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313화 (2부 완결) (313/313)

# 313

에필로그 2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번 역은 관악구청 삼거리, 관악구청 삼거리역입니다.]

회색 도시는 예전에 모습을 찾았다. 그들이 살기 위해 뛰었던 거리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졌고 지진으로 바닥이 드러난 대로는 어느덧 정상 운행을 시작한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잊어버렸다는 듯 도시를 다시 찾아온 일상. 그것은 차분하면서도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한가한 버스에 남자아이와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성은 오늘도 자신의 아버지와 걸어 다녔던 이 길을 회상하며 눈이 내리는 거리와 버스 라디오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창문에 매달려 입김을 호호 불고 있던 남자아이가 여성을 향해 물었다.

“누나, 우리 어디가?”

한 남자가 떠나고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강수련과 곽동윤 사이에서 태어난 어여쁜 동생을 자기 무릎 위에 앉힌 채연이는 말없이 웃으며 병아리처럼 보송보송한 머리를 쓰다듬었고 아이와 함께 천천히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한가한 한때를 만끽했다.

따뜻한 버스 내부와 김이 서린 창문. 그 밖으로는 가로수에 매달린 흰색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6년 만에 다시 찾아온 그 날을 조용히 기억했다.

그리고 버스 기사가 천천히 볼륨을 올린 라디오에서는 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故) 곽동윤 씨의 추모 6주년을 맞아, 올해 종전 선언을 미루고 있던 한미연합군은 지금 이 시간부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음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더불어 종전 선언을 기다리고 있던 각 국가도 발맞춰 군사행동을 중지했으며 앞으로 10분 뒤 에덴 기념관에서 이뤄질 해체식을 위해 국가 정상들이 속속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은…….]

“손님, 차량 통제 구역 때문에 추모 공원까지만 가는데 괜찮으세요?”

느리게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던 버스 기사는 이제 몇 정거장 남지 않은 종점을 확인하며 백미러를 통해 뒤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사람들이 전부 거리로 나가느라 한적한 버스 안에서 아이와 함께 앉아 있는 여성을 향해 물었다.

원래는 행사가 이뤄지는 에덴 기념관으로 향하는 버스였지만, 공휴일인 오늘만큼은 그 중간 지점인 추모 공원까지만 가는 간선 버스.

혹여나 아이와 동행하고 있는 여성이 이 추운 겨울 길을 걸어갈까 봐 걱정되었던 버스 기사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연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추모 공원으로 가요. 아저씨는 행사에 참석하시는 거예요?”

“하하, 당연히 가야죠. 이제는 사라진다고 하니 아쉬워서…….”

격정의 시대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자라 불리며 내일을 걱정해야 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일이 일상이 되었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한 남자가 가져다준 믿을 수 없는 기적은 우리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니, 사람들은 민족과 사상, 그리고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드디어 다시 손을 잡았을 수 있었다.

그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6년.

사람들은 드디어 암흑기에서 벗어나 새 아침을 맞이했고 평범한 모습으로 버스를 운전하는 이 기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지금 이곳에 도달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버스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채연이는 손으로 창문에 서린 김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 - - - - - - -와!!”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주년 추모식이 시작되자마자 새하얀 손수건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작은 깃발을 휘날리는 사람들.

창밖에는 오직 생동감과 전쟁을 끝낸 사람들의 환호성만이 들려왔으며 라디오에서는 3대 단체장에 역임한 최 용팔이 에덴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었다.

담담한 어조로 시작되어 긴 세월을 감내했던 슬픔이 흘러나오는 연설문. 서울 장벽에서 빠져 나와 여러 차례 격변을 막아냈던 주역들의 은퇴는 암흑기의 씁쓸한 퇴장과 함께 찾아오고 있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에덴 추모 공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는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이제는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 가슴에 맺혔다.

그리고 물기가 어린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채연이는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을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이 거리의 기억. 버스가 달릴 때마다 바닥에서 흩날리는 눈발은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떠올랐고 채연이는 마음속에서 하나둘 슬픔을 그리움에 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한 정류장에 멈춘 버스의 문은 조용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버스 기사는 핸들에 손을 모으며 채연이에게 말했다.

