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부 93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날씨 한번 좋네.”
“그러게요.”
오후가 되자 눈이 그쳤다.
그러자 먹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고 세상은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공존하는 묘한 포근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나는 노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을 시야에 가득 담으며 새벽에 있었던 악몽을 잠깐이나마 털어 내 보았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심리적 여유로움. 하지만 뒷좌석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여운도 잠시일 뿐, 나는 뛰는 것보다 느린 오토바이를 불만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노인에게 물었다.
“더 빨리 못 가요?”
“조금만 참아, 엔진이 맛 가기 직전이니까.”
가장 먼저 산토끼를 잡아 허기를 채운 내가 떠밀려 왔던 계곡 반대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강물에 휩쓸려 멀리도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캘리포니아 지역을 꽁지가 빠지라 뛰어다닌 경험 덕분인지 시더빌로 돌아가는 국도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 가며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잡으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 보이는 봉화는 걸음을 옮기는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곳에는 오토바이를 수리하고 있는 노인과 바닥에 퍼질러 자는 용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무전기가 고장 난 것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는지 내가 이쪽으로 올 수 있도록 봉화를 피운 노인과 용팔이.
그리고 운 좋게 하늘 높이 떠오른 봉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나는 집으로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일행들과 동행할 수 있었다.
털 털 털 털 털.
하지만 문제는 내가 도착할 때쯤 용팔이는 이미 나처럼 오토바이를 분실한 상태였고 노인의 오토바이도 고장이 나기 직전이었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한 주행과 처음부터 좋지 못한 오토바이 상태 때문인 것 같은데, 아무리 손을 써도 고칠 수 없었던 노인의 오토바이는 결국 경운기와 흡사한 소리를 내며 뛰는 것만 못하는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노인은 어쩔 수 없이 달구지를 끄는 마음으로 나를 오토바이에 태웠으며 지금처럼 느긋한 행군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뻘쭘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그 순간 저 멀리서 낡은 자전거를 탄 용팔이가 우리 근처를 뱅글뱅글 돌며 물었다.
“놈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고장이 난 오토바이의 속도가 형편없기는 했지만, 그 속도가 사람이 도보로 따라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꼼짝없이 걸어 올 팔자였던 용팔이는 근처 버려진 농가에서 다행히 낡은 자전거 하나를 구할 수 있었고 지금처럼 신이 난 얼굴로 열심히 우린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즐기고 있는 여유와는 반대로 갑자기 국유림에서 모습을 감춘 블랙 라인의 목적지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나와 노인을 향해 물어 왔다.
하지만 무심한 얼굴로 조심조심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노인은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따라오는 용팔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북쪽으로 가는 걸 마지막으로 확인했어. 그리고 그쪽으로 가면 아마……, 캐나다 쪽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로선 미안하게 된 거지, 뭐.”
노인은 미친 듯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놈들의 움직임을 전부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시더빌이 있는 동쪽이 아닌, 캐나다 국경과 근접한 북쪽으로 이동한 블랙 라인.
노인의 말대로 캐나다 국경 수비대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안심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노인의 말에 다시 얼굴이 밝아진 용팔이는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벌판에서 자전거를 끌며 잠깐의 휴식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끔찍한 악몽 뒤에 오는 잠깐의 평화. 나는 노인에게 담배를 받아 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왔다!! 에덴 팀이 왔어요!!”
우리가 시더빌로 접근하자, 장벽에서 망을 보고 있던 한 초병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손을 흔드는 우리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큰소리로 외치며 장벽을 뛰어다녔고 피곤한 기색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주민들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을 향해 다가오는 우리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참 요란하면서도 정이 느껴지는 환영식. 나와 노인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오토바이에서 내렸고 용팔이는 부끄러움이 섞인 헛기침하며 자전거를 주차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인이 시더빌 부근을 보며 읊조렸다.
“그래도 잘 버텨 준 모양이네.”
