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91화 (291/313)

# 291

2부 8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죽여야 했나?”

“아뇨, 잘 참으셨어요.”

노인은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보며 아쉬움이 남은 침을 바닥에 퉤 뱉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놈들에게 날릴 것 같던 발사기에 탄두를 빼내며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숨을 훅 내뱉는다.

그래, 잘 참았다. 거기서 정부 요원들을 공격했다면 아무리 우리라 해도 수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놈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알아서 물러나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무력 충돌이 발생할 뻔했다.

물론 방금 대치로 관계는 이미 강을 건너버린 것 같지만, 그 뒤를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이미 되돌아올 길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에 빠져 서서히 지고 있는 황혼을 바라보자 정리되어가는 주변을 바라보던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쩌냐? 내쫓은 건 좋았는데.”

더글러스 시티에서 노획한 군용 무기들과 실전을 거쳐 훈련된 민병대원들은 광신도 놈들과 부랑자들이 시더빌을 함부로 쳐다도 볼 수 없는 수준까지 들어섰다.

그 때문인지 나를 잡기 위해 협상 테이블로 온 정부 요원들은 옥상으로 우르르 몰려온 대원들 탓에 함부로 총구를 들어 올리지 못했고 그들을 대표하는 노파에게 미국 시민이라는 빌미로 같잖은 협박을 해올 뿐이었다.

하지만 정부에게 한번 버림받은 적이 있는 노파와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이라는 단어라는 자체가 어불성설.

시더빌은 정부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에덴 팀을 보호하기로 자처했고 기세등등하던 요원들을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하지만 신의를 지킨 약속과는 별개로 우리가 어떤 이들을 적으로 삼았는지 실감이 되자 찾아온 것은 미래가 걱정되는 허탈함뿐이었다.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얼굴에 걱정이 쌓인 노파와 도시 이곳저곳에서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현장을 정리하는 대원들.

나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입장에 마음이 성치 않아 함부로 입조차 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와 시더빌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했기에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노인에게 내 머릿속에 정리되어있는 두 번째 계획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손을 내밀자 노인이 피식 웃으며 자신이 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올려주었다.

“앞으로 큰 게 하나 올 거예요.”

“2차 격변 때처럼?”

“네.”

오랜만에 담배를 입에 물어 보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근심 걱정이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은 나는 노인에게 협상 자리에서 말했던 두루뭉술한 위협을 경고했고 그들과는 다르게 노인은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2차 격변 때처럼 큰 무언가가 올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올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검은색 파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누군가 들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노인은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측이냐, 감이냐.”

“감이요.”

“그럼 확실하겠네.”

변종화는 나에게 다시는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끔찍한 저주를 걸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내가 아이와 일행들을 무사히 지킬 힘을 주기도 했다.

매일 밤 꾸는 악몽과 마치 발밑에 시궁창이 고여 있기라도 하듯 느껴지는 불쾌함.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을 마주하듯 몸은 달아올랐고 걷고만 있을 뿐인데 내 혈관에 흐르는 변종의 피는 격하게 반응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본능을 불러오는 파도와 무언가 큰 것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변종의 피. 나는 그것이 우리가 격변이라고 말하는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담배를 비벼 끈 노인은 그제야 내 두 번째 계획은 이해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발등에 불이 떨어져 봐야 급한 줄 알 거고…….”

“그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겠죠.”

“설설 기어야지, 개새끼들.”

힘을 합치면 막을 수 있을 흐름이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측에서 거부했으니 앞으로 남은 일은 거대한 피해와 수많은 희생자를 맞이하는 일뿐이었다.

현재 상태에서 더더욱 나빠질 여론과 누군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

큰 진통을 맞이한 그들은 노인의 말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져 우리를 찾아올 것이고 성난 여론을 잠재우고자 정치적인 수단으로 나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짊어지고 모두의 앞에 서야 하는 나는……,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앉아 내 아이들과 일행들을 한국으로 귀국시킬 것이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위험과 점점 건조해지는 감정.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노인에게 말했다.

