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2부 89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캘리포니아를 동북부를 강타한 것은 저 멀리서 오는 지진이었다.
하지만 그 지진은 얇은 단층이 아닌 모든 대지를 뒤집는 것 같은 격정의 파도였고 잠들어 있던 시더빌을 한순간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격변이 오기 전 설치해 둔 사이렌은 분명 효과가 있었는지 주민들은 지진이 도시를 강타하기 전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민병대의 지휘를 받아 공터로 우르르 몰려나온 주민들은 사방에서 느껴지는 지진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마치 한 개의 구처럼 모여들었고 이 위험이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나와 일행들은 땅이 울리고 온몸이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 빠져 나왔어요?!”
“흩어져서 확인 중이야!”
캘리포니아 서부에서 시작된 지진은 동북부의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규모만큼은 우습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혹시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한 주민들이 있을까 도시를 동분서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가상한 노력에 하늘도 응답해 줬는지 대부분 주민이 공터로 빠져 나왔을 때쯤 드디어 메인 쇼크가 대지를 강타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흔들리는 건물들.
유일한 고층 건물인 대형 마트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무너졌고 저층 건물도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공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선두에 선 나는 채연이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쿠르르르릉-!!!
바다 위 일렁이는 검은색 파도처럼 흔들리는 숲과 격변의 냄새를 맡았는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짐승들.
어둠 속에선 불길한 징조를 대변하는 새들이 하늘 높이 떠올랐고 내 피는 끓어오르다 못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또다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고 2차 격변 때 겪었던 두려움을 떠올리고 있는 채연이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두려움의 공간. 공포는 형상화되어 주변을 안개처럼 일렁인다. 나는 이 지진이 1초라도 더 빨리 끝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억겁과 같은 5분이 지나자, 진동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일렁이던 숲은 제자리를 찾았다.
“영감님!”
하지만 인간의 존망을 위협할 본편은 지금부터였다.
나는 지진이 끝나자마자 미세하게 떨고 있는 채연이의 머리 위로 입을 맞추며 각오를 다시 한번 새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규하듯 노인을 부르자 노인과 용팔이가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장비를 챙겨 달려왔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캠프 군인들과 노파의 일가도 뒤뚱뒤뚱 나를 향해 다가왔다.
시시각각 본능을 자극하는 위험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 급박한 상황.
나는 짜릿하게 저리는 허벅지를 강하게 내려치며 용팔이가 내미는 장비를 하나하나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쳰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모든 대원 소집해서 장벽으로 가세요! 놈들이 몰려와도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준비해 두셔야 합니다! 여기가 뚫리는 순간 주민들은 몰살인 거 명심하세요!”
“예!”
“영감님, 시더빌에 있는 것 중 가장 빠른 차량이요!”
“오토바이! 오토바이가 몇 대 있어!”
“연료 가득 채워서 준비시켜 주세요!”
한시가 급하다. 지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몰려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에 우리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내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여러 차례 몰려오는 여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장벽을 수비할 대원들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무기를 챙기고 정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도시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추켜드는 횃불과 사람들의 정신없는 비명.
그리고 그 아비규환에 한가운데에서 이를 악문 나는 대원들이 서둘러 가져다준 탄창을 챙기며 대검 날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 - -후우 - - 후우.”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냉정해야 하지만 기어코 찾아온 위기 앞에 정신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대검 날을 조용히 훑고 지나가는 별 하늘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기적으로 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움직여야 했다. 살기 위해선 또 살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그대로 대검을 허벅지에 챙기고 오토바이가 준비되었다는 노인의 말에 건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또 위험한 사지로 걸어가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넋을 놓고 상황을 지켜보던 채연이가 내 바지를 붙잡는다.
“- - - - - - - -.”
