭은 별로 없고 기본급은 잘 줘.”
협회 소속 아니냐니까 그냥 제휴로 온 거라 했다.
길드라.
길드 가입 시에는 상태창을 길드 마스터에게 공개하는 게 거의 의무화되어 있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가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좋게좋게 거절했다.
“제 친구가 길드 소속인데 아마 그쪽으로 갈 거 같아요.”
“그래? 아쉽네…… 혹시 무산되면 우리 대우 길드도 생각해 봐.”
두 번이나 E급 던전을 수월하게 클리어하자 나름 소문이 났나.
협회에서 사람 매칭하는 게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하다가 이젠 턱턱 붙여 줬다.
전사 계열이 많았고, 다들 마법사로 활동하는 나에게 자기 길드에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일단은 다 좋게좋게 거절했다.
길드는 D급이 되면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간 각기 다른 헌터들과 파티 플레이를 했다.
진성이와 던전을 갔을 때 빼곤 보스 몬스터가 나오지 않아 다 쉽게 쉽게 깼다.
그렇게 7일이 지나자 이제 협회의 보조가 끝났다.
E급 헌터를 이제 내가 찾아서 파티 플레이하자고 매칭해야 했다.
파티는 생각보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구하는 방법은 헌터 사무국에서 깔아 준 헌터넷 앱으로 파티 구한다는 글을 올리면 연락이 오는 시스템이었다.
근데 이미 E급쯤 되면 많은 헌터가 길드에 가입한 상태.
다들 자체적으로 팀을 짜서 던전에 가지 이렇게 앱 게시판에서 파티원을 구하진 않았다.
앱으로 파티원이 메이드되는 것도 보면 서로의 정보를 다 까서 매칭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처럼 스테이터스 창을 공유할 생각이 1%도 없는 사람은 다들 외면을 받았다.
내가 특수 케이스라 그렇지, 원래 스테이터스 창은 다들 잘 공개하는 편.
상대방이 어느 정도 스펙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믿고 파티를 구성하지 않겠는가.
“아. 이틀째 허탕인가.”
핸드폰에 연락이 없다.
몇 번 리플이 달렸는데 정보 공개가 가능하냐는 리플이었다.
그냥 제목만 마법사라고 하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나 보다.
사실 나 노비스긴 해…….
아. 그냥 혼자 돌까.
가능할 것 같긴 한데.
혹시나 보스 몬스터를 만날까 봐 좀 꺼려지는 게 있다.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지금 만나면 이길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다. 이겨도 부상 없이는 힘들겠지.
또한 벌써부터 솔로 플레이 하면 너무 눈에 띌까 봐 좀 꺼려졌다.
지금 9.6레벨인데 그래도 12레벨까지는 파티 플레이로 올리고 그다음부터 솔로를 하고 싶은데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계속 허탕을 치면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냥 혼자 돌아야겠다.
괜히 상태창 깠다가 인체 해부 실험당하느니…….
띠링.
혼자 돌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노비스타 님. 파티원 구하셨나요?]
‘12기 검전사’라는 심플한 아이디가 뜨며 메시지가 왔다.
아주 기다렸던 반가운 메시지였다.
[아니오. 협회에서 트레이닝 중입니다.]
[레벨 11 전사입니다. 상태창은 서로 비공개 맞나요?]
[네. 제 레벨도 11입니다.]
어차피 상태창 오픈도 안 할 건데.
파티 성사가 되어야 하니까 살짝 부풀렸다.
[마법 가능하시죠?]
[가능합니다.]
[그럼 지금 출발하실 수 있나요?]
[예. 협회에 있으니 협회 오시면 연락 주세요.]
[아니, 협회에서 만나지 말고 E급 포탈이 있는 이 위치에서 보죠. 그쪽은 협회 차량 타고 오시면 될 거예요.]
뭐지? 멀리 떨어져 있나.
난 이 사람이 보낸 주소를 들고 협회 직원한테 가서 문의했다.
“앱을 통해 파티원을 모집했는데 E급 포탈에서 만나기로 하셨다고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헌터넷 어플에서 장난치는 헌터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장비를 챙기고 차를 타고 떠났다.
찍어 준 위치는 의정부 쪽.
차에서 한숨 자다 깨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으슥한 산 중턱.
도로 옆에 주황색 포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E급은 주황색이란 말야.
F는 빨간색이었는데…….
설마 빨주노초파남보 순서?
주황 포탈 근처에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흔히 보는 독일 3사가 아니라 한 급 더 위, 아니 저건…….
롤스로이스 아닌가?
팬텀 같은데.
“안녕하세요. 12기 검전사입니다. 본명은 강수진입니다.”
“노비스타 아이디를 쓰고 있습니다. 본명은 김지호입니다.”