“눈이 오고 있는데도, 하늘이 참 맑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손님.”

“아저씨 안녕~.”

추모 공원에 오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런 손님을 수없이 많이 태워다 주었을 버스 기사는 아무런 궁금증 없이 채연이와 아이를 내려 주며 웃었고 누나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버스에서 내려온 아이는 그런 기사를 향해 귀엽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원래부터 한적한 공간이었지만, 모두가 기뻐할 종전 선언 때문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조그마한 추모 공원.

눈이 소복하게 쌓인 소나무는 고요한 겨울바람에 따라 흩날렸고 이제 어른이 된 채연이는 작게 입김을 내뱉으며 아장아장 걷고 있는 동생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 다녀갔는지 깔끔하게 치워진 자갈길을 걸어가며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걸어갔다.

서울 장벽에서부터 미국 원정까지, 에덴의 이름 아래 죽어 간 모든 이들이 묻혀 있는 추모 공원.

비록 에덴과 곽동윤이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장소였지만, 묘지라고는 볼 수 없는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는 꼭 그가 남기고 간 품속과 같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동생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간 채연이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비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걸어온 한 단아한 여인이 이쪽을 향해 밝게 웃음을 터트리며 채연이와 아이를, 아니 소중한 딸과 아들을 나지막이 부르며 천천히 손을 벌렸다.

“엄마!”

눈이 왔음에도 어째 주변이 정리되어 있다고 했더니 강수련이 미리 와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아하게 넘긴 머리와 수수한 보라색 목도리.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었음에도 곽동윤을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신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강수련이 살며시 손을 벌리자, 채연이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는 뽀르르 뛰어가 품에 안겼고 그녀는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아이와 조용히 볼을 비빈다.

모두가 기념관에 모여 그의 업적과 종전의 기쁨을 나눌 때, 오직 가족이기에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의식은 그가 잠들어 있는 추모 공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채연이는 조용히 다가가 강수련의 손을 잡았다.

“아빠는요?”

“여전히 멋있으셔.”

특별한 곳이 아니다, 누구나 오갈 수 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공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곳에 모셔진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묘비 앞에 서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전우들의 곁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오늘도 이 자리를 찾아온 가족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잡은 세 명은 이 전쟁이 끝나는 날, 곽동윤의 묘비로 걸어갔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한 명씩 다녀갔는지 그의 묘비 근처에 눈처럼 쌓인 하얀색 국화. 성실, 진실, 감사.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련한 꽃말밖에 없었지만, 꽃 속에 파묻힌 그의 묘비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을 대신해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연이는 그가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나 또 왔어요.”

아프고 슬펐다. 그 빈자리가 너무나 커 온종일 울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이 아파 버틸 수가 없는 날이면 어느 때고 이곳으로 찾아와 아빠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 보았다.

고통스러웠던 지옥에서 나를 꺼내 준 구원자, 온몸에 뼈가 부스러지고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구하고 모두를 구해 준 든든한 바람막이.

모두에게 영웅이라 불리는 그는 세상이 두 번 바뀐다 해도 변하지 않을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배운 채연이는 빨갛게 변한 볼에 결국 뜨거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고개를 떨궜고 바닥에 내려앉은 눈을 녹이는 감정을 흘려 내보냈다.

“보고 싶어요…….”

남들이 볼까 봐, 참고 또 참았던 한마디였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품에서 채연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나와 엄마가 왜 우는지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아이와 울음소리가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봐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

채연이는 아무런 말이 쓰여 있지 않은 채, 곽동윤의 이름 석 자만이 새겨져 있는 묘비를 끌어안으며 무려 6년이나 지난 마지막 약속을 기억했다.

