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95화 (295/313)

# 295

2부 9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팀장님! 빨리 대피하셔야 합니다!”

전담팀이 사용하던 사무실은 근방을 덮친 지진으로 인해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지 오래였다.

그리고 대지진의 여파로 사방에 쓰러져 있는 사무 가구들과 서류들은 급하게 이곳을 빠져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으며 밖에서는 이쪽을 향해 몰려드는 놈들을 막고 있는 군인들의 처절한 비명과 총소리가 여실히 들려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계를 아우르는 위세를 떨치던 특수 전담팀의 모습답지 않게 초라한 모습.

그리고 그 공간 한가운데에는 쑥대밭이 된 사무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헬레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 - - - - -.”

자신의 부하가 빨리 대피해야 한다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꿈쩍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는 헬레나.

그녀의 시선은 쑥대밭으로 변한 사무실의 고정이 돼 있었고 머리와 얼굴은 수척하다 못해 꼭 죽어 버린 송장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 상태였고 자신이 불과 일주일 전에 범한 실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격변이 올 것이라고, 자신과 협력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던 남자의 말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해 버렸던 헬레나와 위슬리의 오만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은 결국 미국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전담팀의 사무실마저 대피를 가야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늦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모두의 미래를 말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를 맴돌자 정처 없이 떠도는 눈과 시선은 현실 앞에 부끄러워 그만 감기고 말았다.

그래, 거짓이 아닌 진짜였다. 아무런 가식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도구도 아닌 정말 미래를 걱정하는 남자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외면했으며 위슬리는 심지어 그를 조롱했다.

남자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을까, 그리고 이 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욕심? 지금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프라이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부르르 떨리는 피부의 감촉은 분명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멈춰! 당신들 누구……!”

“조용히 하지.”

그리고 헬레나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허공만을 바라보자, 유일하게 옆에 남아 준 직속 부하가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덜컹 소리를 내며 열린 문에서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성들이 안쪽으로 몰려들었고 깜짝 놀란 부하는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권총을 뽑아 들려고 했다.

하지만 선두에 서서 걸어오던 중년 남성은 보란 듯이 같은 소속임을 알리는 수첩 배지를 보이며 말을 더듬는 부하를 지나쳐 걸어갔고 이내 의자에 앉아 넋을 놓은 헬레나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르르 몰려온 그들에게서 분명히 느껴지는 묘한 적대감과 불신의 기운.

헬레나와 눈을 마주친 중년 남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주 화려하게 해줬어, 헬레나. 덕분에 이 꼴이 났군.”

“……….”

전담팀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그와의 협상도 자신이 주도했고 협상의 결렬도 자신이 판단했다.

하지만 그 폭탄의 도화선을 결코, 자신이 불을 붙여서는 안 되는 거대한 것이었으며 중년 남성의 말대로 결국 이 꼴이 났다.

밖에서 들려오는 군인들의 교전 소리와 놈들이 내뱉는 비명이 허망함과 맞물려 그녀의 정신을 괴롭혔다.

그리고 자신을 잡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보자 그녀는 그제야 스스로가 되돌아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헬레나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변명했다.

“저, 저는 모두를 위해서…….”

“자네를 위해서였겠지.”

신의, 용기, 그리고 진실(Fidelity, Bravery, and Integrit).

그녀가 처음 FBI에 들어왔을 때 가슴에 새겼던 이 한 문장은 더러운 현실에 찌들어 이미 마모된 지 오래였다.

끝없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이 하는 행동이 최선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위해 한 일이 모두를 위해 한 일이라 착각했을 때.

그리고 정의(正義)가 자신이 세운 정의(定義)로 변질하였을 때부터가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다시는 이 자리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 봐도 좋았다.

서서히 끼기 시작하는 먹구름처럼 어두워지는 사무실 내부, 그곳에는 후회하는 자만이 남았다.

*       *       *

“- - -우욱!”

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속이 쓰리다 못해 헐었다.

