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2부 8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변종이 오랜 기간 생존한다는 것은 딱히 충격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머리가 터져도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노화 없이 산다는 게 그렇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와 노인이 진짜로 놀란 이유는 변종이 오래 살았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종말이 시작되었던 수년 전이 아닌, 그 전부터 교주가 존재했었다는 것에 있었다.
1971년, 그것도 노화가 들지 않은 채 마치 처음 모습을 드러낸 태초의 변종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침묵이 감도는 교회 내부와 마지막 입김을 뿜으며 식어가는 커피. 그리고 침묵의 광풍 속에서 짙은 한숨을 푹 내뱉은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증거는 직접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냐?”
“거짓말은 아닐 거에요.”
일급기밀로 취급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보였다.
그 때문인지 나탈리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증거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지만, 종말의 탄생과 곧 나타날 결말이 짐작되는 나는 그녀와 미국 정보원이 알아낸 정보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싱크홀이 생성되기 전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교주의 정체, 그것은 정말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나타난 태초가 역겨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속삭이는 한국말에 조용히 눈치를 보는 나탈리와 결국 담배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
나는 해가 드는 아침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싸늘함이 느껴지는 공기를 크게 들이켜며 나탈리를 향해 물었다.
“혹시 미국 측에서 알아낸 구체적인 원인은 없습니까?”
“…그건 정말 제 권한 밖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이 종말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실마리를 생존하는 순간순간 떡밥을 삼키듯 발견하기는 했지만, 나는 당장 코앞에 닥치는 파도 같은 현실을 위해 잠시 외면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완전히 떠나간 것이 아닌,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돌고 돌아 도착한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자신을 풀어달라는 듯 흐느적거리는 실타래와 시시각각 전해져오는 미지의 위험본능.
나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며 식은 커피로 목을 적셨고 이내 지친 얼굴로 숨을 내뱉고 있는 나탈리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직도 제가 교주와 관련된 사람 같습니까?”
하루아침 사이로 적과 친구가 바뀌는 상황에서 유치하게 네 편 내 편 나눌 생각 따위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발을 담구고 있는 완벽한 타인에게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싶었다.
비록 마음만큼은 인간이라 믿고 있지만, 겉껍데기는 교주와 다르지 않은 상태, 소중한 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 속 방패와 이미 인정해버린 정체성은 상극을 이루며 마음을 착잡하게 했고 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가벼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내 물음을 받은 나탈리는 더욱더 심란해진 얼굴로 조용히 읊조리듯 대답해주었다.
“…아니요.”
“왜요?”
“저도 당신의 책을 읽었으니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나탈리와 저쪽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웃음이 터진 노인.
한순간 차가웠던 교회 내부는 휘발유 난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기와 함께 훈풍을 몰고 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딱딱했던 표정을 풀며 살며시 웃었다.
한참 아침 식사가 시작되고 있는지 선선한 고기를 타고 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 그 순간 무전기에는 바쁜 시간을 알려오는지 연신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노인은 창밖을 보며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빈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구금을 풀어드릴 겁니다. 비록 감시가 붙겠지만, 도시 내부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돼요. 또 하시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요청하시고요.”
“…감사합니다.”
“곧 집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으실 겁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에덴과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공식적인 접촉에 성공한다면 협상과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오고 가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안전과 무사 귀환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가진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최고의 이득을 보아야 했고 우리와 협력하는 사람이 하나 늘어난다고 해서 전혀 나쁠 것은 없었다.
자고로 인간이란 여지라는 호의를 남겨두어야 숨을 돌리는 존재.
나와 노인은 오랜 고민 끝에 그녀의 구금을 풀기로 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교회에 갇혀 지내며 번뇌와 고독 속에 고통받던 나탈리는 조금 떨리는 대답과 함께 눈을 꼭 감았다.
칙.
[Mr. 곽. 할머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의 마무리를 암시하듯 때마침 책상 위에 올려둔 무전기에서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쳰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노파가 오랜만에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한 번에 듣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첸의 심각한 목소리.
마침 아침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우려고 했던 나는 곧 가겠다는 대답과 함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고 노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모두가 바삐 지나가는 평일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말이다.
하지만 우리 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교회를 빠져나가 본 건물로 향했다.
* * *
끼익-.
“오랜만에 뵙네요.”
“배고프지? 들어와서 조금 들게”
문지방이 닳도록 오고 갔던 회의실에 문을 열자, 은은하게 풍겨오는 음식 냄새와 함께 테이블 중앙에 앉아있는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온다는 말에 급히 준비했는지 따뜻한 김을 풍기며 놓여있는 수프 그릇.
그리고 노파는 문을 열며 들어온 우리에게 흐뭇한 얼굴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권했고 나와 노인은 망설임 없이 장비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휴식을 권장하던 주말치고는 자택이 어수선해 보인다.
그리고 잠시 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년이 수저와 함께 식사를 준비해주자 우리는 따뜻한 식사와 함께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는 일은?”
“어렵지만 나름 진행되고 있습니다. 시더빌 쪽은요?”
따뜻한 음식으로 적당히 배를 채우자 차가운 아침 날씨에 딱딱하게 얼어있던 속이 뜨겁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충분한 휴식으로 좋아진 몸 상태와 아침 햇살에서 오는 나른함.