“에덴과 한국에는 미리 말해두세요. 미리 대비하고 있으라고.”

“그러마.”

나를 망상증 취급했던 그들 말대로 뚜렷한 증거나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근거 따위는 없었지만, 내가 변종이기에 느낄 수 있는 위험본능은 큰 것이 무조건 온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피해와 희생자들을 줄이기 위해 각국에 알려봤자 미친놈 취급만 당할 게 분명한 상황에 적어도 내 말을 100% 신뢰하는 에덴과 한국 정부에 알려 위험에 대비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내 대답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느낀 노인은 장비를 챙겨 서둘러 옥상 계단을 내려갔고 나는 저 멀리 지기 시작하는 황혼을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 노파에게 다가갔다.

“면목이 없네요. 잘 해봤어야 했는데.”

“입에 뱀을 품고 있는 사람들만 왔는데, 거기서 어떻게 더 잘하겠나? 수고했어.”

그들이 나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순간 협상 의지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그들의 프라이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모종의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결렬될 협상이었던 건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갈 뻔한 것을 막아준 노파에게는 여전히 큰 고마움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노파와 함께 한동안 주황빛 석양을 바라보다 폭풍이 지나간 협상 테이블을 뒤로하고 옥상에서 내려가는 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       *       *

[움직임은 아직 없습니다. 아마 뉴욕이랑 캐나다 국경 쪽에 연달아 생긴 구덩이에 집중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별이 헤엄치고 있는 빛의 바다였다.

그리고 나는 은하수 지붕 아래 테라스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한 시더빌의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불어오는 찬 바람과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의 공간.

방으로 통하는 문 너머에는 채연이와 강수련이 잠들어있었고 나는 그들의 품에서 살며시 빠져 나와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는 밤공기로 몸을 적셨다.

그리고 몰래 들고 나온 위성 전화기에서는 그리운 한국에서 밤을 지새우던 강 형사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미 육군의 움직임을 알려왔다.

“운이 좋았네요.”

협상이 결렬되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그 시간은 혹여나 공격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시더빌은 밤만 되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격에 대비해 불을 끄고 침대 밑에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미국 정부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잡음을 아직 처리하지 못했는지 우리와 관련된 사태에는 소극적인 움직임만을 취하며 급한 불을 끄기 바빴고 시더빌은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상념에 젖어 있던 그 순간 나는 언제나처럼 짜릿짜릿 울려오는 신경을 억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고 전화기 너머로 통화를 하던 강 형사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 - - - - -.”

[괜찮으십니까? 요즘 주기가 빨라지신 거 같은데…….]

마치 머리와 발끝에 전기가 통하는 바늘을 쑤셔 넣기라도 한 듯 온몸에 근육과 신경이 요동친다.

그리고 그럴 때면 피가 팔팔 끓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고 눈앞은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이 앞으로 다가올 것은 암시한다고 생각하니 맘대로 병실에 누워있을 수도 없었고 환경과 땅에서 오는 변화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테라스에 나와서 고통을 감내한 것도 벌써 4일째.

다행히 강수련와 채연이는 이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 스스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 고통을 참아낸 나는 감정의 건조함이 느끼며 강 형사에게 대답했다.

“한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전부 수월하게 진행 중입니다. 한국 정부도 별 잡음 없이 추가 격변에 대해서 대비 중이고요. 자칭 종말 전문가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기는 하지만…. 말뿐인 사람들이라 그냥 무시하는 중입니다. 요즘 전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예고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시나브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냐 못 알아채냐가 지금 이 시각에도 잠들어있을 많은 사람에 명운을 좌우했다.

잘 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강 형사의 따뜻한 한마디에 나는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힘들고 험난했던 나의 갈색 숲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간은 하염없이 지나, 짙은 어둠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새벽.

나는 밤샘 작업에 힘들었을 강 형사에게 마지막 궁금증을 물어보는 것을 끝으로 그에게 이만 휴식을 줬다.

