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86화 (286/313)

# 286

2부 83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꺄아악!”

“제, 제발! 제발 딸아이만큼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광신도 한 놈이 아직 솜털도 빠지지 않은 소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캠프 한쪽에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 있던 남성이 피를 토해내며 광신도 놈들에게 처절한 애원을 보냈다.

하지만 소녀의 머리를 움켜잡은 광신도 놈은 히죽 하고 찢어지는 더러운 웃음과 함께 녹과 피가 찌든 꼬챙이를 뽑을 뿐이었다.

불타오르는 천막과 마땅한 반항조차 못 하며 죽어가는 난민들.

교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광신도 놈들이었지만, 아직 빛이 닿지 않은 음지에서는 약자들을 상대로 한 악행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하늘은 그 모습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짙은 먹구름으로 태양을 가리며 흰색 눈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내, 내 말 맞지? 여기까지는 절대 못 온다니까!”

“하하 병신들!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그리고 시더빌의 민병대를 피해 나무가 우거진 산맥까지 도망친 광신도 놈들은 난민들을 죽이고 뺏은 식량을 미친 듯이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패배로 인해 상해버린 자존심과 광기를 비겁한 방향으로 풀기 시작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욕설로 풀어내며 거지꼴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잠시 외면하는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인간 이하의 행위는 종말이 와버린 세상의 단면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광기도 잠시, 수염에 더러운 음식물을 잔뜩 묻히며 욕설을 내뱉던 광신도는 목구멍으로 독주를 밀어 넣으며 만들어진 웃음을 멈췄고 이내 동공을 떨며 중얼거렸다.

“……교주님은 살아계시겠지.”

정말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읊조림이 끝나자마자 미친놈들이 날뛰던 공터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모든 광신도의 시선은 독주를 마시며 읊조린 광신도에게 향했다.

비록 지금 잠깐은 광기의 폭력을 가하며 육식동물로 군림하고 있지만, 현실은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민병대들을 피해 도망친 패잔병들일 뿐, 교주가 있고 없고가 너무나 큰 그들은 불투명한 미래를 헤엄치는 표류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한 간부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뚜벅뚜벅 독주를 마시던 광신도 앞으로 다가와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드시 돌아오셔서 불신자들은 전부 끌고 가실 거다.”

교주님은 죽지 않는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비참한 현실이지만, 사라지지 않은 믿음은 굳건했다. 그리고 그 간부의 말에 억지로 웃음을 머금은 광신도는 저급한 독주를 미친 듯이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마치 송장처럼 차갑게 식은 몸을 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교주님은 살아계신다. 지금은 벌레보다 못한 생존자들에게 쫓기고 있지만, 교주님만 돌아오시면 모든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점점 올라오는 취기와 만용과 흡사한 용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난민들의 비명은 자장가가 되고 온몸이 신앙으로 가득한 광신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간부에게 힘찬 대답을 하려고 했다.

“- - - -끄으윽, 컥- - -.”

“어?”

하지만 들어 올린 시야에 잡힌 것은 유난히 자신들을 챙겨주던 다정한 간부의 얼굴이 아닌, 연약한 목구멍을 뚫고 나와 피를 울컥울컥 뽑아내고 있는 살벌한 대검이었다.

한 줌의 빛조차 보이지 않기 위해 검은색 락카로 칠해져 있는 대검의 날.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숨이 붙어있던 간부는 피 끓는 소리를 내며 광신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 순간 비현실이 현실이 된다. 믿음은 불신으로 바뀌고 기분 좋게 끓어오르던 술기운과 광기는 마치 차가운 물에 빠진 장작처럼 팍 식어버린다.

입에서 나오는 단 한마디 단말마. 그들을 찾아온 것은 그토록 원하던 검은색 희망이 아닌, 그들을 잡기 위해 시더빌에서 찾아온 3명의 저승사자였다.

*       *       *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참혹한 현장 위에 침을 뱉은 노인은 아킬레스건이 끊겨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광신도 놈의 머리에 친히 권총탄을 박아주었다.

죽여도 죽여도 바퀴벌레처럼 솟아나는 광신도 놈들.