차에서 내리자 전신 무장을 한 여성이 인사를 건넸다.
키는 170㎝ 정도 되었을까.
현대식으로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강철 갑옷.
내 롱소드보다 10배는 비싸 보이는 화려한 투핸드 소드.
강철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다.
근데.
[폴룩스가 절세 미인의 향이 난다고 흥분합니다. 당장 무한 정력 스킬을 ON 하자고 부추깁니다.]
웬만한 여자들 보고는 이런 반응 전혀 안 보이는 폴룩스가 이런 메시지를 보내니까 미인인가 싶었다.
[폴룩스가 무한 정력 스킬을 강화해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 수준이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 이 양반이 진짜 미쳤나.
엘프 봐도 반응 안 하던 양반이 대체 왜 이래.
[폴룩스가 엘프는 지겹다고 합니다.]
하. 복에 겨운 소리를.
나도 지겨워 봤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세요.
[이 시대 남자들은 형편없다고 폴룩스가 비난합니다.]
[인생에 저런 미녀를 만나는 일이 흔한 줄 아냐며 욕합니다.]
[어차피 예쁜 여자 만나려고 강해지는 거 아니냐며 당장 행동을 하라고 촉구합니다.]
아, 진짜 시끄럽네.
계속되는 비난 메시지를 치워 버리며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마법은 어디까지 가능하신가요?”
“제가 아직 돈을 못 모아서 1서클만 가능합니다.”
“E등급이니 1서클이면 충분해요. 제가 전위를 맡겠습니다.”
“네. 후방에서 지원할게요. 근접전도 못 하는 건 아니니 적 한둘 정도는 놓치셔도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지만, 전위가 그러면 실격이죠. 그런 상황 안 나오도록 제가 지켜 드릴게요.”
멋있는데. 이 여자.
솔직히 앱에서 사람 구해 봤자 얼마나 좋은 사람이 나오겠어 싶었는데.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다.
일단 장비가 와…… 수십 억은 할 거 같은데.
드워프가 제련한 강철 갑옷 세트, 이거만 해도 수십 억일 테고 저 투핸드 소드도 범상치 않다.
이거 뭐 낙승이겠구만.
시커먼 오크가 도끼를 내리찍는다.
쾅!
방패로 그 일격을 가볍게 막아 흘리고 오크의 목에 바로 검을 쑤셔 넣는다.
“크륵…….”
검붉은 피가 튀며 잠시 시야를 가린다.
손등 부위가 따가워짐을 느끼자 얼른 손을 뺐다.
작은 손도끼가 휭 지나갔다.
위험 감지가 최고다 진짜.
“하압!”
저편에서는 투핸드 소드를 휘두르는 강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움직임이 잽싸긴 한데 검 다루는 솜씨가 영 능숙해 보이지 않았다.
민첩하긴 한데 힘 스탯이 달린다고 해야 하나?
블랙 오크 셋과 싸우는데 공격은 정말 잘 피한다.
근데 투핸드 소드 자체를 무거워해서 공격이 영 느릿느릿.
오크들이 그녀의 공격을 잘만 방어하고 있었다.
“아이스 애로우.”
이번 던전 몬스터는 검은색으로 물든 블랙 오크.
엘프발 몬스터 사전에 따르면 블랙 오크는 힘이 센 대신 행동이 좀 굼뜬 편이고, 마법에 취약하다고 했다.
특히 수계 마법이 약점이라기에 이번엔 아이스 애로우를 주로 사용했다.
푹!
“크웨에엑!”
아이스 애로우 2발을 쏴서 한 놈의 가슴에 맞추었다.
녀석의 흑빛 근육이 찢겨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약점이라 그런지 더 깊숙하게 들어가며 피가 계속 터져 나오고 오크가 쓰러졌다.
남은 두 오크가 나를 노려본다.
“으으으…… 마법사 성가시다.”
“이 여자는 별것 아닌데…… 검도 못 드는 멍청이다.”
“이 녀석들이!”
강수진이 발끈하며 자길 놀린 오크에게로 검을 내리찍는다.
하지만 애초에 블랙 오크는 힘이 센 녀석들.
도끼로 투핸드 소드를 쉽게 쳐 냈다.
그렇게 한 녀석이 강수진을 상대하는 사이.
“마법사 죽어라!!”
오크 한 놈이 나한테 달려온다.
아! 전위 봐 주겠다며. 이 여자야.
몬스터를 자기가 도발해야지 지가 도발당하면 어쩌라는 건지, 무기가 아깝다.
에휴. 앱으로 만난 사이가 다 이 정도지 뭐.
“아이스 애로우!”
양손으로 아이스 애로우를 날리면서 방어 태세를 갖춘다.
