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2부 10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날 고시원 창문에서 채연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었을 것이다.
그날 자전거 센터에서 강수련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내 아이들을 이토록 좋은 사람들로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휴게소 옥상에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가 마트 옥상에서 용팔이 형제를 외면했더라면 나는 이곳까지 혼자 걸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회색 도시를 힘겹게 가로질러 우리의 에덴을 만나고 처절했지만, 고통 속에 행복했던 지난 여정들이 기억난다.
이제는 유대감을 넘어서 나는 가족을 만들었고 우연은 필연이라는 이름의 삶이 되어 버렸다.
아팠지만, 행복했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다.
봄에 피는 꽃이 있다면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그 힘겨운 나날을 감내하고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눈을 뚫고 나와 피는 꽃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꽃이 되고 싶었다. 세상이 아무리 나에게 죽으라 윽박질러도, 피눈물이 터져 나올 만큼 아픔과 고통을 겪을지라도 나는 꿋꿋하게 일어나는 꽃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어느새 내 아이가 받아 갔고 나는 양손으로 힘겹게 감싸고 있던 그 꽃이 드디어 만개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겨울의 추위였다.
하지만 나는 드디어 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
그리고 눈을 뜨자, 내가 되찾기 위해 발버둥 쳤던 가족들이 바로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더러운 임무 복을 벗고 흘린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얼굴을 깨끗이 씻으며 항상 무기를 잡아야 했던 손에는 2년 전에 사용했어야 했을 여행 가방을 꼭 잡은 가족들.
놈들과 광신도 놈들이 판을 치는 위험한 일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진짜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국행 비행기를 드디어 목전에 둔 것이다.
그리고 채연이는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고 가족들 가장 앞에 서서 나를 불어오는 바람처럼 나지막이 불렀다.
아빠. 바위처럼 무거우면서도 바람처럼 가볍고,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살얼음처럼 시린 단어였다.
“아버지.”
그리고 채연이가 아빠를 부르자 아이들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물기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연이가 큰 만큼 어느덧 서서히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내 아이들.
이상하게 눈물이 벅차오를 것 같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어깨를 펴며 당당한 모습으로 가족을 맞이했다.
그러자 채연이와 아이들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말로는 전부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의 감정을 받은 나는 한 줌의 후회와 여한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천천히 장비를 내려놓으며 한쪽 무릎을 꿇자 채연이와 아이들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 - - - - - - -.”
회상이 보인다. 지난 세월이 행복한 주마등이 되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 밑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아이, 대학에서 구한 아이, 부랑자들로부터 구한 아이, 마트에서 구해 낸 아이.
모두가 어린 모습을 하고 뛰어왔지만, 내 품에 안길 때쯤 만개한 꽃봉오리가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삶의 지표를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 거친 두 손으로 이뤄 낸 결과는 이제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칼로 베어 낸 듯 주름이 진 눈가로 작은 눈물이 떨어지고 가슴팍에 안긴 채연이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름이 뭐야?’
‘이채연.’
종말이 너를 놓았지만, 내가 너를 잡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너희들은 내 딸이고 내 아들들이고 내 자식들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낳았고 이제는 마음으로 놓아줄 테니,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가서 세상이 뺏었던 일상의 손을 잡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 행복이자, 겨우 남길 수 있었던 긍지이자, 자랑이었던 아이.
나는 이제 미련을 놓아주고 또 앞을 향해 걸어갈 각오가 생겼다. 그리고 만약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또 한 번 아빠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는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고 우리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떠나기 직전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 * *
‘나랑 만난 거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끌어안은 강수련을 향해 물었었다.
불과 얼마 전 처음으로 신부가 되었지만, 잠시 생이별을 해야 하는 냉정한 현실.
나는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 주는 것조차 미안해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를 부서질 듯 꼭 끌어안은 강수련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내가 비행기 탑승 1분 전 내 얼굴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강수련은 이렇게 속삭여 주었다.
‘가끔 악몽을 꿔요.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도 없었을 테니까요.’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지만, 한 치의 걱정도 없었다.
왜냐하면 피곤하고 지쳤던 내 곁에 강수련이 있었듯 한국으로 돌아갈 아이들에게 언제나 그녀가 있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 대답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제 떠나야 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자 강수련은 나와 이마와 곧 신기루처럼 사하질 체온을 맞대며 이제는 보내 줘야 하는 마지막 감정을 품었다.
시나브로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속삭임이 실려 온다.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 줘요, 알았죠?’
꼭 돌아온다고…….
“동윤아.”
하지만 그리운 회상과 대답하고 싶었던 속삭임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뜨자, 어두운 기지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고 곳곳에서는 야간 투시경을 쓴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작전의 투입될 준비를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폭풍전야, 타들어 가기 직전에 도화선.
오전에 겪었던 감정은 다 거짓말이었다는 듯 심장에는 긴장감이 자리 잡았고 이들이 내뿜는 두려움과 절망은 내 감정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짙었다.
하지만 나는 심장에 무미건조한 감정을 뒤집어씌우며 나를 불렀던 노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인은 내 어깨를 조용히 붙잡아주며 할 말을 이어갔다.
“……조금 늦었어, 이제 준비할 시간이야.”
가족들이 한국으로 떠나고 나는 마치 죽은 송장처럼 미군기지 의자에 앉아 잠이 들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그 시간이 4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길었지만, 내 심정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을 에덴 팀은 절대 나를 닦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지고 작전이 시작될 저녁이 되자, 멈추지 않는 시간은 결국 코앞까지 당도했는지 노인은 이제 움직일 시간이 왔음을 나에게 알려 왔다.
저 멀리서 완전 무장을 갖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덴 팀과 이번 작전을 위해 기지에 모인 수많은 군인.