매번 해야만 하는 슬픈 이별이었다.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또 만날 수 있을지 약속할 수 없는 기다림 없는 이별.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이 순간은 언제나 내 마음을 찢어 놓는 슬픈 과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슬픔과는 별개로 찾아오는 감정의 충만함은 내가 인간인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위험한 순간에 언제나 나의 삶을 구원해 주는 미련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 채연이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 마치 경건한 의식을 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찰나가 허락한 시간은 겨우 3초였다.
마음속에 초시계가 경각에 달하고 나는 눈가 위에 내려앉은 미련을 털어 내었다.
“동윤아!”
그리고 채연이가 내 품에서 조용히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 노인과 용팔이가 뛰쳐나갔던 골목에서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노인이 다급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크게 들이켜지는 숨과 아직도 남아 있는 아이의 온기가 손끝에서 서서히 사라졌고 나는 멀어져 가는 채연이와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며 오토바이를 끌고 온 노인을 향해 있는 힘껏 발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을 둥둥 울리는 여진과 서서히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불어오는 속삭임이 시나브로 옮겨온다.
심장이 뛴다.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 * *
“2차 격변 때와 비슷합니까?”
“더 클 겁니다.”
나는 노인이 건네주는 오토바이 헬멧을 꾹 눌러쓰며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쳰에게 대답해 주었다.
나름 안전지대라고 불렸던 캘리포니아가 한순간 무정부 지역이 되어 버리게 만든 주된 원인인 2차 격변.
물론 그 격변을 온몸으로 맞아 봤을 주민들은 그 무서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착실하게 방어를 준비하는 이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몰려오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려하는 쳰에게 비정한 현실만을 말하며 착실하게 준비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라 말했다.
메인 쇼크가 시더빌을 덮치고 정확히 30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지진 뒤에 올 진짜 위협을 막기 위해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 - - - -부르릉 - !
“이,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저희랑 방어하는 방법도…….”
격변과 함께 찾아오는 지진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면, 그 뒤에 닥쳐올 블랙 라인은 인간이 가진 문명을 전부 지워 버린다.
그 강력한 미군이 왜 캘리포니아에서 철수하고 네바다 경계에서 장벽을 세웠겠는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놈들의 행렬과 어쩌다 볼 수 있는 변종의 검은색 떼는 그만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미 정부가 본토에 핵 발사를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큼 진정한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인외의 광경.
전문가들이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입 아프게 말한 그 재해가 오늘 새벽 다시 한번 찾아온 것이다.
“쳰씨.”
그리고 나와 일행은 곧 시더빌을 덮쳐 올 블랙 라인을 유인하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 앉았다.
그래, 어쩌면 저 말대로 이번만큼은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절대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버둥은 이곳을 향해 몰려올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뿐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더글러스 시티를 덮쳤던 놈들을 유인했듯……. 내 아이와 일행들이 있는 시더빌이 안전할 수 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쳰에게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바닥에서 발을 뗐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우리에게만 닥친 재해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도움을 구할 곳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지금은 외면하는 것이 아닌 직시해야 할 때. 그저 우리가 가진 힘으로, 그래도 있다고 믿는 희망을 통해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런 미사여구가 없는 말을 끝낸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시더빌의 정문이 열리며 나와 일행들은 태운 오토바이 3대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문 너머가 지옥이었다. 달리는 길이 사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액셀을 밟으며 현실을 긋는 한 줄기 빛을 그렸다.
* * *
“- - - - - - -!!!”
오직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도로를 최고 속도로 달린다.
주변 풍경은 눈을 감고 뜨는 한 프레임 사이에 바뀌었고 혹여나 도로에 있을지 모르는 위험은 우리의 신경을 연신 자극했다.
무전이 연결되어 있지만, 몰려오는 긴장감에 입 한번 뻥긋할 수 없는 상황. 나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젖어 버린 헬멧 안에서 충혈된 눈동자를 사방으로 돌렸고 물기가 어린 숨을 훅 내뱉었다.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야 한다. 이 기분과 본능이 가리키는 표지판은 위험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내 핸들은 절대 옆으로 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선두로 뒤따라오는 용팔이와 노인은 내 입에서 들려올 오직 단 한마디를 위해 이 공포와 긴장감을 참아 내고 있었다.