좋은 기분으로 식사를 마친 나는 그동안 바빴던 노파와 작은 안부를 나눴고 어려워할 것 없이 본론을 말해줬으면 하는 눈빛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바삐 협상 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시더빌에게 필요한 일을 차근차근 진행해준 노파다.
그만큼 운명 공동체라는 유대감과 고마움은 격을 차리고 딱딱하게 굴만큼 얇지 않았기에 나는 에덴팀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깊은 한숨을 내뱉은 노파가 재떨이 위에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쉽다고는 말 못 하겠네.”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한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이기고 우두머리를 잃은 광신도 놈들은 단순한 부랑자 신세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그 기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종교 단체 특성상 추앙 대상이 사라진 여파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더빌을 기점으로 뭉친 생존자들은 캘리포니아 동북부 지역을 빠르게 수복하며 반격을 시도했고 그 경과는 잠시 활동을 멈춘 내 귀에도 들어올 정도로 빠르고 본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어두운 얼굴로 나를 호출한 노파의 일가는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틀 전 이글빌(Eagleville)을 확보한 건 알고 있나?”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 근방 물자를 전부 노획하고 민병대는 세를 불렀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끝마친 노파는 가장 먼저 네바다주 경계에 있는 광신도 놈들의 도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고 이틀 전 두 개 도시 중 하나인 이글빌을 선제공격했다.
치열한 정보전과 죽음을 불사하는 두 세력 간에 공방전.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생존자들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캠프 군인들을 필두로 한 민병대는 이글빌에서 숨죽이고 있던 패잔병들을 전부 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되는 사람들과 모든 악행의 대가를 받듯 지옥으로 떨어지는 광신도 놈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노파는 그것이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음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레이크 시티(Lake City)로 출발한 정찰대가 도착했네.”
네바다주 경계에 있는 도시는 시더빌, 이글빌, 레이크 시티 총 3개. 그 중 시더빌과 이글빌은 생존자들이 확보했고 이제 남은 도시는 레이크 시티 하나였다.
그리고 노파는 이글빌을 확보한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작전을 시행했는지, 레이크 시티와 관련된 정보를 가지고 온 정찰대가 왔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알렸다.
하지만 어둡다 못해 썩어 들어가는 쳰의 얼굴을 보아 그 결과가 썩 좋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말을 아끼는 나를 조용히 주시하던 노파는 한숨을 푹 내쉬다 말고 말을 이어갔다.
“20명이 가서 1명만 살아왔어.”
공격대가 아닌 정찰대다. 물론 전문적인 군사훈련은 받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파견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을 거란 소리였다.
하지만 20명이 와서 1명만 살아남았다? 다 이겨가는 전투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나와 노인은 노파의 일가를 따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회의실 내부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는 노인. 나는 마른 입술을 조용히 핥으며 노파에게 물었다.
“살아남은 한 명은요?”
“정신이 나갔어. 상처도 심각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웬만한 일에도 정신을 붙들고 살 수 있는 생존자임을 말해줬다.
하지만 생존자, 아니, 의무감과 자부심을 품고 활동하는 민병대원이 미쳐버렸다는 것은 20명의 정찰대에게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광신도 놈들의 도시 레이크 시티, 도망친 교주와 최후의 보루라는 단어가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고 노파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며 주름진 입술을 우물거린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노인이 나를 향해 물었다.
“거기 있을까?”
“…가능성은 충분해요.”
목숨을 건 일격에도 교주는 살아 돌아갔다.
물론 쉽게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어딘가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상황.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미국 정부와 접촉을 하기도 전에 그 송곳은 주머니를 삐져나왔고 19명의 죽음으로 알아낸 미지의 정보가 레이크 시티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정신은 장작을 집어 던진 모닥불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짙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마른침과 삼킨 노파는 결국 나에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정말 교주가 레이크 시티로 향했다면 정찰대를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네. 휴식을 취한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에게 염치없지만, 이번 일을 부탁해도 되겠나?”
교주가 레이크 시티로 향했다는 가정하에 또다시 정찰대를 투입하는 건 쓸데없는 희생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파는 미안함으로 물든 눈을 주름 사이로 숨기며 조용히 읊조렸고 근처에서 기립한 일가 사람들도 피곤한 얼굴 사이에 송구함을 담았다.
그 어떠한 특수부대가 와도 가기를 꺼릴 광신도 놈들의 지옥도.
하지만 나와 노인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작전이 시작되면 한동안 먹지 못할 커피를 다시 채우며 블라이스가 흔들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원활한 배급과 희망적인 전망으로 점점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시더빌.
그리고 그곳에 잠시 둥지를 내린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차량 한 대만 준비시켜주세요.”
미국과의 협상은 별개로 교주랑은 끝장을 봐야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는 혹여나 상황이 바뀌기 전에 바로 출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고 있는 노인은 별 반발 없이 동의를 보내왔다.
그러자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노파와 일가 사람들로 인해 회의실에는 숙연함이 내려앉는다.
레이크 시티로 향하는 경로와 함께 머리를 감도는 장비의 종류들.
나는 오직 향만이 느껴지는 커피를 끊임없이 목구멍으로 넘기며 버릇처럼 목을 축였으며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꾹 눌러썼다.
에덴이라는 마크가 진하게 남아있는 모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