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84화 (284/313)

# 284

2부 81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 - - - -.”

서 있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날을 갈지 않은 대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느려진 시간 사이로 힐끗 눈동자를 굴려 대검 손잡이를 붙잡은 채 몸을 날리고 있는 채연이를 시야 한가득 담았다.

일반인이라면 목이 그대로 베여 피를 뿜었을 민첩한 공격.

하지만 나는 피하고 싶지 않아도 피해지는 본능 속에 아이의 공격을 손쉽게 피해버렸고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을 툭 밀어 버렸다.

그러나 그 작은 반격은 정상적인 흐름을 타고 다니는 채연이에게 큰 여파로 다가왔는지, 대검은 금세 경로를 벗어났다.

“큭!”

딱딱하게 굳어있던 근육은 뇌에서 인지하지 못한 반격 탓에 차마 대응조차 못 하며 옆으로 뒤틀렸다.

큰 힘을 실었던 만큼 강하게 다가오는 반동. 채연이의 입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오며 몸의 중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이쯤 되면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한 아이는 자신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입술을 독하게 물었고 마치 이리 새끼처럼 살벌한 눈을 빛냈다.

상대를 배려하는 대련이 아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생존기술.

채연이는 다시 한 번 기합을 지르며 내 급소를 향해 대검을 뻗었다.

탁-!

넘어지면 일어나고 실패하면 다시 해라. 요 며칠 사이 내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아이는 실패하면 할수록 더 빨라지고, 또 강해지고 있었다.

그 여린 소녀가 종말 위에 당당히 선 생존자가 될 때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까.

피와 눈물이 뒤섞였을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도 나는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작은 키와 민첩함을 이용해 내 명치로 쑤셔 들어오는 대검.

그러나 몸의 중심이 대검 끝에 쏠린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연이는 내가 걸어오는 하단 공격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그대로 발이 걸려 허공을 붕 날아간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자빠지는 채연이와 공터에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

힘이 많이 실린 만큼 위험성도 크다는 걸 아이는 알아야 했다.

“채연아, 아빠가 뭐라고 했지?”

“…확신하지 마라.”

자신보다 체구가 큰 나를 상대로 해야 했기에 본능적으로 힘이 실린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채연이의 공격에서 이번만큼은 통했을 거라는 확신을 읽은 나는 아이가 일부러 흙바닥을 굴러 먼지를 뒤집어쓰게 했고 골이 울릴 만큼 큰 충격을 주게 했다.

다시는 이런 위험한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가한 충격요법.

그리고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채연이도 내가 몸으로 실천해준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는지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부가 뜨겁고 입에서는 더운 숨이 훅훅 빠져나간다. 여명이 떠오르고 다시 찾아온 아침, 나는 대검을 조용히 검집에 꽂아 넣고 자세를 숙여 양팔을 벌렸다.

“히히.”

그러자 언제 독한 얼굴을 품었냐는 듯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닦은 채연이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달려왔고 곧 내 품에 쏙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키와 근력은 아이의 체구를 성장하게 했지만, 이렇게 안겨 올 때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힘든 훈련을 마치고 언제나 그렇듯 아이를 안아준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연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누구를 이렇게 닮았는지 점점 미인이 되어가는 아이. 아마 나중에 크면 여럿 남자 울릴 것 같았다.

“채연아, 동윤 씨!”

그리고 내가 더러워진 채연이의 얼굴을 닦아주자 공터 끝 의자에서 마음을 졸이며 앉아있던 강수련이 큰 담요와 따뜻한 수건을 들고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나와는 달리 아직 채연이가 어리게만 보이는 강수련.

아이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작은 비명을 질렀던 그녀는 나에게 살며시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수건으로 아이를 감싸 안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땀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어버린 시더빌의 하늘을 조용히 주시했고 긴소리를 내지르며 날아오는 새 한 마리를 시야에 가득 담는다.

“- - - - - -.”

한번 죽음을 겪고 인외의 공간에서 뛰쳐나온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노인과 함께 시더빌로 복귀했었다.

그러자 당연히 많은 이들이 맨발로 뛰쳐나와 우리를 반겼고 나는 곧바로 직행한 병원에서 상처가 다 나았음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병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한 포옹과 함께 나눈 재회의 기쁨.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그중에 가장 아픈 손가락은 역시 걱정하고 있었을 채연이었다.