내 예상대로 우리가 유인하지 못한 나머지 잔존 라인이 시더빌을 습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파를 필두로 모인 시더빌의 생존자들은 우리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 공격을 무사히 막아내었고 사방에 널린 놈들의 시체를 불태우며 또 다음 침공을 대비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불타고 있는 시체들과 포탄 구덩이만을 봐도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
나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주민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문 안으로 들어온 그 순간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장벽으로 전부 모인 주민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와아아아-!!!!!!!!!!
장벽에서, 혹은 창문 밖에서 고개를 내민 주민의 얼굴에는 고생한 기운이 역력하다.
하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장벽에 붙어 자신의 둥지를 지켜내고 있는 그 모습은 내가 봤던 그 어떤 무리보다 더 인간다웠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리고 주민들은 블랙 라인을 유인해 준 우리에게 기꺼이 영웅 대접을 해주고 싶었는지, 추운 겨울 속에서도 봉우리를 핀 야생 들꽃과 환호성을 던져 주며 시더빌로 돌아온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인지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꽃을 받아 든 우리는 상기 된 얼굴로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저 앞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 - - - - -!!”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인파를 헤치고 나온 채연이는 몸을 날리다시피 날아와 내 품에 안겼고 나는 그런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채연이는 다른 주민과 일행들처럼 장벽에 서서 놈들과 싸웠는지 얼굴에서 진한 화약 냄새가 났고 옷에는 검은 재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곽동윤과 똑 닮은 기운을 발견한 나는 정말 기쁘게 웃으며 무거워진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고 이것이 나만이 투쟁이 아닌, 모두의 투쟁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채연이를 안아 올리자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함께 주민들의 앞에선 노파의 일가와 일행들이 허겁지겁 모여들었다.
“- - - - - - -.”
수척한 얼굴과 엉겨 붙은 머리, 옷에는 더러운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전해지는 진한 유대감은 모든 것을 보호하고 감싸는 울타리를 만들며 ‘우리’를 만들었고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훈장을 심장에 달아 주었다.
안도의 눈물을 훔치는 누군가. 혹은 기쁨의 웃음을 지어 보이는 누군가. 그들을 통해 여실히 느껴지는 감정의 폭풍은 완전히 죽어 있던 내 감각을 어루만지며 얼굴에 웃음이 맺히게 했다.
그리고 채연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간 나는 어느새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주민들과 일행들을 매번 했던 작은 한마디를 조용히 읊조렸다.
“다녀왔습니다.”
머나먼 타국에도 우리의 에덴이 생겼다.
* * *
“용팔이.”
“…끄흑.”
“할아부지.”
“잘 지냈어?”
“동윤이 헝.”
“하하…….”
괜한 걱정이 들어 우리를 알아보겠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
하지만 두식이는 별다른 동요 없이 용팔이와 노인,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하나하나 자신만의 호칭을 말했고 그 순간 용팔이는 끄흑 울음을 터트리며 두식이에게 고목처럼 매달렸다.
두식이가 강원도 전선으로 떠나고 정말 오랜만에 뭉친 4명의 에덴 팀.
곰처럼 순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두식이는 못 본 사이에 더 커져 있었고 강원도 전선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거대한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변종의 감각마저 툭툭 건들며 그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최고의 전력을 보내 주겠다고 말한 강 형사의 약속은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다.
“이거.”
그리고 오는 과정이 아주 힘들었는지 반나절이 넘도록 잠들어 있었던 두식이는 우리와 가벼운 회포를 풀자마자 챙겨 온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선물을 나눠주었다.
서울에서 각자 개인이 즐겨 사용하던 장비들부터 미국에서는 찾아내기 힘든 기호 식품까지, 선물의 종류는 정말 다양했고 일행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 선물 중에는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위성 전화기가 있었는데, 나의 투덜거림을 기억하던 강 형사가 회사에 직접 주문해서 보내 준 모양이다.