나는 가까스로 비틀비틀 물에서 빠져 나와 계곡의 바위를 손으로 짚었고 그대로 물이 섞인 구토를 내뱉으며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물에 떠밀려 쓸려 오기만을 2시간이다. 나는 정말 지치지도 않고 따라오는 놈들 때문에 함부로 뭍으로 나올 수가 없었지만, 그날따라 유속이 빠르던 강물은 나를 압박함과 동시에 미친 듯이 몰려오는 블랙 라인을 피해 국유림을 떠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전날 끼었던 먹구름은 전부 사라진 상태였고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낸 아침 해만이 저 산맥에 걸친 채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아야…….”

아마 인간의 몸이었다면 진즉에 죽지 않았을까 싶었다.

강한 유속에 쓸려 나가고 긁히느라 몸 이것 저곳에 생긴 깊은 자상과 타박상.

팔다리는 뼈가 한번 부러졌다 붙었는지 격한 고통이 몰려왔고 지치지 않는다고 생각한 변종의 몸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몸 상태를 점검하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펴보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놈들과 변종을 찾았고 이제는 버릇이 된 감각의 그물망을 펼치며 저 멀리까지 놈들을 수색했다.

그러나 한참의 수색 끝에도 잡히는 기척은 작은 동물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후우, 후우…….”

트리니티 강에 떠밀려 참 멀리도 온 모양이다.

나는 일단 주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널브러져 누웠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훅 내뱉으며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저 멀리 숲속에서는 아이의 속삭임 같은 새 지저귐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먹구름이 물러난 하늘에서는 아침 햇살이 내려와 젖은 내 몸과 정신을 천천히 말려 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몰려오는 성취감과 안도감은 잔뜩 긴장되어 있던 근육과 정신을 풀어지게 했으며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함박눈처럼 시원한 웃음을 머금었다.

기쁘다. 그저 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 지옥을 뚫고 살아남아 다시 내 가족과 일행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꼬르륵.

그리고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변종의 몸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온몸에 생긴 부상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몸은 많은 칼로리를 소모했는지 복부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굶주림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왔고 누워 있던 나는 그 신호에 착실하게 반응하며 배를 움켜잡았다.

인간의 욕구 중 하나인 식욕. 매일 이상과 신념만을 좇아 달려갔더니 이런 원초적인 반응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듯 단순한 생각은 온몸이 녹초가 되어 널브러져 있던 나를 움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 -.”

용팔이 녀석, 괜히 마지막에 김치찌개 이야기를 해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한다.

몰려오는 허기에 입맛을 다신 나는 바위에 조용히 쪼그려 앉아 몸이 전부 회복됐음을 확인했고 이내 유일하게 챙겨 온 대검과 무전기를 홀더에서 꺼내 들었다.

강에 쓸려 가는 와중에도 주인을 잊지 않았는지 내 분신처럼 붙어 있는 날카로운 대검과 무전기.

하지만 무사한 대검과는 다르게 물을 먹은 무전기는 먹통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낭패를 느낀 나는 연신 무전기를 치며 작동되라고 빌어 보았지만, 죽을 뻔한 주인의 뒤를 잘못 따라간 무전기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방수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쳰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꼬르륵.

하지만 원망과는 별개로 내 복부는 계속해서 허기를 호소하며 주인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좋으니 제발 좀 먹자고, 이대로 걷다가는 너도 쓰러진다고 협박하는 위장.

나는 쪼그려 앉아 무전기를 살피면서도 시선은 어느덧 저 멀리 보이는 숲속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산토끼의 기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났는데도 겨울 전 과식이라도 했는지 살이 포동포동 찐 산토끼.

나는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다고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고장 난 무전기 대신 대검을 손에 쥐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시더빌로 떠나기 전에 고픈 배부터 채워야겠다.

*       *       *

“왼쪽에 한 번 더 갈겨!”

[ROGER, ROGER!]

장벽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올리버 중사는 저 멀리서 아직 처리되지 않은 놈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대로 무전을 쳤다.

그러자 무전 반대편에서는 힘찬 목소리와 함께 퐁! 하는 박격포의 발사음이 터져 나왔고 무리를 이루던 놈들을 고폭탄에 그대로 직격당해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다리가 없어져 바닥을 기는 놈들을 마지막까지 처리한 올리버 중사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뱉으며 장벽에 기대앉았다.

