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302화 (302/313)

# 302

2부 99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당장 귀국하셔야 합니다.”

비밀스럽게 이뤄진 신체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철은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나에게 말했다.

평소 냉철한 성격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하던 에덴의 닥터 김철답지 않게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이 된 얼굴.

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고개를 떨굴 것 같은 그에게 알겠다는 대답이 아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복잡했다. 미국과는 협력을 조건으로 거래를 했고 채연이와 일행들을 안전한 한국으로 보내려면 내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늙은 사람처럼 점점 회색으로 변해 가는 머리를 매만지며 어느새 버릇된 에덴의 모자를 힘없이 꾹 눌러썼고 이내 김철에게 물었다.

“전에 말씀드린 건 처방이 가능합니까?”

“……예.”

귀국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김철도 내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물은 아무리 주워 담아도 본모습을 찾을 수 없듯이 나도 이미 먼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잦은 손 떨림으로 사격에 지장이 있었던 나는 김철에게 강한 진통제를 처방받으며 조용히 주머니에 챙겨 넣었고 나를 치료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그와 한동안 얼굴을 마주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은 열리지 않는다.

주치의로서 그 누구보다 나의 몸 상태를 알고 있을 김철도 그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몰려오는 먹먹함과 오랜 친우의 슬픈 감정.

나는 김철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진료실의 문이 열리며 노인과 강수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끝났어요? 몸은 좀 어때요?”

의료진과 연구진을 동반한 에덴 팀이 미국으로 도착하자, 강수련은 가장 먼저 나를 김철에게 맡기며 전체적인 몸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간 고생했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서 그런지 누구보다 더 조급했던 그녀의 태도.

물론 그녀를 걱정시킬 생각이 없었던 나는 김철과 적절하게 말을 맞췄고 자잘한 부상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해줬다.

그러자 강수련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행이라는 듯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실없이 웃으며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안경을 쓰는 김철과 창밖에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강수련의 체온이 너무나 따뜻해 마치 스스로가 따뜻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에덴 팀이 미국에 도착했으니, 이제는 강수련과 아이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아마 전세기가 준비되고 안전한 귀국 항로가 결정되는 즉시 한국으로 직행할 채연이와 아이들.

양 국가에서 없는 사정을 털어 가며 호위기까지 붙인다고 하니 돌아가는 길은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려온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고 이내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눈가에 촉촉한 물기를 조용히 삼켰다.

같이 가면 안 돼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심정이 눈동자 너머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한 나는 작은 포옹으로 이럴 수밖에 없다는 미안함과 금방 뒤따라 한국으로 가겠다니 못 지킬 약속을 맹세했다.

“동윤아.”

진료를 마친 김철은 씁쓸한 얼굴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고 내 품에 안긴 강수련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조용히 울고 있는 그녀를 슬픈 얼굴로 위로하며 내 이름을 불렀고 지금 평원에 있는 미군 기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노인은 웬만하면 둘만의 시간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사항은 이런 찰나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강수련 그녀도 사소한 욕심으로 나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애써 눈물을 닦으며 나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곧 한국으로 떠날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강수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노인을 따라나섰다.

“FBI가 드디어 꼬리를 잡았어.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 결정적이었던 모양이야.”

“추적 중이랍니까? 피해가 클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따질 수는 없잖아. 목숨을 걸어야지.”

그토록 기다리던 에덴 팀이 도착하고 정말 침대에 몸을 뉠 시간조차 없는 바쁜 일과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노력한 대가가 있었는지, 교주의 제거를 위한 작전은 점점 수면 위로 올라왔고 드디어 사활을 건 FBI가 도주한 교주의 흔적을 잡아내었다.

수많은 요원과 군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기 시작한 잔혹한 진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이 종말이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복도를 빠져나온 나와 노인은 빠른 걸음으로 시더빌을 가로질러 정문 밖 평야에 있는 미군 기지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기 중인 에덴 팀을 만날 수 있었다.

“단체장님.”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변종과 벌이는 전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전문가인 에덴 팀이다.

그리고 시더빌과 미군 기지를 오가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번 작전에 기여한 에덴의 중추들은 나만큼이나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고 오늘 아침 교주의 꼬리를 잡았다는 소식에 정말 오랜만에 한곳에 모여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가오자 담배를 서둘러 끈 강 형사는 미군이 에덴 팀에게 배정해진 천막을 향해 나와 노인을 서둘러 안내했다.

“- - - - - - -.”

‘교주의 흔적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에 들려온 희소식에 여파는 생각보다 컸는지 미군기지의 분위기는 전날과 비교해 상당히 어수선했다.

그리고 에덴 팀이 3일 만에 다시 뭉쳤다는 소리에 우르르 몰려나온 군인들은 맹렬한 시선과 관심을 우리에게 보냈고 나는 잠시 이곳에서 체류 중인 그린베레 대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천막 안으로 들왔다.

하지만 어저께와는 달리 조용한 천만 안은 사람이 없어 휑했고 나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강 형사에게 물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아! 연구팀은 네바다 국경 쪽에 위치한 임시 연구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색팀은 미국 측에서 제공한 장비를 시험 중이고요.”

피곤한 얼굴로 담배를 문 강 형사가 말하길, 에덴에서 온 한국 연구진은 종말 초기부터 이 종말 사태를 연구해 온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와 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대한 연구 자료를 가지고 있는 미국 연구진과 직접 발로 뛰어 채취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던 한국 연구진의 시너지는 생각 외로 엄청났는지, 에덴의 연구진 팀장은 당장 내일 이곳으로 와서 연구 결과를 확인해도 좋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그전에 FBI가 찾은 교주의 흔적을 보고받아야 하는 나는 연구 결과는 잠시 내일로 미뤄 두기로 하고 천막 안에 준비된 테이블에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저 멀리서 들려오는 헬기의 로터 소리와 함께 처음 보는 사람들과 참모진을 대동한 스티브 대령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Mr. 곽!”