그 때문인지 시더빌로 향하고 있는 난민들의 피해는 심각했고 레이크 시티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벌써 4번째 현장을 우리가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2시간이면 갈 거리를 벌써 반나절이나 소모한 나는 손목시계 위에 튄 피를 닦으며 시간을 확인했고 결국 한숨과 함께 시더빌에서 대기하고 있는 쳰에게 무전을 보냈다.

4번째 현장을 돌아다니며 구한 사람만 벌써 50명이다.

덕분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민병대원들은 쉬지도 못하고 바삐 차를 운전해야 했다.

“저, 저기!”

그리고 짧은 무전을 쳰에게 보내고 레이크 시티로 다시 떠날 준비를 할 무렵, 현장을 정리하고 있는 공터에서 반쯤 갈라진 남성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워낙 쉬어빠지고 발음이 새는 목소리라 고통을 호소하는 작은 신음인 줄 알았는데, 분명히 나를 지칭하며 발목을 붙잡는 그 남성은 어딘가 처절해 보였다.

광신도가 더 남았나? 아니, 분명 저 멀리서 용팔이가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시선을 돌리자 아까 광신도에게 붙잡혀가던 소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중년남성이 기절한 자신의 딸을 꼭 끌어안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떨리고 있는 팔다리와 충혈된 두 눈. 나는 조용히 대검을 집어넣으며 그 남자에게 말했다.

“곧 저희 쉘터에서 보낸 사람들이 올 겁니다. 무사히 시더빌로 돌아가실 수 있게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라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빨리 자리를 비웠겠지만, 어린 딸을 끌어안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 말이 길어졌다.

그래, 한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근처에서 현장을 정리하고 있을 민병대원이 이곳으로 와 뒤처리와 함께 난민들을 데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대답에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딸 이마에 입을 맞춘 남자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고 이내 더 할 말이 있는지 피가 묻어나는 입술을 벌려 말했다.

“소, 소문을 들었습니다. 시더빌에 그가 있다고, 거기로 가면 만날 수 있다고…. 분명히 들었습니다. Mr. 곽 맞으시죠? 정말 여기로 오신 거 맞죠?”

쳰이 말하길 캘리포니아 전역의 생존자들이 시더빌로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도, 심지어 종이 신문도 없는 이곳에서 안전한 곳을 어떻게 찾아 모여들고 있는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발 없는 말이 열심히 캘리포니아 전역을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절망이라는 이름 속에 맺히기 시작하는 희망과 어느새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소녀.

종말이 찾아오고 희색의 피라미드가 눈앞에 도래했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이곳까지 걸어온 부녀는 아직 생존의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빛과 마주한 나는 모자를 천천히 벗어 놈들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진 소녀의 머리에 푹 씌어주었다.

“동윤아, 가자.”

“네.”

그리고 나는 이름이 무엇이라는 의미 없는 대답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잠시 바닥에 내려두었던 소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놈들의 몸에 피 묻은 대검을 닦던 노인이 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저 멀리서 아직 죽지 않은 놈들을 처리하던 용팔이는 시동을 걸기 위해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대답이 없었지만, 마치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꼭 감는 남성과 자신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함께 거칠게 울음을 터트리는 남자의 딸.

저 멀리서는 시더빌의 트럭이 달려오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나와 일행은 바닥에 즐비한 시체와 피 웅덩이를 가로지르며 남쪽으로, 그리고 또 남쪽으로 향했다.

*       *       *

“이번에 또 왔으면 다 죽었겠네.”

레이크 시티 근방에서 차를 멈추고 도보로 움직이기 시작한 우리는 놈들이 완전히 봉쇄한 국도를 피해 황량한 평야를 걸었다.

그리고 점점 지기 시작하는 해 밑에 숨어 정찰대가 봤을 광신도 집단을 확인한 노인은 평야만큼이나 건조한 소감을 내뱉으며 피곤이 묻어나오는 하품을 길게 내뱉는다.

노인의 말대로 지켜야 하는 경계가 좁아진 만큼 촘촘해진 놈들의 방어선.

더군다나 한번 정찰대가 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레이크 시티 근방은 차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멋모르고 지나가는 난민들을 잡아 오는 광신도 놈들로 가득했다.

