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2부 86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우리가 정찰 작전에 성공하고 정확히 하루 뒤, 시더빌에서 출발한 민병대가 레이크 시티를 공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놈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심해 대원들의 피해가 컸으며 여태 치렀던 단기전과는 다르게 교전은 하루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는 처음 탈환을 목표로 했던 작전 개요를 완전히 바꿔 철저한 파괴라는 원초적인 목표를 잡았고 레이크 시티에 화력을 집중해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무너진 장벽과 불타오르는 건물들. 광신도 놈들은 항복 없이 그곳에서 전멸했고 끔찍한 기억과 절망이 남아있던 레이크 시티는 폐허가 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혔다.
그리고 나는 시티를 향한 공격이 성공하자마자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위해 노파를 만나 회의실에 앉았다.
“그 정도로 위험하다고?”
“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후퇴하셔야 해요.”
그리고 회의실에 모인 내가 가장 먼저 꺼내든 화두는 바로 흰색 변종을 만들어내는 사육장이었다.
물론 우리가 레이크 시티에 존재하는 사육장을 파괴하고 하얀색 변종이 완전히 진화를 이루는 과정이 그렇게 쉬워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모습을 감춘 교주가 또 언제 그런 곳을 만들어 운영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흰색 변종과 마주쳐본 적이 없는 노파와 그 일가는 상당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민병대가 후퇴해야 할 정도로 강력하냐며 되물었고 그 위력과 소름이 끼칠 정도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나는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현명한 노파는 내 경고 속에 담겨있는 진심을 엿봤는지 사족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지.”
됐다. 이것으로 시더빌의 민병대가 하얀색 변종들과 무모한 전투를 이룰 일이 사라졌다.
나는 경고를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준 노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어젯밤 보았던 끔찍한 광경을 천천히 머릿속에서 지웠다.
변종을 부리는 교주와 다른 개체와는 격을 달리하는 하얀색 변종에 정체.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비밀들은 내 몸에 변화가 생기자마자 하나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와 일행들은 짙은 심연에 얼굴에 들이밀 듯 진짜 어둠과 직면했다.
앞으로 또 어떤 실타래가 풀리고 무서운 진실이 정체를 드러낼지 모르겠지만, 내가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 오가던 회의실은 한순간 조용해지고 자리에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은 노파가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 미국 정부와 접촉한다고 들었는데.”
“네, 집으로 가야죠.”
생존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교주는 도망치고 네바다 국경에 존재하는 도시는 전부 시더빌에 손에 들어갔다.
비록 그 흑막 뒤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놈들과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기지가 걱정되었지만, 노파의 일가와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결집 된 생존자들이 있는 이상 이 땅의 운명이 그렇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한편의 서사시 같은 일과는 다르게 나와 일행들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방인이었고 채연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의 끝을 봐야 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노파는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집으로 갈 시간이 되긴 했지. 정부와는 협상할 생각인가?”
“네, 교주나 미국 정부나 저랑은 결론을 내려야 하니까요.”
이방인의 신분으로 타국에 와 내 소중한 아이를 구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복잡했던 이해관계는 실타래처럼 얽혀버렸고 참 많은 위협이 나와 일행들을 덮쳤었다.
그러나 그 일과 고비는 상처와 목숨을 대가로 잘 넘어가 이제는 막바지에 도달했으며 내 일행들을 위협했던 교주나, 그런 교주와 나를 쫓는 미국과는 불필요한 시간을 끌 것 없이 빠르게 담판을 지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많이 내려놓은 것 같은 내 대답에 아련한 시선으로 회의실을 조용히 둘러본 노파는 정말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노인처럼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는 노파.
밖에서는 분주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지팡이를 딱딱 짚은 노파는 창가로 천천히 다가가 주름진 양손을 조용히 겹쳤다.
“협상은 시더빌에서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일이 틀어지더라도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상대는 미국 정부예요. 주민들 생각도 하셔야죠.”