‘아빠.’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는 눈물을 의젓하게 삼키며 내 앞에 당당히 섰고 자신은 괜찮았다고 무사할 줄 알았다며 강한 포옹을 해왔다.

비록 나를 위한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진한 눈빛과 말을 통해서 걱정과 성숙함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온 나에게 아이가 정신적으로 성장했음을 인정하게 했다.

내 사랑스러운 딸임과 동시에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생존자.

그리고 돌아오는 내내 고민하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아이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쓰러지면 일어나라. 내 삶의 정수. 내가 겪었던 투쟁의 경험.

사격술부터 시작해서 살을 맞대고 일어나는 근접전까지 나는 일주일간 시간 대부분을 소비해 채연이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훈련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노인의 입에서 걱정이 나올 만큼 강도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채연이는 그 누구보다 독하게 훈련을 따라왔고 그동안 내포하고 있었던 재능과 단련의 결과를 마치 꽃이 피어나듯 결실을 보게 했다.

앞으로 계속될 훈련과 삶의 고단함. 앞으로 채연이는 다져둔 길을 밟고 그대로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상념이 끝나 하늘에서 시선을 멀리하고 아이와 강수련을 바라보자, 훈훈한 훈풍이 훅 불어왔다.

“안 아팠어?”

“괜찮아!”

반격을 당한 손목이 꽤 욱신거릴 것이다.

하지만 강수련의 물음에 의젓하게 대답한 채연이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훈련 뒤 찾아오는 피곤함을 후련하게 풀어냈고 강수련은 그런 아이가 안쓰러운지 살며시 웃으며 땀으로 젖은 머리를 만져주었다.

그리고 3분이라는 짧은 휴식시간이 지나고 땀을 모두 식힌 채연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많이 바뀐 아이의 태도.

하지만 그 속에 존경과 애정을 읽은 나는 아이와 마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오늘 훈련도 수고 많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동윤 씨…. 아! 아니, 여보. 할아버님이 찾으세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새벽부터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수련은 아침 훈련이 끝난 나에게 노인이 호출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동안 시더빌과 전역에 벌어지는 일을 선두지휘하느라 얼굴 보기도 바빴던 노인.

하지만 오늘은 나를 볼 시간이 생겼는지 해가 뜨기 무섭게 호출을 보내왔다.

그리고 나는 소식을 가져다준 강수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식사를 부탁했고 잠시 벗어두었던 장비와 코트를 챙겨 입고 노인이 기다리고 있을 외곽 교회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더빌의 하루와 마치 하나의 흐름이 되듯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나.

손에 입김을 불어 넣자 짙은 상념에 빠진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측에 증원을 보내고 각국 정보원들의 동향에 모든 것을 집중하던 에덴은 어느 날 갑자기 전해진 내 결정 앞에 참모진들이 전부 고개를 흔드는 강렬한 반대를 보내왔다.

하지만 내가 에덴 간부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날 있었던 진실과 내 몸 상태에 대해 말해주자, 회의실에 앉아있던 그들은 할 말을 잃은 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와 노인 그리고 용팔이만이 알고 있는 무거운 진실과 책임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미안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 의료진들과 침통함에 할 말을 잃은 강 형사.

내가 통화를 했던 위성 전화기 너머로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삼켜야만 하는 슬픔이 잡음을 통해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유연한 대처를 위해서는 공식적인 접촉이 가능한 그들이라도 빠르게 정신을 차려야 했고 강 형사와 박대박은 애써 침통함을 삼키며 시간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보내왔다.

아무도 모르는 위험 속에 위장된 평화. 시시각각 본능이 보내오는 위험이 나만이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초조한 시간은 흘러만 갔다.

덜컹.

그리고 상념과 뿜어져 나오는 입김 속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처음으로 미국의 정부 요원을 심문했던 침례교회의 문을 열었고 걸어오는 내내 쌓였던 추위와 눈을 재빨리 털어냈다.

그러자 따뜻한 난방을 켠 교회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훅 불어왔고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깨끗하게 정돈된 침례교회의 내부를 바라봤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주일이면 예배가 진행되는 교회 내부.