“도시로 들어갈 거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익숙한 용팔이는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외관과 방어선을 바라보며 도시 안까지 직접 들어갈 거냐고 물었고 노인과 나는 말해 뭐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셋이서 도시를 접수한다느니 하는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어선과 도시의 외관만 살피고 빠지기에는 투자한 시간이 아까웠다.

적어도 도시에 잠입해 교주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오거나 수색이라는 목적과 맞게 주요 정보나 간부진 정도는 암살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팔이는 미리 챙겨온 검은색 위장크림을 내밀었고 나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주황색 황혼을 바라보며 저녁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 없는 풀숲에 숨어 기다리기를 30분, 황량한 평야와 레이크 시티에는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어두움이 찾아왔다.

“가자.”

찾아온 어둠은 비장의 시발점이며 우리의 몸을 언제나 숨겨주는 또 다른 무기다.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소총을 챙기며 작게 읊조린 노인은 칠흑 속에 오로지 보이는 눈을 빛냈고 나와 용팔이도 장비의 마지막 상태를 점검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검은색 위장과 검은색 옷, 심지어 대검의 날마저 검은색으로 칠해버리자 공간과 우리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조명과 놈들이 피워둔 모닥불을 피해 천천히 레이크 시티로 접근한 우리는 근방에 지형과 방어선의 형태를 전부 기억 속에 집어넣으며 다음에 올 공격대를 위해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그런 평범한 것만이 아닌, 정말 욕지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더 많았다.

“미친 새끼들.”

아까 봤다시피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광신도 놈들도 우리도 아닌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 시작하던 난민이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써 이곳에도 여러 번 일어났는지, 평야 곳곳에는 시체가 구덩이에 파묻혀 타오르고 있었고 처음 우리가 놈들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괴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토템들이 시티 근처에 즐비했다.

마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스트레스를 이런 곳에 푸는 것처럼 벌어진 학살극은 세상 모든 더러움을 목격해봤을 노인마저 욕설을 내뱉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 순간 평야를 빙 돌아 시티의 뒤쪽으로 도착한 우리는 또 다른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엥? 담배밭이에요?”

“마약이잖아, 멍청이야.”

레이크 시티는 최후의 도시답게 놈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전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놈들이 사용하는 피의 마약에 베이스가 되는 진짜 마약. 아마 놈들의 피와 마약 한 종류를 아무렇게나 섞으면 놈들이 그토록 원하는 피의 마약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규모 마약 농장을 마주한 용팔이는 멍청한 얼굴로 물었고 노인은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으며 대답해주었다.

마치 밀을 심어두기라도 하듯 대규모로 널려있는 마약들과 밭 사이사이 존재하는 간이 공장.

아무래도 이곳은 캘리포니아 전역으로 흩어져있는 놈들에게 마약을 공급해주는 최대 생산지인 모양이었다.

“동윤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가기는 아쉽죠?”

그리고 놈들의 진짜 본거지와 밑천을 발견한 나와 노인은 간질거리는 손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혹시 몰라 챙겨온 다량의 폭발물과 휘발 액체. 우리에게는 이 넓게 퍼진 마약 밭을 정리할 수단이 있었고 마침 찾아온 밤과 기민한 움직임은 절호의 기회라는 유혹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유혹을 덥석 문 노인과 나는 가방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전부 다 꺼내 어리바리하고 있는 용팔이에게 넘겨주며 라이터를 쥐여 줬다.

그러자 입을 샐쭉 내민 용팔이는 무거운 짐들을 다 받아듦과 동시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또 내가 설거지 담당이야? 아니, 영감님 이번에는 제가….”

“시끄러워. 무전기나 잘 잡고 있어.”

사실 용팔이가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막내 노릇을 할 두식이라도 데려와야지.

노인과 나는 용팔이가 내뱉는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몸을 최대한 가볍게 했고 특정 구역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우리가 빠져나올 때 불을 질러야 할 곳을 세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냥 가기 아쉽다는 나의 말. 그것은 기회가 있을 때 안심하고 있을 교주의 뒷구멍에 불을 질러주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옳다구나 동의를 보낸 노인은 저 앞에 보이는 후문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읊조렸다.

“가자. 교주 새끼 팬티색이 뭔지는 보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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