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4화>
3. F급 던전(1)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배를 만졌다.
복근이 있다. 휴. 꿈이 아니네.
인벤토리를 열어 책을 꺼내 보았다.
[과거의 나에게. 각성해서 기쁘겠지만 이제 내가 갈 길은 가시밭길이다. 능력치 배분을 동일하게 하는 건 초반에 그냥 일반인으로 살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몬스터 잡기 엄청 힘들다. 그래서 경험치 두 배 버프가 필요한 거다. 능력이 떨어지니 두 배 버프로 다른 사람과 속도를 맞춰야 해.]
아! 그러니까 초반엔 힘든 거군.
대기만성형으로 성장하라는 건가?
[레벨 5때 E급 각성자로 등급이 상승하며 클래스 전직 기회가 생기지만 이때 초보자로 계속 진행해야 한다. 25렙까지 키우는 게 힘들겠지만 D급 때 전직을 해야 해. 능력치 균등으로. 미세한 차이는 용인되지만 큰 차이는 내면 안 된다.]
25렙까지 직업도 정하지 않고 올리라고…….
능력치 창이 하나였으면 너무 힘들었겠지만 능력치 창 2개의 시너지가 만족스러운 수준이었기에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넣고 검은 막대기와 구슬을 살펴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D급 각성자부터 꺼낼 수 있다고 거부당했다.
D급…….
현재 인류 최고 등급 각성자.
한동안 인벤토리의 애물단지 신세군.
일단 등록부터 하러 가자.
역삼역의 헌터 사무국 빌딩.
테헤란로의 고층 빌딩들 중에서도 가장 높게 솟아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빌딩이다.
그 입구는 벌써 인산인해.
비행기 입국 심사대에서 신체 검사하는 기계 같은 게 10대 있고 안내 요원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거기 들어섰다가 나왔다.
대부분이 문제없었지만, 몇몇은 들어갔다가 쫓겨나왔는데, 아마 각성자라고 뻥치고 들어간 것 같았다.
한 20분 정도 줄을 섰을까.
“신분증 보여 주십시오.”
남자 안내 요원의 말에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자 들고 있는 태블릿 피시로 찍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신분증 돌려받고 들어가니 초록 불이 들어왔다.
“각성자 확인되었습니다.”
“각성 축하드립니다. 안으로 오십시오.”
안내 요원의 안내를 받아 입구에 들어선 후.
각종 서류에 사인하고 책자 받고 교육 받으러 가고…….
정신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여러분. 각성자가 되셔서 지금 그 누구보다도 기쁘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으면 합니다. F급 헌터는 육 개월 동안 E급으로 승급하지 못하면 각성자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자격 박탈당하는 각성자의 비율은 오십 프로가 넘습니다. 전투가 모두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지요…….”
협회장 신하진이 1시간이 넘게 강의했지만 나는 이 말만 기억에 남았다.
F급도 50프로가 넘게 낙오된다…….
튜토리얼, 그 약해 빠진 임프를 통과하지 못한 이들도 반수는 된다고 한다.
각성자가 모두 신체 건장한 남자만 되는 것도 아니고, 벌레 한 마리 못 죽여 본 여자나 몸을 움직이기 힘든 노인도 랜덤으로 걸려서 그렇긴 하다지만…….
확실히 만만한 길은 아니야.
빨리 성장 버프 끝나기 전에 던전을 돌아야겠어.
“F급 던전 입장하실 분, 이쪽으로 오세요!”
강의 끝나고 강의실에서 나오자 협회 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직 줄이 그리 길진 않아, 내가 빨리 달려가니 한 40등쯤 되었다.
내 뒤에도 줄이 길게 늘어설 때쯤, 직원이 소리쳤다.
“칠십 명. 오늘은 여기서 끊겠습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실게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우리는 거기서 또 10명씩 쪼개서 나뉘었다.
주로 이삼십 대의 건장한 남자들이 많았지만, 간혹 젊은 여자나 중년의 남자, 여자도 보였다.
내가 속한 4팀은 남자 여덟에 여자 둘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마련된 4번 버스를 타고 도심을 달렸다.
사람들이 각기 다 따로 앉아 있어서일까.
버스는 조용하기만 했다.
하긴, 딱히 친목을 나눌 필요도 없는 게…… F급 던전은 1인용이니.