“- - -후우, 후우.”
그리고 나는 시더빌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폭탄을 품은 것 같은 심장에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위험이 가깝게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격변이 터짐과 동시에 무작위적으로 생성되는 싱크홀.
그곳에선 마치 알을 깐 바퀴벌레의 새끼들처럼 놈들이 기어 나올 것이고 살아 있는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내 감각의 잡히는 블랙 라인의 숫자는 총 7개. 격변이 터지자마자 바로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의 선은 이미 중부의 산맥을 넘어 시더빌이 있는 동부로 향하고 있었다.
“좌회전!”
그리고 나는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놈들의 파도를 쫓아 급격하게 핸들을 꺾었고 내 무전을 받은 일행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속도를 감속해 뒤를 바짝 따라왔다.
중부 국유림과는 다르게 평야가 지속되는 이쪽 지형. 덕분에 저 멀리 깔린 어두움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안에 빛이라고는 우리가 내뿜는 오토바이 전등밖에 없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과연 놈들은 어디까지 왔는지 두려움의 터널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상황.
나는 점점 거칠어지는 일행들의 숨소리에 호흡을 집어 던지며 무호흡과 무의식에 세계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1시간 같은 1분이 지나자 내 피부에 잠들어 있던 모든 신경이 지옥 아래에서 손을 흔드는 놈들처럼 손과 고개를 추켜들었다.
“멈춰요!”
끼이이이이익- - - -!
칠흑과 같은 어둠에서 주변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용팔이와 노인도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멈추라는 소리에 위험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바닥에 반달 모양 스키드를 남겼고 나는 터질 듯이 달아오른 숨을 훅 내뱉으며 도로 한가운데 오토바이를 멈췄다.
그리고 나를 시작으로 일행들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끄자 주변은 한순간 어둠으로 잠겨 버린다.
천천히 헬멧을 벗는다. 마치 물처럼 쏟아지는 식은땀.
노인과 용팔이는 옆 사람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 - - -아무것도 안 보여.”
달도 별도 전부 모습을 감췄다. 하늘에 있는 건 이 종말을 축복하듯 일렁이는 어둠 속 먹구름뿐이었으며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자신의 팔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침묵을 지키자, 마음이 조급해진 노인은 조용히 읊조렸다.
풀벌레 소리, 새소리, 심지어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언제 블랙 라인이 나타나 우리를 휩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허상을 만들고 공포를 재생산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
냐하면 내가 다물고 있던 입을 드디어 열고 오토바이 뒷좌석에 달린 수납공간에서 천천히 붉은색 조명탄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김치찌개 먹고 싶다.”
“실없는 놈.”
그리고 내가 아무런 대답 없이 붉은색 조명탄을 장전하자 노인과 용팔이는 이곳이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제일 어린 용팔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살려달라는 말도 도망가자는 비겁도 아닌 우리가 옥상에서 꾸역꾸역 먹었던 김치찌개였다.
오늘따라 왜 이리 한국이 그리운지,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에 우리도 이만 지쳐 버린 모양이다.
피식 웃으며 용팔이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노인과 떨리는 손으로 조명탄을 위로 추켜드는 나.
생사를 가늠할 레이스는 곧 시작될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죽음을 넘는다.
팡-!
“- - - - - - - - - - -.”
방아쇠를 당기자 작은 해가 뜬다. 내가 발사한 붉은색 조명탄은 을씨년스럽게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고 오직 어둠뿐이라 생각한 평야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났다.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에서는 언덕이라고 생각한 어둠의 뭉치들이 각자 팔다리가 생겨나며 미친 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 아니 수만 마리가 뭉친 검은색의 파도.
우리는 그 지옥의 단면을 두 발로 선 채 직면했고 놈들도 조명탄에 회색 눈을 고정하며 이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떨려 오는 울대와 마른침이 넘어가는 목구멍.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살아서…, 살아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