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303화 (303/313)

# 303

2부 100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주한 미군을 제외하고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부대를 본토로 불러들인 미국은 사방으로 나누어진 전선을 축소해 놈들과의 전쟁을 교착 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토의 4분의 1을 상실하는 대가로 만들어 낸 희생이었을 뿐이고 전선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라면 이 상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본토에서 일렁이고 있는 수만 마리, 그리고 수백만 마리, 나중 가면 정말로 수천만 마리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미국 본토에 핵을 발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대피소에서 떨고 있을 민간인들은 서서히 희망을 잃어 갔다.

그리고 정말 낭떠러지 바로 앞까지 근접한 미국 정부와 모른 척하면서도 이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전 세계는 모든 눈과 귀를 에덴 팀이 있는 시더빌에 집중시키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슨 행동을 하는지, 혹시 내가 포기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걱정은 기지 내부를 떠도는 소문을 전해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무거운 어깨와 점점 한계를 치닫고 있는 몸 상태. 나는 눈을 감을 때마다 전해지는 불안감과 악몽 때문에 한시도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마치 지진이 오기 전 동물이 자리를 피하는 것처럼, 변종이 되어 버린 내 몸은 저 서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빅원(the big one)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이기심을 부려 보았다.

그것은 바로 미 육군에게 잠시 전선을 맡기고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받은 것이다.

아무런 사전 작전도, 회의도 없이 온전히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

다행히도 미국 정부는 제 발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나에게 마땅한 대우를 해주었고 큰 희생과 손실을 각오하고서라도 나를 잠시 전선 밖으로 빼내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한 보람은 있는지 내 이기적인 선택에도 걱정보다는 슬픔을 보내오는 주변 시선 속에서 우리 가족은 태풍 전야의 휴가를 조용히 보낼 수 있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오늘만큼은 아무런 걱정 없이……. 앞으로 몰아칠 태풍을 위해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말이다.

“형님, 떨리세요?”

그리고 짙은 상념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저 앞에서 웃고 떠들던 용팔이 형제가 조용히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고 항상 칙칙한 임무 복을 입고 있던 형제답지 않게 몸에는 깔끔한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형제와 마찬가지로 평생 처음 입어 보는 예식장 턱시도를 입은 채 시더빌 공터에 마련된 의자에 조용히 앉았고 떨리는 심장을 조용히 가다듬었다.

해가 지면 항상 어둠으로 물들던 시더빌 답지 않게 오늘만큼은 조명이 별처럼 떠 있는 밤 9시.

시더빌의 주민들과 에덴 팀은 그간에 걱정과 긴장을 잊고 어딘가 설레는 얼굴들로 웅성거렸으며 저 멀리서는 깔끔한 제복을 입은 스티브 대령과 미 정부의 관계자들까지 있었다.

“떨리네.”

그리고 용팔이에게 짓궂은 질문을 받은 나는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떨리고 있음을 인정하며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을 조용히 가다듬었다.

그러자 용팔이와 두식이는 자기들끼리 신나서 낄낄거렸고 임시로 만든 연회장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해졌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종말의 상황에서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얼굴에 웃음을 심는 사람들.

절망할수록 희망은 고개를 쳐들고 어두울수록 마음속에 촛불을 밝게 타올랐다. 그리고 이 자리는 그 모든 고생과 아픔을 청산하는 나와 강수련의 결혼식 자리였다.

‘동윤 씨, 제 평생소원이에요.’

나는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주어진 기간을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할지 가족들과 상의했다.

그러자 채연이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다 말하며 기뻐했고 강수련도 내색하지 않지만,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은연중에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얼마 뒤, 채연이가 잠시 나간 것을 확인한 강수련은 나에게 작은 결혼식을 치르고 싶다는 수줍은 프러포즈를 했고 나는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를 보고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 된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단 한 명의 신부로 만들어 주기 위해 잠시 미뤄 두었던 행복을 우리들 곁으로 가지고 왔다.

딸랑, 딸랑.

시계가 정확히 9시를 가리키자, 경쾌하게 울리던 피아노가 소리를 멈추고 저 뒤에서는 누군가 울리는 작은 종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는지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다 두고 정말 소박하게 준비된 자리에 앉아 이쪽을 향해 모든 시선을 집중했다.

어디 가서 결혼식 시설을 빌릴 수도 없었기에 대부분 주민이 손으로 만들거나 낡은 제품들을 뜯어고쳐 만든 결혼식 장소.

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장식과 하얀색 천들 덕분인지, 불빛이 일렁이는 시더빌의 공터는 별 아래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종이 두 번 울리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교회에서 가져온 신단 앞에 놓인 촛불 두 개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 - - - - - - - -.”

누구의 재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식장을 밝히고 있는 조명이 그렇게 밝지 않아 저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가 우리의 지붕이 되어 주었다.

말 그대로 소박하면서도 자연이 바로 옆에 있기에 아름다운 단 하나뿐인 공간. 그리고 사람들이 자리에 모두 앉자 마을 유일에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린 연주자는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머금고 연주를 시작했다.