마음 같아선 돌진하고 싶지만, 너무 눈에 안 띄기로 했으니까.
푹! 푹!
“크으으윽…… 마법사!”
왼쪽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스 애로우.
허벅지 쪽은 꽤 큰 지름의 구멍이 뚫렸다.
충격이 클 텐데도 근성으로 돌진해 온다.
“실드.”
“죽어라아아!!”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실드가 깨진다.
하지만 도끼 속도는 줄었기에 쉽게 회피가 가능하다.
옆으로 슬쩍 몸을 피한 후 방패를 든 손의 손가락을 내뻗는다.
“아이스 애로우.”
근접하니 맞추기도 쉽지.
오크의 목에 그대로 박히는 아이스 애로우.
움찔한 채 경련하는 오크의 목을 그대로 찌른다.
검붉은 피가 검날을 타고 흐른다.
“마법…… 사…… 강…… 하다…….”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리며 쓰러지는 오크.
시체가 사라지며 E급 마나석을 드랍했다.
재빨리 주운 후 아직도 사투를 벌이고 있는 노답 동료를 바라봤다.
“이…… 이익!”
“힘도 없는 인간. 그만 피해라.”
덤 앤 더머의 싸움인가.
강수진의 검은 오크에게 막히고.
오크의 일격은 재빠른 강수진이 다 피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는 상황.
둘 다 체력이 더 빠지면 그제야 승부가 날 거 같다.
하지만 저 노답 파이트는 그만 보고 좀 쉬고 싶었다.
“아이스 애로우.”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고개를 푹 숙이는 강수진.
결국 그녀가 상대하던 오크도 내 아이스 애로우에 죽었다.
“괜찮습니다. 전위가 버텨 줄 때 마법사가 뒤에서 죽이는 게 전형적인 패턴 아니겠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몬스터를 다 놓쳐서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그래. 알긴 아네.
솔직히 하나 정도야 어쩔 수 없다 치는데 나한테 온 오크만 셋.
여섯 오크 중에 한 오크를 마법으로 먼저 죽이자 다섯 오크가 나를 제압하려 했고, 강수진은 이를 막아야 할 입장이었다.
근데 다섯 중에 셋이 나한테 왔으니 솔직히 전위 실격이지.
하나 더 올 뻔한 거도 내가 마법으로 죽인 거고.
라고 한소리 쏘아 볼까 했지만 그녀의 장비가 눈에 보이고 롤스로이스 팬텀이 떠올랐다.
수십 억짜리 장비를 지니고 있고 세단의 정점을 타고 다니는 여자.
분명 운전기사도 있었던 것 같아.
“어쩔 수 없죠. 경험 많은 전사라도 몬스터 놓치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전.”
어차피 한마디 쏘아붙인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고.
다음부터 파티 같이 안 하면 되지 뭐. 흠흠.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쉬고 다음 방에 가죠. 이제 마지막일 것 같은데, 저도 마나가 다 떨어져서요.”
“네. 그렇게 하죠. 다시 한번 죄송하고 감사드려요.”
그렇게 대화를 일단락한 후 자리에 주저앉아 쉬었다.
몸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 나는 마법사다, 나는 마법사다 하면서 주의하는 게 은근 피곤했다.
마력도 좀 채우고.
일단 얘가 0.5인분이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지.
“후우우…….”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강수진이 어느덧 투구를 벗고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와. 진짜 이쁘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 반짝반짝한 밝은 눈.
CD에 얼굴이 가려질 작은 머리에 커다란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다.
아주 선한 인상의 미녀로 눈매는 동글동글하다.
저 정도면 미녀 배우급? 개중에서도 아주 예쁜 편 아닐까?
화장기는 없어 보이는데 피부가 그냥 순백이다.
[폴룩스가 이것 보라고 합니다.]
[폴룩스가 지금이 기회라고 합니다. 아까 싸우는 것 보지 않았냐고 합니다. 사용자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폴룩스가 무한 정력 스킬을 2레벨 강화해 준다고 제안합니다. 큰맘 먹고 도와주는 거라고 빨리 스킬을 ON하라고 명령합니다.]
아, 이 아저씨 진짜.
여기서 그 스킬까지 키면 진짜 위험해, 이 양반아.
그 평범 이하의 협회 직원한테도 불끈했는데 여기서 장착하면 진짜 사달 난다.
“앗…… 내 정신 좀 봐.”
내가 계속 강수진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얼굴을 매만진다.
그러곤 투구를 벗은 걸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란다.
“저…… 보셨어요?”
“얼굴요? 지금도 보고 있는데요.”
“읏, 저 여기서 봤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네? 누구한테 비밀로 해요?”
“어…… 저 모르세요?”
당황하는 강수진.
그 모습을 본 내가 더 당황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네. 오늘 처음 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