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2부 94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노도처럼 빠르게 흘러갔던 2일이라는 기간.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시더빌은 총 5번의 크고 작은 침공을 막아내었고 살기 위해 총을 든 주민들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를 땅에 묻거나 불태우는 작업을 힘들게 반복했다.
점점 지쳐 가는 사람들과 이제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미국 본토의 상황.
하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우리 일행들과 시더빌의 주민들은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애써 가슴속에 품고 하루하루 힘들게 이 종말을 버텨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 중심에 서게 된 나는 폭풍전야의 침묵을 천천히 삼키며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딱 맞네요?”
그러자 전신 거울 앞에는 깔끔한 정장을 내 모습과 함께 어깨 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흐뭇하게 웃는 강수련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임무복을 벗고 수염까지 깔끔하게 민 내 모습.
에덴에 있을 때도 이런 치장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 협상 자리가 중요한 자리인 만큼 노파가 특별히 공수해 온 정장을 입고 깨끗한 구두를 신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어색한 몸짓으로 넥타이를 맨 그 순간 흐뭇하게 웃는 강수련을 필두로 우르르 몰려나온 일행들은 소란스럽게 각자의 소감을 말하며 내 긴장을 풀거나 딱딱한 분위기를 순화시켜 주었다.
“………….”
그리고 내가 모든 치장을 끝내고 거울의 반대 방향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내 뒤에 서 있던 일행들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며 이쪽을 나지막이 쳐다보았다.
마치 대가족처럼 끈끈한 유대감의 대형을 이루고 여운이 진하게 남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
그것은 새삼 정장을 입은 나를 향한 뿌듯함의 시선이기도 했고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책임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나는 내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일행들에게 그 누구보다 큰 든든함을 느끼며 정장을 입은 어깨를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폈다.
오늘은 하늘에서 내린 눈이 침공의 흔적을 감추는 눈의 날.
은테 안경과 전화를 하고 정확히 이틀 뒤가 지나고 드디어 미국과 재협상을 하는 날이 온 것이다.
“……가기 전에 동윤이랑 이야기 좀 하마.”
그리고 협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날 때쯤 한쪽에 조용히 기대앉아 얼굴에 살며시 웃음기를 띄우고 있던 노인은 내 방안에 전부 모인 일행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며 협상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강수련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나랑 진한 포옹을 나누며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고 이내 노인과 내가 단둘이 협상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었다.
미국과 재협상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10분.
나와 노인은 준비가 끝나자마자 완전 비상사태에 돌입한 침묵의 도시를 걸으며 정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시 이곳저곳에서는 노인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긴장되냐?”
“그냥 그래요.”
그리고 100m 남짓한 거리를 조용히 걷기 시작한 우리는 어느새 소복하게 쌓은 눈을 꾹꾹 밟으며 별거 없는 잡담을 조용히 나누었다.
하지만 씁쓸한 얼굴로 담배를 문 노인은 협상장까지 혼자 걸어갈 내가 아직도 걱정되었는지 놓친 것은 없냐, 혹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도망치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고 협상장까지 따라올 기세로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 꼬장꼬장한 잔소리조차 즐거운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출근하는 회사원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눈이 쌓인 도로를 밟았다.
소음 한 점 없는 조용한 도시와 저 멀리 태양을 등지고 있는 거대한 정문.
그리고 우리가 장벽 지척에 도달하자 정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덜컹-! 끼이이이이.
시더빌의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눈앞에는 새하얀 눈이 쌓인 평야가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는 저절로 감성을 불러일으킬 지평선과 신념이라는 돛을 밀어내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고 곧 노인에게 내가 가진 무기와 장비를 전부 넘기며 맨몸으로 협상장으로 이동할 준비를 맞췄다.
이상하게 떨리지 않는 심장과 든든한 어깨.
분명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따뜻함으로 휩싸인 내 몸은 굳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 사이 아무도 밟지 못한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노인은 천천히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동윤아, 네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 했을 거다.”
그리고 그 읊조림을 들은 나는 속으로 대답을 삼키며 천천히 시더빌에서 멀어졌다.
* * *
사태가 터지고 바로 다음 날, 에덴과 한국 정부에 다급한 연락을 보낸 미국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저자세를 유지하며 나와의 재협상을 강하게 부탁해 왔다.
물론 에덴과 한국 정부는 나에게 선택권과 구체적인 협상 내용을 일임하면서도 자신들이 챙길 수 있는 이득을 전부 챙겼고 미국 정부는 유례가 없었던 전폭적인 지원까지 약속까지 이 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저번처럼 오만한 자세를 취하고 내 일행들을 모욕한다면, 협상이고 뭐고 한번은 무르려고 했던 나는 미국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만족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모든 조건이 오가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된 협상의 날이 밝았다.
뽀드득, 뽀드득.
시더빌 앞쪽에 위치한 넓은 평야에는 하얀색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가 호위 없이 비무장 상태로 만나자는 약속은 유효했는지 내가 인지해 낼 수 있는 반경에는 아무런 위험신호가 느껴지지 않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저격이나 폭격도 육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변종의 본능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뽀드득 밟히는 눈을 해치며 하얀색 테이블로 다가가자, 나처럼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노년의 남성과 한 중년의 여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에게 공손한 인사를 보내왔다.
내 요구대로 비무장 상태에 방탄복조차 걸치지 않은 그들.
나는 망설임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협상 자리에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Mr. 곽.”
그리고 내가 악수를 청하자 노년의 남성은 양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애절한 호소가 담긴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했다.