“저기요.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앞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에 잠길 즈음, 옆 옆 칸의 1인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흰 티에 청바지. 검은 머리에 이쁘장한 얼굴.
패션은 대학생 같았지만, 대학생보다는 사회인같이 약간 더 성숙한 느낌의 여자였다.
얼굴도 몸매도.
“그러시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바로 내 옆에 앉았다.
뭐 때문에 온 거지?
“근데 무슨 용건이시죠?”
“이렇게 한 팀이 되었는데 버스 분위기가 너무 조용해서요. 심심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던전이 일인용이라 그렇겠죠. 사실 팀이라고 해도 그냥 던전 포탈 있는 곳에 선착순으로 내려 줄 테니, 그냥 마을버스 같이 탄 사람들이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헤. 마을버스. 그럴듯해요. 전 근데 또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아까 협회장이 얼마나 각성자들 겁줬어요? 전투에 익숙해져야 한다, 반이 넘게 탈락한다. 그런 말 듣고 나면 오늘 하루는 던전 도전할 마음이 싹 사라질 것 같거든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근데도 던전 가겠다고 선착순 중간을 끊은 사람들이잖아요. 알고 지내면 좋지 않을까요?”
“마음가짐이 된 사람들이다 이겁니까?”
“강의 듣고 나올 때 협회 직원 쳐다도 보지 않고 문으로 황급히 나가는 사람들보단 낫죠. 이런 것도 다 인맥 아니겠어요?”
흠. 그럴듯하네.
그래도 도전 의지는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네요. 그럼 서로 자기소개하는 건가요?”
“좋죠. 제 이름은 이지현이에요. 스물다섯.”
“동갑이네요. 전 김지호입니다.”
“어머. 만나도 딱 동갑을 만났네요. 말 놓을까?”
여자애가 왜 이렇게 적극적이냐.
뭐, 미녀의 적극성은 나도 환영이기에 동의했다.
“그래. 말 놔.”
“응. 지호야.”
그리고 어디 사냐는 가벼운 신변 잡담부터 시작해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지현이가 갑자기 물었다.
“근데 지호 넌 오버롤이 어떻게 돼?”
“오버롤? 능력치 총합 말하는 거야?”
“응. 궁금해서. 난 24거든. 추가 능력치 포함해서.”
와! 애 능력치 좋은데?
난 5-5-5에서 하나 추가 받아서 16인데, 24라니.
능력치 총합이 레벨 8 차이잖아.
“난 16인데?”
“헐. 튜토리얼 때 받은 거 빼면…… 너 555클럽이었구나…… 진짜 그런 게 있구나.”
“음…… 동정하지 마라. 슬프니깐.”
기분 탓일까.
555클럽이라고 말하는 지현의 기색이 뭔가 김이 팍 샌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래서 이렇게 부지런히 던전 클리어하려고 왔구나?’, ‘나중에 E급 되면 같이 돌자. 이 누나가 도와줄게.’ 하면서 좋게 좋게 이야기하던 그녀는 다른 사람과도 인사해야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담에 또 봐!”
음…… 뭔가 대놓고 무시당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어장 관리 당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왠지 찜찜한 기분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지현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나 때랑 비슷하게 대화하다가 ‘어머 오버롤 26요? 대단해요, 오빠.’ 이런다.
“오빠. 근데…… 상태창 구경해도 돼? 오빨 못 믿는 건 아닌데, 오버롤 26이면 역대급 재능이라 구경해 보고 싶어서…….”
“니 것도 보여 주면.”
“그래. 같이 보자. 그럼. 하나. 둘. 셋.”
그러더니 짝짝짝 박수 소리 나고, 오빠 너무 멋져 이러면서 목소리가 간드러지는 게 들렸다.
참 열심이다.
잰 정말 사회생활 잘하겠다.
다른 사람과도 인사해야겠다는 이지현은 그냥 그 남자 옆에 말뚝 박고 아양 떨고 있었다.
“F급 던전 근처입니다. 현재 위치는 성남시 중원구 쪽이고요. 여기서 내리실 분 있습니까?”
“저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지호입니다.”
“40번 김지호 씨. 확인되었습니다. 내리시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내리러 가니 이지현이 손을 흔들었다.
“지호야, 힘내!”
그녀를 쳐다보니 옆에 있는 남자가 입가에 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묘한 우월감을 드러낸 채.
거참…… 잘들 노네.
급 몬스터를 때려잡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