지금 시각은 새벽이 지나가고 햇볕이 무르익는 아침. 밤사이 공격해 오던 놈들은 방금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상황 종료.”

그리고 소총의 조정간을 안전으로 바꾼 올리버 중사는 땀으로 젖은 모자를 벗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무전기를 통해 놈들의 공격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자 정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주민들이 운전하는 트랙터 두 대가 움직이며 시더빌 근처에 산처럼 쌓인 놈들의 시체를 굴삭 장비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무려 12차례나 공격해 온 놈들.

곽동윤과 그 일행이 본 라인을 유인해 줘서 이 모양이지 잘못하면 정문이 뚫려 그대로 함락당할 뻔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탄약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인지 장벽 안에서는 주민들이 황급히 탄피를 수거하며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식사하고 하세요!”

그리고 교전이 끝나고 민병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 순간, 건물 안에서 총소리가 그치기만을 기다린 주민들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들을 한 아름 안은 채 우르르 빠져 나왔고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벽을 향해 바삐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올리버 중사와 캠프 군인들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에는 등에 소총을 짊어진 강수련이 직접 먹을 것을 챙겨 왔다. 기

껏해야 직접 만든 밀 빵과 따뜻한 옥수수 수프가 다였지만, 올리버 중사와 어느새 이쪽으로 온 군인들을 반색하며 먹을 것이 담긴 바구니를 받아 냈다.

그리고 사람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입속에 밀어 넣는 동안 소총을 쥔 채 장벽 밖을 바라보던 강수련은 피곤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올리버 중사에게 물었다.

“……아직 소식 없죠?”

시더빌이 무사하다는 것은 곽동윤과 그 일행들이 유인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임무의 성공과는 별개로 그들의 생사는 아침이 온 지금까지 알 길이 없었다.

성공했을 거라고 무조건 살아 있을 거라 맹신하고는 있지만, 사람 마음이 또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갈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 때문인지 강수련과 채연이는 지금처럼 바삐 몸을 움직이며 잠시라도 걱정을 잊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씁쓸한 얼굴로 무전기를 내려다본 올리버 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3시간 전부터 켜 놓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도 부인은 아시잖아요? 분명 무사하실 거에요.”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보란 듯이 일어나고,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당당히 끝마치던 3명의 에덴팀.

그들이 타국에서 이룬 행적을 그대로 뒤따라왔던 올리버 중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들은 무사할 거라는 확신을 했고 대답을 들은 강수련도 얼굴에 애써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총을 살며시 어루만진 그녀는 저 멀리서 연주황색으로 빛나고 있는 아침의 햇살을 조용히 마주하며 그곳에서 빨리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조용히 빌었다.

하지만 아픈 마음과는 별개로 강수련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식사하시고 잠시 눈 좀 붙이세요. 저는 잠시 채연이한테…….”

“네, 여기는 맡기세요.”

이제는 한 명의 생존자가 된 채연이도 저 오른쪽 장벽에서 시더빌 방어에 한몫 보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가보기 위해 힘없이 짐을 추린 강수련은 조용히 웃으며 소총을 둘러맸고 올리버 중사는 일부로 힘찬 제스처를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1시간만 더 지나면 해가 중천으로 향할 점심. 먼 길을 떠난 3명의 에덴팀이 돌아오기 전까지 시더빌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올리버 중사의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리며 다급한 메리제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올리버 중사! 빨리 이쪽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Sir? 중위님, 무슨 일 생겼습니까?”

[일단 놈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299번 국도에서 트럭 한 대가 접근 중입니다!]

“예? 혹시?”

[아니요! 아니에요! 스코프로 확인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동양인 남성입니다! 거기다 서쪽이 아니라 네바다 경계 쪽에서 달려오고 있어요!]

에덴 팀이 향한 곳은 서쪽 299번 국도다.

하지만 299번 국도는 시더빌을 지나 분명 네바다 경계로 향하는 국도였고 그쪽에서 트럭이 달려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에덴팀도 아니고 광신도 놈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뜬금없이 나타난 동양인 남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 순간 채연이를 향해 가려는 강수련의 걸음이 우뚝 멈췄고 무전기에서는 메리제인의 긴장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덩치가 엄청나게 커요. 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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