그래, 이 노년 남성의 말대로 이전 협상 자리에는 여러 불편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일행과 에덴을 위해 그들에게 들었던 조롱과 울분을 감내했고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미국은 FBI 국장을 직접 협상 자리로 보내 나에 대한 예우와 사죄를 직접 전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 자리에는 국장 혼자가 아닌, TV에서 한번 본 기억이 있는 중년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오시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 말씀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
누군가 했더니 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설마 위험한 자리에 이런 거물을 보내 줄은 몰랐던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미 FBI 국장이 행차한 마당에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이 편해진 나는 그녀가 대통령을 대신해 전하는 사죄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했고 곧 의자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치우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언덕 하나 없이 드넓은 눈밭에 홀로 존재하는 협상 테이블.
테이블 위로는 함박눈이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전담팀은 유지 중입니까?”
분명 FBI 국장의 이름은 후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름은 린다라고 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까 나눴던 자기소개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가벼운 화두를 시작으로 협상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탈리가 기억나 물었던 내 의도와는 다르게 후버 국장은 이 물음만을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에 묵직한 양손을 쿵 올려 두었고 강한 어조와 또렷한 목소리로 궁금하지도 않은 헬레나와 위슬리 요원의 근황을 설명해 주었다.
“책임자를 해임했고 전담팀도 해체되었습니다! 헬레나 팀장은 지금 안전 가옥에 구금 중이고 위슬리와 CIA의 국장은 내란 혐의로 수배 중입니다. 그들의 뜻이 미국 백악관과 우리 법무부 전부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으로선 협상을 개판 낸 그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내 뭉개진 자존심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였을 것이다.
하지만 위슬리인지 개슬리인지가 접시에 코 박아 뒤지던 놈들에게 찢겨 죽던 관심이 없었던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탈리 요원에 근황을 물으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본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김이 묻어 나오는 숨을 조용히 내뱉은 나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협상을 시작한 진짜 이유와 근본적인 의문을 그들에게 물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주와 이번 사태가 연관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고 숨기는 것 없이 린다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던 헬레나와는 분명히 다른 대답이었다.
그래, 당연히 그럴 줄 알았고 이미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을 미국 정부의 입에서 그 확신을 들으니 근거와 증거가 없었던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질문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담배를 문 나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쓴 내와 야속하리만큼 밝은 햇살을 느끼며 후버 국장과 린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교주가 이 사태를 일으킬…….”
“위치와 방법은 특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나는 분명 후버와 린다를 향해 방아쇠(trigger)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교주와 이 격변의 분명한 연관성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역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사태를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눠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과거부터 정체불명의 행적을 남겨 왔던 교주와 이번 사태의 연관성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을 대략 적으로 전해 들은 나의 표정이 생각보다 좋지 않자, 피곤함과 어딘가 초조함이 느껴지는 한숨을 푹 내쉰 후버 국장과 린다는 나에게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숨길 것도, 더는 감출 것도 없습니다. Mr. 곽 제발, 도와주십시오. 군부에서는 본토에 전술핵을 사용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정말로 이대로 가면 저희는 자멸뿐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주라는 작자가 정말 이 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trigger)를 가지고 있다면 전 세계도, 아니 한국과 아이들의 보금자리인 에덴도 놈들로부터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은 한순간 터진 격변과 쏟아져 나오는 놈들로 인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미국은 지금 모든 전선을 압박받고 있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교주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절박했다.
그래, 결국 이들과의 협력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답안인 것이다.
그리고 아파지는 미간에서 천천히 힘을 뺀 나는 후버와 린다를 향해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밀고 당기고 괜히 시간을 소비하는 감정싸움 따위는 하기 싫었다.
하지만 협력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약속받아야 할 조건이 있었다.
그것도 나중에 딴소리할 수 없도록 협력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을 말이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마른침을 삼킨 후버 국장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대통령을 대신해 이 자리에 나온 린다는 어떤 조건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며 내 말에 경청했다.
그러자 말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나는 전날 밤 읽고 또 정리했던 조건을 천천히 읊었다.
“지금 협상을 끝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준비해 주십시오. 에덴 원정팀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전용기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캠프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군부대를 이탈한 군인들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군인의 본분을 알고 있으신 분들이니 본인 선택 하에 전역과 복무를 결정하게 해주시고 앞으로 아무런 불이익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물론 시더빌의 주민들도요.”
“이해했습니다.”
조건의 요구와 수용은 막힘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일행들의 귀국부터 자잘한 개인의 조건까지 막힘없이 수용해 주는 린다와 후버 국장.
나는 생각보다 수월한 협상 분위기에 속으로 놀라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급한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10분가량의 별문제 없는 핑퐁이 이어지고 나는 바싹 마른 입을 침으로 적시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젯밤 정리하고 암기했던 내용은 전부 말했다. 아니, 제일 중요한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이틀 전 밤 은테 안경과 은밀하게 나눴던 대화 내용을 기억하며 민감할 수도 있는 마지막 요구를 말했다.
“에덴팀과 한국 연구진을 미국으로 불러주십시오.”
그 어떤 베테랑 군인보다 뛰어나고 우수한 화기와 장비를 소지한 무장 단체를 자국으로 입국시킨다.
그것이 미국으로선 얼마나 껄끄러운 것인지 알기에 내 요구는 조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후버 국장과 린다는 의외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귓속말을 속삭일 뿐 딱히 불쾌한 감정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속이 타는 초조한 시간이 흘러 드디어 속삭임을 끝낸 린다는 어딘가로 연락을 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모든 작전을 같이 진행하고 정보도 공유하겠습니다.”
완벽하다. 정말 이렇게 완벽하게 끝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지고 올 것을 다 가지고 왔다.
하지만 후버 국장과 린다도 협상을 무사히 맞췄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지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나에게 흔쾌히 악수를 내밀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하던 눈은 거짓말처럼 그쳤고 먹구름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햇볕이 눈이 쌓인 평원을 지나 맞잡은 손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후버 국장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미국 원정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