그러나 두식이는 건네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얼굴로 전화기와 나를 동시에 가리켰고 이내 기다리고 있을 상대편과 통화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동윤아, 먼저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와.”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같은 두식이의 행동을 재빨리 눈치 챈 노인은 형제끼리 회포를 풀고 있는 용팔이와 두식이의 어깨를 감싸며 시끌벅적한 거리를 가리켰다.
놈들의 공격이 완전히 끝나자, 우리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작은 축제.
그곳에는 물론 우리의 자리도 있었고 사람들은 술잔을 든 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축제 자리로 가기 전에 두식이가 건네준 위성 전화기에 잠시 볼일이 생겼고 용팔이 형제를 데리고 나가는 노인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테라스로 걸어가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든 나는 서둘러 전원 버튼을 눌러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통화 기록을 찾아 부지런히 버튼을 눌렀고 이내 딱 한 개만이 존재하는 전화번호를 찾을 수가 있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주민들의 웃음소리와 어느덧 자욱하게 내려앉은 어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테리스 의자에 털썩 앉았고 곧 통화 버튼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조용히 이어지는 수신음,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단체장님. 도청할 수 없는 회선을 찾느라 늦었습니다.]
위성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강 형사도 박대박도 아닌,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은테 안경의 목소리였다.
지구 반대편은 아직 이른 새벽인지 잔뜩 잠겨 있는 은테 안경의 목소리.
하지만 그는 내가 전화가 올 것을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번거롭게 심부름을 해서까지 전화기를 넘긴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내 몸 상태와 일행들의 상태를 일일이 하나하나 보고를 받은 은테 안경은 헛기침과 함께 잠시 뜸을 들이다,
내가 궁금해 하고 있을 세계정세를 하나둘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미국 서부 전선은 중부까지 밀렸습니다. 뉴욕은 반절이 날아갔고 애리조나 쪽은 사실상 괴멸 상태죠.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술핵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니……, 아마 짐작이 가능하시리라 믿습니다.]
“…아시아는 어떻습니까? 한국은 무사합니까?”
[저희는 초기 진압에 성공해서 큰 피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 측에선 연락이 아예 끊겼고 일본은 국토 반절이 물에 잠겼어요.]
이번 격변으로 들썩인 건 샌앤드리어스 단층만이 아니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지진은 지진대에 있는 나라를 괴멸시켰으며 동시 다발적으로 생긴 구덩이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그간 벌였던 것이 종말과 인간의 전쟁이었다면, 지금은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이곳에서 인간이 밀린다면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들일 곳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더 처참한 세계정세 앞에 어쩔 수 없이 담배를 꼬나물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진짜 본론은 세계정세가 아닌, 새로운 위성 전화기를 나에게 가져다주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있었다.
[미국이 재협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론이 터지기 직전이에요.]
“많이 늦었네요.”
[예, 치명적인 실수였죠.]
그들은 교주를 잡지 못했고 협력하겠다고 나선 나를 조롱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 국토 절반의 상실과 쑥대밭이 된 전 세계. 그것은 한낱 개인이 판단했다고 하기에는 용서할 수 없는 큰 원죄였으며 돌이키지 못할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손 놓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남아 있었기에 미국과 유리한 위치에서 재협상을 할 수 있게 된 나는 답답한 담배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그러자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은테 안경이 활활 타고 있는 속에 냉수를 들이부으며 나에게 말했다.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단체장님이 원하시는 걸 모두 요구해도 미국은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다만 거기에 저희 에덴 팀과 한국 연구팀의 파견도 추가해 주세요.]
그래, 이것이 은테 안경이 말하고 싶었던 본론이었을 것이다.
현재 종말 사태에 대한 원인이든 경과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미국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그들을 이용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덴 팀과 그간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린 한국 연구팀의 파견은 불가피한 상황.
그리고 그동안 고통 받고 고생한 것을 협상 테이블의 주도권이라는 것으로 보상받은 나는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밤하늘에 별은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