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98화 (298/313)

# 298

2부 95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형님, 여기요.”

“고마워.”

나는 용팔이가 내미는 수건을 받아 들며 따뜻한 물로 흠뻑 젖은 머리와 몸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김으로 가득한 샤워 부스에 거울을 바라보자 그간 고생으로 인해 꾀죄죄했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시는 물조차 아껴 써야 했던 열약한 상황에서 정말 오랜만에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던 샤워 시간.

나는 따뜻한 물로 씻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시더빌로 샤워 부스를 가져다준 미군에게 작은 감사함을 느끼며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었다.

그리고 옷을 입기 위해 젖은 수건을 지정된 자리에 던져둔 그 순간 또 다른 샤워 부스에서 문이 열리며 흡족한 얼굴의 노인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야, 미국이 돈이 많기는 하구나. 누구는 예산 없다고 해주지도 않던데.”

방금 샤워를 끝낸 노인의 얼굴은 5년을 더 젊어 보였다.

그리고 샤워를 끝낸 노인은 설마 이것까지 구해 주나 싶었을 이태리타월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나처럼 거울 앞으로 다가와 좋은 향기가 나는 수건으로 룰루랄라 몸을 닦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이 묘한 긴장감과 딱딱했던 절망을 사르르 녹여 줄 수 있는 온수 샤워.

내가 특별히 부탁했던 만큼 미국 정부도 심혈을 기울여 임시 샤워장을 만들어 주었고 시더빌 주민 누구라면 정해진 시간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겨우 시간을 만들어 내 나도 일행들과 함께 샤워실을 찾아 그동안 쌓인 묵은 때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벗겨 냈다.

“- - - - - -하.”

피부는 뽀송뽀송하고 머리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래, 개운하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느긋한 목욕을 끝낸 나는 노인이 어디서 주워 온 싸구려 로션까지 꼼꼼하게 바르고 미국 측에서 준비해 준 임무복을 하나하나 차려입었다.

거울을 보니, 한국에서 처음 출발할 때와 다르지 않은 깔끔한 모습.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나는 대검과 권총 같은 기본적인 장비만을 챙기고 일행들과 함께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씻고 있는 샤워실을 빠르게 나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 안쪽과는 너무나 다른 차가운 공기가 갓 씻고 나온 우리의 몸을 시원하게 강타했다.

노인이 나를 향해 물었다.

“브리핑이 몇 시였지?”

“20분 뒤요.”

미국과의 협상이 끝나고 불투명했던 대치는 피부 위에 내린 눈처럼 사르륵 녹아 버렸다.

거기에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온 미국 정부의 태도 덕인지 시더빌의 주민들은 못마땅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면서도 우리의 의견을 따라 주었고 지금은 잠시 단절되었던 문명의 향기를 맡으며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초창기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손꼽히며 봉쇄되었던 캘리포니아 동부는 블랙 라인이 캐나다 국경으로 몰려간 뒤로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었고 시더빌과 그 인근 지역은 나와 미군이 묵을 임시 기지로 탈바꿈되었다.

격변으로 인해 고립되었던 군부대의 합류와 가뜩이나 모자란 인선을 쥐어짜 시더빌로 물자를 보내기 시작한 미국 정부.

3일 전과 다르게 시더빌은 군인들과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Mr. 곽!”

그리고 우리가 미 육군 쪽과 약속한 브리핑을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정문에서 에덴 팀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가 다급히 내 이름을 부르며 이쪽으로 뛰어왔다.

잔뜩 몰아쉬는 숨과 단정하게 자른 머리.

이 이른 시간에 누군가 했더니 나와 일행들처럼 꾀죄죄한 모습에서 벗어나 깔끔한 군복을 차려입은 우리 캠프 군인들이었다.

아니, 이제 미국 측과 협상이 끝났으니 미 육군 소속 군인들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선두에 선 메리제인이 환히 웃으며 이쪽으로 달려와 포옹하자, 나도 마주 웃으며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선하고 정의로우며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은 참 군인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협상 자리에서 잊지 않고 메리제인과 캠프 군인들을 끝까지 챙겨 주었고 미국 정부 측도 흔쾌히 받아들여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지켜야 하는 절차가 있어 잠시 시더빌을 떠나야 했던 그들은 3일 만에 이곳으로 복귀해 가장 먼저 나와 일행들을 찾았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눈 메리제인은 내 물음에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희 전역하기로 했습니다!”

“- - - - - -?”

탈영과 기타 등등의 죄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거기에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미국은 그들을 어떻게든 잘 구슬려 더 좋은 위치와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전역했다고 말하는 메리제인을 본 우리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고 올리버 중사와 클로에 병장은 민망함이 섞인 얼굴로 흐흐 웃으며 부끄럽다는 듯 볼을 긁었다.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 아무리 민간인이라 해도 총을 잡고 싸워야 하는 이 종말에서 군인이라는 직업은 어쩌면 좋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마음만 먹으면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할 기회까지 생겼는데, 그것을 차 버리고 전역을 해 버리다니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일행들은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메리 제인을 따라 전역해 버린 올리버 중사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발로 나온 거니까요.”

처음에는 인지 부조화가 생겨 혹여나 이들이 압박을 받았나 싶었다.

하지만 올리버 중사는 도리어 군부 쪽에서 자신들을 붙잡았다고 말하며 걱정을 일축했고 순전히 자신들 의지로 전역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어디 다친 곳이나 그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나 싶어 그 이유를 묻자 갑자기 입을 다문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기를 힘들어하는 눈치만을 살폈다.

영문 모를 침묵과 갑자기 어색해지는 분위기.

하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만큼은 그들이 전역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 얼굴에 장난기를 머금고 군인들에게 말했다.