하지만 평일인 지금은 노인과 일행들이 일을 처리하는 아지트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문을 열자 총기를 손질하던 노인이 반갑게 인사하며 물어왔다.

“커피?”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물자가 모자라서 커피 한잔도 아껴 마시던 우리였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정리되고 놈들에게서 노획한 자원이 도시 내로 유입되자 시더빌은 나름 살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듯 교회 한가운데에는 휘발유 난로가 펄펄 끓고 있었고 노인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총기를 정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일주일 전과 다른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떠한 속박도 당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탈리였다.

FBI 정부 요원이자, 나를 잡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위험인물.

그러나 해결방법의 방향이 바뀐 지금은 조용히 노인의 눈치를 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흑인 여성일 뿐이었다.

나는 커피잔과 함께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노인 앞에 앉았다.

“어떻게 잘 설득했나 봐요.”

“독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순둥이야. 밀었다가 당기니까 바로 넘어오더라고.”

에덴과 한국 정부는 지금 교주의 손이 닿지 않은 미국 기관을 추슬러내기 바빴다.

그렇다는 것은 한동안 에덴에서 전해져오는 정보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인데, 노인과 나는 에덴에서 연락이 올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시더빌의 사태가 정리되고 두 도시를 공략하는 와중에도 진행되는 심문과 설득 과정.

노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심리적으로 그녀를 압박하거나 설득하는 등 큰 노력을 했고 점차 호의적으로 변하는 우리의 태도를 느낀 나탈리도 결국 오늘 새벽 입을 열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물론 신체적 고문이 없었다는 점도 크게 한몫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랑 이야기하고 싶다고요.”

그리고 내가 이른 아침부터 이곳으로 온 이유는 드디어 말문을 연 그녀가 나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뜬금없는 요청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삼자대면하지 않은 이상 결코, 정보를 말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그녀의 마지막 리미트 라인.

노인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해봐서 나쁠 것이 없다는 의견에 날이 바뀌자마자 바로 나를 호출했고 은은한 커피 향과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접선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가 의자를 끌고 앞에 앉아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자 나탈리는 마른 입술을 곱씹으며 나에게 물었다.

“교주는……. 변종이 확실합니까?”

맞다.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인간을 부리며 강력한 변종까지 부린다.

나에게 지구촌과 인류라는 개념은 아직 부족했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마주한 최대의 적을 꼽자면 인간의 모습과 맞춰 진화가 교주가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단순히 고개만을 끄덕이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나탈리는 내 대답이 진실일지, 아니면 거짓일지를 판가름하는지 동공을 흔들었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가리키는 방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그녀는 곧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차가운 침묵이 교회 내부에 감돌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탈리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건……. 이건 뭐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지금 확실한 건. 제 권한 밖 일이라는 것밖에 모르겠네요.”

“아는 대로만 말해주세요. 편안하게.”

일개 요원인 그녀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나 현장 요원이라는 점과 예전부터 교주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건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었고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우리가 협력관계인 것과 지금 이 행위는 심문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그러자 나탈리는 긴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등을 기댔고 테이블 위로 양손을 올려두었다.

오랜 속박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손목 상처. 하지만 그녀는 그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과 협력하겠다는 밝힌 우리의 의사 앞에 결심했는지 입을 열어 그토록 원하던 정보를 읊조렸다.

“교주는 미지의 인물입니다. 작정하고 신변정보를 추적하지 않았으면 찾지 못할 만큼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죠. 어떨 때는 평범한 가장에서…. 또 어떨 때는 한 대기업의 중역이었고 가끔은 정보가 닿지 않는 오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없었죠.”

가장 처음, 일반인이라는 가정 하에 몹시 특이한 행보를 보여주었던 교주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였지, 그가 인간을 연기하는 변종이라거나 이 광신도 집단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과거가 복잡하고 변종 주제에 인간 세상의 꽤 밀접하게 접근해있다는 정도?

하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인과 나는 곧이어 터져 나오는 비밀에 그만 소름이 돋아 커피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호기심이 생겨 교주의 과거를 더 쫓아서 조사를 해봤는데 그가 가장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짜가 문제였습니다…….”

“……날짜가?”

“그 당시 교주의 사진이 찍힌 연도가 1971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습 하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말 그대로……. 나이를 먹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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