살며시 불어오는 겨울바람과 마치 강처럼 머리 위를 흐르고 있는 높은 은하수가 보인다.

내 가슴은 먹먹하기 그지없었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드디어 마지막 행복의 장을 써 내려 가는 곽동윤의 일기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가로수 사이에서 수수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강수련이 노인의 손을 수줍게 붙잡고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 - - - - 아.”

소란스러움은 없었다. 그러자 지금 이 공간만큼이나 고요한 행복이 있을 뿐이었다.

비록 누군가 입은 적이 있는 오래된 물건이지만, 깨끗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머리에서 들꽃을 엮어 만들 귀여운 관을 쓰고 있는 강수련.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수줍은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꽃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는 채연이와 김연경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별빛이 하나가 되고 눈조차 우리의 눈치를 보며 사라진 허공은 단아한 들꽃이 대신했다.

그리고 잠시 뒤, 강수련의 아버지를 자처하고 마지막 신부의 길을 같이 걸어온 노인은 그녀의 손을 나에게 건네며 많은 감정이 깃든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동윤아, 수련아…….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다. 그 한마디 말로는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었지만, 그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오직 절망뿐인 상황에서 시작된 만남과 이제는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된 사이까지.

물론 그사이에는 많은 아픔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걸어온 길 그 자체가 삶이자 내 일기에 쓰인 이야기가 되었다.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떨리는 눈가와 심장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노인이 내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뒤로 돌았다.

그러자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머금은 채 촛불이 일렁이는 자리 한가운데서 입을 열었다.

“이 노년에 무슨 운이 트였다고 이런 대접을 해주는지……. Mr. 곽, 영광일세.”

“……잘 부탁드립니다.”

둘 다 험악한 세상을 겪어서 그런지 믿고 있는 종교는 따로 없었다.

그렇기에 마을에 지도자이자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노파가 주례를 맡아 주었고 나와 강수련은 노파의 겸손에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파가 자리에 서자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멈췄으며 사람들은 앞에서 조용히 일렁이는 촛불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지팡이를 세워 두고 헛기침을 한 노파는 오늘의 주인공과 이 자리에 참석해 준 하객을 쭉 둘러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고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 - - - - - -.”

그리고 나는 모두의 축복 한 가운데에 선 그 순간 주변에 들리던 소리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니,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추기를 원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겨울을 이겨내고 핀 화관을 머리에 얹고 그 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강수련.

그녀와 맞잡고 있는 손에서는 결혼반지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고 나는 감정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입을 꾹 다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좋았다,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이 행복을 저버리고 오직 고통과 죽음만이 있을 지옥으로 걸어갈 각오가 서지 않았다.

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연인과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미련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고 환하게 웃고 있는 노파의 축시가 귀를 간지럽혔다.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다.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을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영원히 행복하리라.”

*       *       *

“연락받고 왔습니다.”

“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짧지만 너무나 행복했던 허니문을 지내고 채연이와 잊지 못할 시간도 보냈다.

그리고 6시간만 지나면 한국행 비행기가 뜨는 오늘, 나는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연락을 받고 네바다 국경 지구에 임시로 만들어진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검문소에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험비에 탑승한 우리는 하이패스로 검문을 지나며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임시로 지어 놨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한가운데에는 콘크리트 건물로 투박하게 만들어 낸 원통형 건물이 있었고 거리에는 하얀색 연구복을 입은 과학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에덴 팀이 본 건물에 도착해 험비에서 내리자 이곳을 방어하고 있는 주 방위군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삐이이이-!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는 종말 초기부터 이 사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엄격하기 그지없었고 우리는 의례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나서야 본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주 방위군은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묘하게 꿉꿉한 공기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안내자는 어느새 젊은 과학자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더럽게 넓은 건물의 복도를 걷는 것도 잠시 노인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한쪽을 가리켰고 나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창문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뭡니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원통형 건물 안에는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큰 거대한 공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온갖 선들이 붙어 있는 링 모양에 기계장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작동을 멈췄는지 그 어떠한 소리와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규모만큼은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내 물음에 곤란한 듯 볼을 긁적인 젊은 과학자는 지금 이곳에서 말하기 곤란한지 눈치를 살폈고 그의 입장을 고려한 나는 다시 안내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끝없이 늘어진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그러자 저 앞에는 거대한 철문과 함께 접근 금지라는 살벌한 문구가 노란색으로 적혀 있었다.

삑-!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과학자가 신분증과 지문, 거기에 홍채까지 인식을 완료하자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철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철문이 열리자 살벌하고 황량한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장비와 바닥까지 온통 흰색인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어도 100명은 가뿐하게 넘어 보이는 연구진들과 곳곳에 중앙 컴퓨터와 연결된 최신 장비들.

모니터 화면에는 건물 중앙에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의 해부도가 떠올라 있었고 곳곳에는 놈들과 변종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배양액에서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단체장님!”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우리는 한동안 넋을 놓으며 최첨단 과학으로 분석된 종말의 단면을 엿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저 멀리서는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고 그 뒤로는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의 연구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5시간.

아마 그 5시간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될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