꼭 돌아올게, 돌아와서 꼭 옆에 있어 줄게. 그리고 채연이가 곽동윤과 했던 약속을 떠올린 그 순간 사방에서는 거짓말처럼 고요한 돌풍이 불어오며 바닥에 쌓인 눈을 날아오르게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채연이는 꼭 누군가 귀에 속삭인 것처럼 깜짝 놀라 고개를 추켜들었다.

아!

6년이 지나 마주한 약속은 너무나 눈부신 햇살이었다. 그래, 아무리 추워도 이 땅을 끌어안는 햇살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주변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는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고요하게 움직이며 잎사귀에 쌓인 눈을 털어 낸다.

그리고 가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르는 하얀색 국화들이 찾아 와 줘서 고맙다고, 이렇게 예쁘게 자라 줘서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를 보내온다.

아, 하얀색 눈 사이로 하얀색 꽃비가 내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임에도 눈이 시린 이유는 아마 밝은 햇살과 꽃을 들어 올린 바람 탓일 것이다.

눈물이 흐른다. 저 멀리 회색 도시에서 왠지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       *       *

“그건 동영상 버튼이잖아, 이 멍청아!”

“아, 머리 나빠지니까, 때리지 마요!”

노파가 구해다 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용팔이는 결국 애꿎은 촬영 모드를 켰다가 노인에게 맞았다.

그러자 결혼식장에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던 가족들과 일행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고 그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조명은 꼭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랑이 되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찍는 결혼사진. 나는 그 풍경을 시야 가득 담으며 조용히 들뜬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흘러가는 시간처럼 모든 것이 이별을 맞을 날이 오겠지만, 지금 남기는 기억과 사진만큼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 - - - - - - -.”

“?”

조용히 앉아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사진을 찍을 준비가 전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걸어가려던 그 순간 저 넓은 산맥과 도시 사이에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개는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행복한 순간임도 어딘가 먹먹한 눈가와 가슴.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 후련함과 그리움의 원인은 시나브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나에게 왔다.

조명이 없음에도 너무나 환하게 빛나고 있는 길이 보인다. 그리고 저 앞에서 시끌벅적 들려오는 웅성거림과는 별개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별의 길에서는 마치 꿈처럼 찾아온 형님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마치 내 결혼식과 행복한 가족들을 보기 위해 더러운 찾아오듯 더러운 소방관 옷이 아닌 깨끗한 정장을 입고 조용히 서 있는 형님.

나는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얼굴에 담으며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괜찮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없다 걸어가다 어느덧 뒤돌아본 길에는 내 아픔과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영원한 작별을 고하듯 찾아온 형님은 나에게 이제는 괜찮냐고, 과거에 너를 잊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 누구보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형님, 내 가족들이에요. 이런 나한테도 드디어 가족이 생겼어요. 모든 것을 줘도 바꿀 수 없고…….

형님이 나에게 그랬듯이 몸을 던져서라도 지켜 주고 싶은 가족이요.

그리고 그때는 형님한테는 너무 미안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걸 잊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형님, 내가 그래도 될까요?

‘동윤아.’

어디서 오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내가 쌓아 두고 이제서야 치울 수가 있던 고통과 낙인은 가장 행복한 순간 찾아온 형님이 가지고 갔다.

그리워서 울고 싶은 얼굴, 하지만 이제는 볼 수가 없을 과거의 기억. 내 이름을 부르고 조용히 미소를 짓는 형님 앞에서 나는 눈물 대신 웃음을 지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형님에게 다가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려는 그 순간 저 뒤에서는 사진을 찍을 준비를 끝내고 여기까지 걸어온 나를 향해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손을 흔드는 가족들이 있었다.

“아빠!”

“동윤아, 빨리 와라!”

고시원 창문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을 시작으로 이제는 이 길을 향해 걸어온 곽동윤까지.

앞으로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겠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손을 떠나간 미련을 꾹 잡으며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형님의 모습을 저 밤하늘에 날려 보냈다. 가벼워지는 발걸음, 오직 웃음만이 남은 얼굴.

나는 가족들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 저기 보이는 한가운데, 오직 곽동윤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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