나는 미안하다는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용팔이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하나둘 장비를 챙겨 주었다.
“- - - - - - -.”
미군에서 이번에 새로 개발했다는 대변종용 방검복을 입고 놈들의 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특수 모직으로 만든 임무복을 입는다.
그리고 여유가 남는 모든 공간에 대검 집을 달자 용팔이 형제는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한 대구경 권총과 소총을 내밀었다.
묵직한 탄창과 어두운 곳에서 환하게 빛나는 광학 장비.
순식간에 무장을 끝내고 에덴의 모자를 꾹 눌러쓴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주변에는 어느새 다가온 에덴 팀이 한곳에 뭉쳐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작전 시작까지 앞으로 1시간이다. 죽음의 향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저 멀리 서쪽에는 어느덧 황혼이 지고 우리가 나아갈 사선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에덴 팀 앞에 선 나는 그들을 향해 감사 인사부터 건넸다.
오직 나와 내 가족을 살리자고 먼 한국에서 날아와, 죽을지도 모르는 작전에 투입되는 팀들.
한국에는 분명 편하고 안전한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기어코 나를 따라와 바로 옆을 지키는 것을 선택해 주었다.
삶과 미련을 넘어 오직 유대감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친 나와 일행들.
서울을 빠져나올 때도 그랬듯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들은 하나 같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따라 웃으며 소총을 둘러매자, 사방에서는 절도 있는 장전 소리와 함께 투기와 전의로 점철이 된 신념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 - - - - - -.”
구호는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처럼 시작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빠른 발걸음으로 천만 문을 헤치고 나가자, 사방에서는 잠자코 있던 험비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시동을 걸었고 헬리콥터는 커다란 로터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저 멀리서 날아오고 있는 전투기들과 하나둘 험비에 탑승하기 시작하는 군인들.
그리고 천막을 빠져나온 나는 주변에서 미친 듯이 울리는 무전 소리와 군인들의 경례를 가로질렀고 언제나 그렇듯 맨 앞에 서서 어깨와 등을 폈다.
총이 무겁다. 마음이 묵직하다. 하지만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조명이 저 끝을 가리키니, 감고 있는 눈이 뜨여질 수밖에 없었다.
작전명 공포의 종식, 에덴 팀 마지막 원정이었다.
* * *
- - - - -구르르르릉-!!
“여, 여진입니다! 꽉 잡으십시오!”
멀쩡한 도로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승기류 때문에 지상으로 이동해야 하는 우리는 모든 악조건을 뚫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미친 듯이 흔들리는 지반과 작전 팀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과 변종.
하지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미 육군은 무리한 희생을 내서라도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호위했고 험비를 운전하고 있는 중사는 긴장된 얼굴로 손잡이를 잡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험비는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위태롭게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 도착 10분 전, 이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왼쪽 공장지대입니다! b 8c 299 좌표, 블랙 라인 접근 중!]
[막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 - - -끄아아아아악-!!]
에덴 팀과 통합된 미 육군의 무전 채널에서는 실시간으로 작전 현황이 들려오며 우리의 귀를 어지럽혔다.
완전히 샌프란시스코 근처를 둘러싼 놈들 때문에 가지고 모든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 미 육군. 하지만 그 화력조차 몰려오는 변종들과 블랙 라인을 막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군인들의 희생을 발돋움 삼아 다른 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분가량을 미친 듯이 달려갔을까, 유리창 밖으로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린 주변 도시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험비는 그 폐허를 향해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지진 때문에 다리가 사라져서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우회로에서 그린베레 팀이 엄호를 위해 대기 중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사히 도착하시길…….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의 희생을 교두보 삼아 얼마나 달려왔을까. 지진으로 인해 길은 완전히 끊겨 버렸고 저 앞에는 물이 빠진 샌프란시스코만과 부서진 금문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 재수 없게 날아다니는 까마귀들과 물이 빠진 검은색 땅. 하지만 그중에 가장 압권인 것은 물이 빠져 버린 만 곳곳에 뚫려 있는 거대한 싱크홀이었다.
저 모습이 과연 현실인지, 아니면 인간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험비를 멈춘 미 육군 중사는 그런 우리의 상념을 깨부수며 저 앞에 보이는 우회로에 공항 작전을 같이했던 그린베레 팀이 엄호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돌아올 때는 어떡합니까!”
“나이트 스토커가 대기 중입니다! 무전 보내 주시면 불시착하는 한이 있어도 날아올 겁니다!”
한때 메리제인이 소속되었던 특수 항공 연대가 온다고 하니, 불안한 상승기류에도 안심이 조금 되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며 장비를 내린 나는 중사와 호위 팀에게 무사히 돌아가라는 말을 남겼고 에덴 팀과 함께 이 지역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한시가 급하다. 저 싱크홀에서는 꼭 지옥의 외침 같은 거대한 메아리가 울려오니 뜀박질을 하는 바닥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곳은 바로 지옥의 입구였다.
“정신 차려! 동윤이 등만 보고 따라가!”
하지만 이 와중에 터지는 노인의 고함은 미약한 공포를 느낀 에덴 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잠시 멈췄던 우리의 뜀박질을 지속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소총을 견착하고 사방을 둘러본 나는 언제나 그랬듯 선두에 서서 그린베레 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우회 길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칼바람이 불어온다.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그 뜨거운 바람은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고 이 기류와 분위기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에덴 팀은 오직 내 등을 바라보며 이 거친 폭풍우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100m 남짓한 폐허를 힘겹게 나아가자 저 앞에서는 대기를 찢어발기는 기관포 소리와 함께 그린베레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가 어지럽다.
감각이 솟아오르다 못해 터져 버렸다.
마지막 투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