“이력서는 준비했어?”

“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정말 의도치 않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나와 일행들은 이 먼 타국에서 길이 엇갈렸던 채연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 미국에서 만난 새로운 동료. 비록 그렇게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들을 일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캠프 군인들은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선뜻 꺼내기 어려워했고 조금 전 상황에도 서로의 눈치만을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현명한 노인은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단번의 알아챘는지, 특유의 농담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그저 조용히 웃음만을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 나는 일행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미국에 와서 새로 생긴 에덴 팀을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영광입니다.”

협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에덴 팀과 한국 연구진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모습을 감춘 교주를 추격해야 하는 여정이 예정된 미래는 무척이나 험난할 것일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꽃길을 벗어나 오직 고통만이 있을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선한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 우리 에덴이 추구하는 신념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도리어 나에게는 영광이었다.

그리고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간 감정의 폭이 굉장히 넓어진 메리제인이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저는…….”

처음 나와 만난 그녀는 자신이 읽던 동화 속 인물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자신의 동경을 동경만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군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생존자로서 제 몫을 했으며 누구보다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낯간지럽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는 동료라는 단어.

나의 일기를 읽고 군인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넘어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붙잡고 우리 쪽으로 끌어당겨 책 속의 동화가 아닌 진짜 이야기의 현실 속으로 메리 제인을 데려왔다.

*       *       *

“충, 충성!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짧고 초졸 한 환영식을 마친 나와 일행들은 4분 뒤에 시작될 브리핑을 듣기 위해 시더빌 밖에 있는 군용 천막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자 곳곳에 보이는 험비들과 수많은 군인들. 나와 후버 국장이 협상을 진행했던 넓은 평야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미 육군의 기지가 되었고 하늘에는 기름을 끝없이 잡아먹는 헬기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로 걸어가자, 군용 천막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한 신병이 우리에게 경례를 붙이며 과하다 싶을 만큼 큰 목소리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형씨, 우리 군인 아니야.”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그리고 노인은 군 출신답게 아직 뽀송뽀송한 신병이 귀여웠는지 천만 안으로 들어가며 장난을 쳤고 신병은 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막 문을 열어 주었다.

뭐, 덕분에 주변 군인들은 우리가 왔다 가는 것을 전부 알게 되었으며 나는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웅성거림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천막 안에는 난방시설이 설치되어 있는지 훈훈한 훈풍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딱 보기 좋을 정도의 밝기를 유지한 전등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자에 앉아 있던 군 장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반겼다.

“이거 참,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대령은 참모진을 대표해 웃는 낯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고 나 또한 자신을 스티브라고 소개한 중년 남성과 악수를 했다.

유난히 돋보이는 계급장 위에 독수리. 곧 준장으로 진급할 예정이라고 하니, 고립되었던 군부대들을 급하게 편제시킨 군 규모에 적절한 지휘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함께할 그들과 한명한명 인사를 나눴고 곧 그들이 준비해 준 의자에 앉았다.

에덴을 대표해 앉은 자리다. 나는 은근히 긴장되어 입술을 조심히 핥았으며 영어가 서툰 용팔이와 두식이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더빌과는 반대로 현지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지, 스티브 대령은 우리가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에덴팀과 연구진을 태울 비행기랑 한국행 전용기가 준비되었다는 연락을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비행기를 띄울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생겨서…….”

“활주로?”

“예, 맞습니다.”

내가 요구한 대로 미국 정부는 급히 항공편을 준비해, 미국에서 한국, 한국에서 미국을 교차하는 비행경로를 급히 마련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진과 격변 탓에 마땅히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과 활주로 없다는 것인데, 그나마 가능한 곳이 알래스카라고 하니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행들을 데려가 알래스카에서 비행기를 띄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우리는 시더빌과 가까운 미국 본토에서 공항을 알아봐야 했지만, 멀쩡한 활주로를 찾아볼 수 없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당장 재건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 대령은 안 좋은 소식만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는지 얼굴이 어두워진 나와 일행들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사실 멀쩡한 활주로를 가진 공항을 하나 발견하기는 했습니다.”

스티브 대령은 그렇게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이륙할 마땅한 공항이 근처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 날, 가뜩이나 부족한 연료를 털어 캘리포니아 인근을 향해 헬기 정찰을 보냈다.

그리고 신이 돕기라도 했는지 정찰 헬기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멀쩡한 활주로를 가진 공항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은 바로 우리가 미국으로 원정을 올 때 사용했던 새크라멘토 국제공항이었다.

정찰로 확인해 본 바로는 폐쇄되어 있을 뿐 시설도 멀쩡하고 비행기가 충분히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도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곳으로 수차례 향했던 지상 정찰팀이 전부 전멸했습니다.”

헬기 정찰로 확인한 표면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공항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투입된 지상 정찰팀은 비명과 후퇴한다는 무전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고 스티브 대령은 그들이 무언가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와 우리는 습격의 범인을 특정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그곳이 놈들에게 점거당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긴장으로 범벅이 되는 천막 안과 걱정으로 주름이 진해지기 시작하는 스티브 대령.

나는 대령이 왜 이토록 이른 시간에 우리 에덴 팀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염치없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Mr 곽.”

활주로와 공항을 보존하기 위해선 폭격도, 미군이 자랑하는 강한 화력도 쏟아 부을 수 없다.

끽해야 개인화기를 소지한 군인들로 그곳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 육군은 이미 수십 명의 군인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항 안쪽에 군인들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변종이 있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대령의 선택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데이터를 받아다 교범으로 삼는 대변종 팀,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어떤 팀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특수부대.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지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새크라멘토 국제공항.]

눈이 살며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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