노파와 시더빌의 주민들과는 참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대가를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고 노파와 주민들의 헌신적인 태도는 딱딱했던 우리의 심장과 경계심을 사르르 녹아내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넘어서 등을 기대고 싸울 수 있는 믿음직한 생존자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협상에서 노파와 시더빌의 주민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게 만드는 너무나 큰 민폐였다.
여차해서 협상이 불발이라도 난다면 그대로 군대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노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말을 언급하며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건 남에게 수치를 들켰을 때만 나오는 게 아니야. 내 친구를 외면하고, 내 은인은 외면하고……. 어떨 때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목숨줄이나 붙잡고 사는 그것이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이지. 떳떳하게 하늘을 보지 못할 거면, 사는 것이 의미가 있겠나?”
“하지만 주민들은…….”
쿵-!
“다들 바쁜 것 같아도 소문에 민감해. 자네들이 무엇을 하는지, 또 어디로 가서 무슨 사람들을 구해서 복귀했는지 다 듣고, 두 귀로 똑똑히 알고 있는단 말이야. 그리고 어제 에덴팀이 민병대원들 대신에 레이크 시티로 향한 날, 주민들을 모아서 투표를 한번 해봤네.”
죽음보다는 인간성을 지키고 한낱 목숨을 위하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알아라.
많은 세월을 살고 이 지옥 같은 세상을 현안으로 바라보는 노파의 말은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현실을 보라고, 지금 갓 희망을 알게 된 주민들을 돌아보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중간에 말을 끊은 노파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찍으며 마치 맑은 호수 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인간성을 믿으면서도 인간을 의심하는 나에게 던지는 노파의 꾸중.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는 모든 번뇌와 고민이 끝났다는 듯 너무나 맑은 감정이 맺혀있었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기로 했네.”
협상의 결과가 어떻든, 시더빌은 에덴팀과 함께한다. 이것이 바로 노파의 일가와 시더빌의 주민들이 결정한 투표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노파가 전달한 그 각오에 한순간 달아오르는 얼굴과 요동치는 숨을 참지 못해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날숨을 훅 내뱉었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깍지 낀 양손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지만, 모든 리스크를 감내하더라도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시더빌의 의지.
나는 그런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뭐라 형용하지 못할 간지러운 감정을 가지며 창밖에서 전해지는 햇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 * *
[생각보다 대화할 의지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하지만 단체장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는 요구가 강해서, 저희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보자마자 총을 꺼내 들지는 않겠네요.”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시더빌의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 조용히 앉아, 위성 전화를 걸어온 강 형사와 협상을 진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다.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지금 시각은 노파와 회의를 마치고 정확히 3일 뒤 새벽, 에덴과 한국 정부는 자신들이 협상 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이번 사건에 대해 모든 수사권을 가진 정보국의 요직 인물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시더빌에서 협상 테이블을 차릴 그들이 나와 직접 얼굴을 맞댄 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조건을 강하게 요구했다.
물론 내 안전이 최우선이 노인과 일행들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건을 수용하며 마침내 협상 자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보임과 동시에 이것이 통화의 마지막임을 직감한 강 형사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꼭 집으로 돌아오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집으로…….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분명 강 형사 근처에 모여 전화 내용을 엿듣고 있을 에덴팀을 생각하며 힘이 실린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묘한 웅성거림과 함께 통화는 끊겼고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갈무리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순간 어깨 위에 느껴지는 묵직한 노인의 손.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내 뒤에서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노인과 용팔이의 모습이 들어왔고 아침을 타고 날아오는 헬리콥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차다. 여명이 눈부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듯 몸에 묵직하게 달린 장비의 무게를 이겨내며 천천히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나탈리는요?”
“협상 자리에 참석하고 그 후에는 저쪽이랑 동행할 거야. 도움이 되기를 빌어야지.”