아니, 주려고 했다.

“- - - - - - - - - - -?”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

하지만 웃으면서 입을 떼려는 그 순간, 나는 턱 하고 막혀버리는 말문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마치 벼락이 내리쳐 온몸을 강타하는 이 찰나의 숨 막힘.

귀에는 한순간 이명이 들이쳤고 심장은 완전히 멈춰버리듯 박동을 정지했다.

몸에 팔다리를 떼어놓은 듯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두둥실 뜬 부유감에서는 분명히 감각이 느껴졌다.

느껴졌지만, 느껴지지 않는 이 모순의 감각에서 나는 정신없이 나를 부르는 강 형사에게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없는 그 순간에도 나는 무언가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단체장님? 단체장님! 아니, 동윤 씨! 괜찮으십니까!]

“- - - - - -.”

시간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엉터리 예언가처럼 꼭 올 것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미쳤다고 말했던 그 예고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정말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나는 불에 타올라 내려앉기 직전인 집을 뛰쳐나오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평온한 밤하늘과 시더빌의 풍경.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핑핑 도는 세계에서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았다.

움직여야 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꿰매기 시작한 본능을 뿌리치며 강 형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당, 당장 건물에서 빠져나가요! 그리고 에덴 팀 소집하시고, 정부 인사한테는 10분 안에 온다고 바로 연락하세요!”

[예?]

“시간이 없습니다! 상황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릴 테니……. 그때까지 꼭 무사하세요.”

그때까지 꼭 무사하세요. 그 말은 강 형사에게 하는 안부이자, 나에게 하는 각오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급히 끊기는 위성 전화기와 짜르르 울리다 못해 쓰러질 것 같은 전기 신호가 고막을 강타했다.

하지만 나는 허벅지를 강하게 내려치며 아 반응에 저항했고 유리창 안쪽에 있는 방안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내 고함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련과 채연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지체할 것 없이 테라스 문을 열며 강수련과 채연이를 끌어안았다.

큰 것이 온다. 건물 안에 있으면 위험했다.

한시가 급했고 저 멀리 산에서는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 동윤 씨?”

“따라와요!”

나는 잠결에 깜짝 놀라 버둥거리는 채연이를 그대로 끌어안고 잠이 덜 깬 채 나를 부르는 강수련을 문밖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잠들었던 숙소는 2층 건물, 1층에는 용팔이와 노인이 잠들어있었고 보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다.

그리고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채연이와 강수련을 길가에 잠시 내려놓고 밑에 층에서 잠들어있는 일행들의 방문을 미친 듯이 두들기며 버릇처럼 챙겨온 무전기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벌벌 떨리는 손과 끓어오르는 피에 튀어나올 것 같은 눈알.

나는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며 무전을 보냈다.

“쳰씨! 쳰씨!!”

[Mr. 곽?]

“당장 대피 사이렌 울리세요!”

일행들을 대신해 당직을 서고 있었는지 잔뜩 가라앉은 쳰의 목소리.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할 시간이 없는 나는 혹시 몰라 도시에 설치해두었던 대피 사이렌을 울리라고 비명을 질렀고 쳰은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는지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 순간 내가 미친 듯이 두드렸던 문이 열리며 어느새 장비를 챙기고 나온 노인과 용팔이가 비틀거리는 나를 붙잡고 무어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하는 이명에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입을 뻐금거리며 나가야 한다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이렌이 잠들어있던 시더빌을 강타했다.

“- - - - - - - - -.”

삐이이이이이이…….

이명과 점철되는 사이렌 소리. 시더빌 곳곳에서는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나를 부축하던 노인과 용팔이는 깜짝 놀라 나를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나를 애타게 부르는 채연이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답조차 못 해주며 눈을 감았고 최대한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과 머리로 쏠리는 피가 서로 만나 조류를 만든다.

그리고 저 멀리 숲속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한 새떼를 시작으로 바닥에서는 항거하지 못할 진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다시 한 번 세상을 바꿀 격변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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