그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스티브 대령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환한 웃음과 함께 다가와 내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간 상부의 압박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수척하기 그지없는 대령의 얼굴.

하지만 저번 새크라멘토 국제공항 건과 FBI와 진행된 협업을 통해 성공시킨 추적 작전은 상부에서도 인정을 해줬는지 스티브 대령의 얼굴은 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대령과 함께 들어온 두 명의 남자는 유난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일행들을 상대했고 나는 그들이 FBI에서 온 고위급 요원들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CIA는 내란 혐의로 국장과 고위직들이 잡혀간지라 이쪽을 향해 발조차 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아예 FBI에서 교주를 향해 적색 수배를 내리고 미국 내부에서 수사 중인 모양이었다.

“Mr. 곽, 감사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변종을 처리한 공항 내부에서 외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피커를 찾았다고 넌지시 스티브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대령은 깜짝 놀라 군대를 투입해 공항을 확보했고 공항 보안 시설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정황상 증거로만 봐도 교주가 설치한 것이 분명한 무선 시설.

추적과 탐색이 계속되었던 숨 막히는 3일의 시간이 지났고 흔적을 쫓아 캘리포니아 서쪽으로 파견된 요원들은 변종들에게 죽을 각오로 하나둘 흔적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대망의 오늘, 결전의 날을 두고 대기 중이던 나와 에덴 팀은 그들이 하는 브리핑을 통해 교주의 위치를 보고받을 수 있었다.

“……예? 진짜 샌프란시스코가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서류 더미를 가져온 FBI 요원들은 3일 동안 긁어모은 교주의 흔적과 활동 반경을 종합해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특정 위치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북쪽 캐나다 국경이나 LA를 넘어 멕시코로 향했을 거로 추측했던 나와 노인은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더빌에서 나와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쭉 향하면 나오는 샌프란시스코 시티.

미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번 2차, 3차 격변을 고스란히 맞은 폐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곳에 교주가 존재하고 있다니 우리는 무언가 기만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인이 스티브 대령에게 조용히 물었다.

“폭격은? 교주를 꼭 체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노인의 말이 백번 맞다. FBI가 명목상 수배자라는 낙인을 찍기는 했지만, 이미 군대가 움직인 시점에서부터 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폭격이든 공습이든 죄다 때려 박아 교주를 손쉽게 처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샌프란시스코가 대지진으로 폐허가 돼 버린 마당에 더 난리를 쳐 봤자 얼마나 손실이 가겠는가.

하지만 노인이 말한 정론에 깊은 한숨을 내뱉은 한 요원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선을 던진 그곳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찍은 위성사진이 있었다.

“이쪽을 봐주세요.”

“- - - - - - -?”

불과 하루 전에 찍은 위성사진이었다. 그곳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샌프란시스코가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지형과는 너무나 모습이 달랐다.

원래는 골든 게이트라는 곳을 기점으로 태평양과 이어져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양분하고 있어야 하는 샌프란시스코만(Bay).

하지만 위성사진에는 푸른색 물이 넘실거리는 만이 아닌, 물이 빠져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 검은 땅만이 보일 뿐이었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골든 게이트는 무너져 내린 지반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바닥을 드러낸 만과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싱크홀이 생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들고 온 요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듯 위성사진 위로 붉은색 세로 선을 쭉 그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표기한 곳이 샌앤드레이어스 단층입니다. 3차 격변 뒤로 여진만 수백 번 일어나고 있고 언제 또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데, 만약 구덩이라도 건든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네.”

위성사진으로 찾지 못할 정도면 교주는 어디 깊은 지하 같은 곳에서 숨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수박 겉핥기와 같은 폭격과 공습이 아닌, 제대로 된 벙커나 지반을 뚫고 들어가는 벙커버스터(bunker buster)와 같은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위치조차 특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 넓은 도시 사방에 융단 폭격할 수 없지도 않은가.

아니, 잘못했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싱크홀이나 그 근처에 떨어져 여진을 일으키고 있는 불안정한 단층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구덩이 생성에 영향을 주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얼굴이 어두워진 나와 에덴 팀을 향해 침을 꿀꺽 삼킨 스티브 대령이 조용히 깍지를 끼며 말했다.

“위치만……. 교주의 위치만 찾아내고 빠져나오시면 됩니다. 그 뒤로는 저희가 정밀폭격으로 단층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미군의 무기 수준을 생각해본다면 정밀폭격의 오차는 겨우 수십 미터다.

말 그대로 나와 에덴 팀이 교주의 위치를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 뒤는 미국이 알아서 해줄 것이란 말.

그리고 교주를 처치할 유일한 기회의 시작은 저 넓은 폐허에서 교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자 한순간 숙연해지는 천막 안과 조용히 눈을 감으며 결국 담배를 무는 노인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국은 모든 부대를 동원해서 에덴 팀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 스스로였다.

그리고 격변 이후로 이만한 싱크홀 본적이 없었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스티브 대령과 요원들에게 물었다.

“한국으로 가는 귀국 비행기는 언제입니까?”

“원하시는 날짜가 있으십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족이랑 시간을 조금 가지고 싶습니다. 작전이 있는 날 새벽에 가능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작전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백악관 관계자가 이번 일을 통해 나와 에덴 팀이 받을 막대한 혜택과 보상을 입 아프게 떠들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이 시리다. 아니, 내 눈이 시리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차가운 겨울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다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눈가가 몹시도 시렸다.

모든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어둠도, 곧 여명이 뜰 새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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