그리고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노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시간이 나는 짬짬이 FBI 요원인 나탈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나.
물론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으려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의외로 에덴팀에 호의적인 그녀에게 우리의 진심과 그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것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진솔한 대화는 의외로 효과가 있었는지 나탈리는 협상 테이블이 열리기 직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겠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물론 미국 정부에 속해있는 그녀의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수를 만들어놔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우리는 미련 없이 그녀를 보내기로 했다.
“- - - - - - -!!”
그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완전히 빠져 나왔고 저 멀리 종말 전 대형마트로 사용되던 옥상에 헬리콥터 한 대가 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색 몸체에 선명하게 쓰여 있는 FBI라는 문양.
그리고 그 안에는 방탄복과 자동화기로 중무장한 여러 명의 요원이 있었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멈추자 주변에서는 숨을 죽인 주민들의 긴장감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협상 자리는 헬리콥터가 내린 대형마트 옥상이다. 참석자는 오직 나와 일행들만이 가능했고 노파와 그 일가는 바로 아래층 건물에서 협상의 결과 지켜봐야 하는 것이 조건 중 하나였다.
“갑시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떨려오는 심장을 꼭 부여잡고 일행들 선두에 서서 대형마트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건물 창문과 문마다 느껴지는 주민들의 시선과 내 심장을 간지럽힐 만큼 존경과 애정이 담겨있는 감정. 나는 마치 늪과 같은 착잡한 길을 걸으면서도 등을 밀어주는 순풍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팔다리와 펴지는 어깨. 내 왼쪽에는 노인이, 내 오른쪽에는 용팔이가 있었고 내 뒤에는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자 나는 어느새 대형마트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 - - - - -.”
끼이익, 텅-!
시더빌에서 제일 높고 넓은 대형마트의 옥상으로 향하는 녹이 잔뜩 긴 철문을 앞으로 밀자, 여과되지 않은 아침햇살이 우리를 덮쳐왔고 차가운 겨울바람은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순간 눈을 뜨지 못할 만큼 눈이 부신 빛의 번짐.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가려줄 모자를 거침없이 벗어 던지며 철문 옆에 내려놓았고 손에 들고 있던 소총도 전부 용팔이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내가 최소한의 무장만을 갖춘 채 뚜벅뚜벅 문을 걸어 나오자 옥상 한가운데 서 있는 헬리콥터와 그 앞에 준비된 긴 테이블이 시선을 독차지했다.
“- - - - - -.”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내 행동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협상 테이블로 찾아온 정부 요원은 총 8명.
그중에 실질적인 책임자로 보이는 남녀는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탈리를 포함한 나머지 7명은 약속대로 멀리 떨어진 채 선글라스 안에 존재하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리고 깊은숨을 훅 내뱉은 나는 최소한의 무장만을 한 채 고개를 돌렸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과 용팔이에게 읊조렸다.
“다녀올게요.”
협상 테이블에는 오직 나와 저들밖에 앉지 못하며 노인과 용팔이는 여기서 잠시 대기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무거우면서도 너무나 든든한 어깨 위 무게를 영혼에 각인시키며 뚜벅뚜벅 협상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자 걸어오는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6명의 호위와 의자에 앉아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는 2명의 요원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그리고 나는 하늘이 탁 트인 옥상에서 위험할지도 모르는 협상 테이블을 당당히 마주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사람의 연인, 믿음직한 친구이자 일행,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을 이끄는 단체장이다.
나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나는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확신이 있어야 했고 따라오는 이들에게 등만을 보여야 했다.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개로 갈라지는 세상과 마치 내 인생처럼 굴곡진 손아귀 주름살.
나는 수없이 방황하고 실패하고 넘어졌지만, 이 자리에 앉은 단 한 가지 확신만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나는 탁 트인 하늘과 내 일기를 지켜봤을 당신에게 언제나 이 한 문장을 말하고 싶었다.
“에덴의 단체장, 곽동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