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83화 (283/313)

# 283

2부 80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쉽게 길을 잃는다. 그리고 삶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간혹 나에게 다가와 어떤 신념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느냐고 묻고는 했다.

자신이 답을 낼 수 없기에 타인에게 답을 미루는 모습. 질문을 던지는 그들의 눈에는 내가 정답을 알려줄 거라고, 이 절망뿐인 세상에서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 앞으로 밀어지는 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그 어떠한 말도 떠들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영웅도, 이름을 남길 위대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릇이 작다.’

그리고 기자와 정치인들은 입을 다무는 나에게 실망하고, 원하지도 않았던 한마디 이름표로 곽동윤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평가했다.

큰일을 맡길 수 없는 소인배라던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생존자라던지, 이제는 장벽 밖으로 나온 내가 이제는 커져 버린 에덴을 이끌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매번 손가락질당하는 나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고통을 점철된 늪을 혼자 쓸쓸히 걸으며 훌륭하고 마음씨 따뜻한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막을 내리고 깜깜한 밤이 찾아온 지금은 아무런 웅성거림도 거슬리는 잡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쳤다.’

혼자 남게 된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념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로 향하는 기대가 무서웠고 무거운 책임은 갈수록 무뎌지는 굳은살과 같았다. 하염없이 지나가는 세월과 더불어 삐걱거리는 뼈.

거울에 비추는 몸에는 하나둘 흉터가 늘기 시작했고 언제나 어릴 것 같은 아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만큼이나 커 있었다.

그리고 일행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이 낡은 만큼 새로운 시간, 새로운 내일이 시시각각 나를 스치고 지나가 빈자리에 미련이라는 주름을 남겼다. 양손을 들어 올리자 후회가 보였다.

‘나는 어디까지 왔을까.’

지금 서 있는 이 길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일 나은 방법, 항상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남아있는 것은 후회와 고통뿐이라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리고 문득 가슴이 시려 눈물이 터져 나올 때 그동안 겪었던 모든 아픔이 온몸을 강타해 굳건하게 서 있었던 무릎을 꿇게 했다.

나는 아프면 안 된다, 나는 쓰러지면 안 된다. 등 뒤로 모든 이가 보고 있기에 들고 있는 짐을 한 번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 당도했을 때 나는 짐을 내려놓고 주저앉을 수 있었다.

사박, 사박.

바닥은 눈이고 하늘은 어둠이다. 주변은 고독만큼이나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애처럼 웅크려 혼자였기에 흘릴 수 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팠다. 고통스러웠다.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책임과 종말 위에 떨어진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아팠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는 걸을 힘도, 앞으로 나아갈 의지도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 공허만큼이나 허무한 일기의 끝이 다가올 것이다.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금은 비로소 쉴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 - -.”

이제 괜찮다. 그 어떤 반전도, 나를 강제를 일으키는 요소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내쉬며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눈의 이불에서 의식을 서서히 날려 보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내 의식 속에 숨어있는 빈약한 필라멘트는 꺼질 듯 꺼지지 않은 채 아직도 현생에 미련을 남기며 나를 깨우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모든 걸 훌훌 털어내고 나 혼자 가버려도 되는 걸까? 살며시 감은 눈가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 속에 성분은 슬픔이 아닌 꽉 막혀있던 감정의 소비였다.

그리고 나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시원함을 느끼며 복잡했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토록 힘들었던 나를 이해해주는 것 단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나 스스로였다.

“- - - - - - -!”

쿨럭.

그리고 현실을 의심하는 내 각오가 잔잔했던 바람과 함께 맞물리자, 몸을 덜덜 떨리게 할 만큼 사나운 돌풍이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픔이 다시 몰려온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고통스러운 현실이 무의식을 일깨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과 직면한 순간 폐부에서 쿨럭 기침이 치솟아 오르며 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다쳤었다. 아니,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나는 지옥이 아닌 잠시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 되었고 세상 모든 것이 내 선택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주었다.

‘선택해야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무의식 속 공간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잠들어있던 검은색 감정의 반점이 온몸으로 퍼져나간 걸 분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의식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한 가지 갈림길을 멈춰버린 심장 위로 올려두었다. 죽음은 어차피 찾아왔다.

하지만 내 선택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예열되는 활기와 불꽃을 부채질하는 변종의 피는 내 귀에 잠시의 유예기간을 줄 수 있음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아직 다 못 끝냈잖아, 넌 다시 일어날 수 있잖아. 그리고 그 속삭임은 너무나 보고 싶은 가족들의 웅성거림과 뒤섞여 메아리처럼 귓가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선택해야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잠시 내려두었던 짐을 다시 어깨 위로 올렸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타탁-!

잿가루가 잔뜩 묻은 꼬챙이를 들어 불타고 있는 장작 몇 개를 빼냈다.

내가 잠든 사이 밖으로 나간 노인이 밤사이 춥지 말라고 한가득 장작을 넣어둔 것 같은데, 따뜻하다 못해 너무 과한 화력 때문에 코트 아래로 땀이 삐질 흘리게 했다.

하지만 후끈한 열기 덕분인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체온은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감각이 사라진 손과 다리는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쇠꼬챙이를 잠시 내려두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상쾌한 여명이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에 파묻혀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 - - -.”

그리고 나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걷어 올리고 자리에 살며시 일어나 혼자 잠이 들어있는 오두막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꽤 오래 잠이 들어있었는지 오두막 곳곳에 걸린 동물 가죽과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한 육포들.

그리고 오두막에서 자리를 지키던 노인은 조금 전만 해도 식사를 하고 떠났는지 나무 테이블 위에는 음식 찌꺼기가 묻어있는 그릇이 자신이 닦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중심을 잡은 나는 균형감각과 각 부위에 근육이 무사한지 확인했고 곧 완전히 사라진 상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후우.”

균형감각, 근육, 반사신경, 호흡, 시각, 청각, 촉각. 싸우기 위한 모든 감각은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펼친 양손을 바라보자, 동공의 손상 때문에 생긴 기시감과 온몸을 짓누르던 피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 하지만 나는 이것이 몸속에 흐르는 더러운 피가 잠깐 유예기간을 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씁쓸함이 흐르는 입맛을 다시며 웃는 듯 우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상념은 잠깐일 뿐, 나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침대에서 벗어난 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

그리고 오두막을 잠시 둘러본 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곳이 경욱이와 캠프 팀을 처음으로 만났던 그 장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소거하지 않고 남겨뒀는지 멀쩡한 외관과 먼지를 싹 걷어낸 가구들.

그리고 테이블과 내 침대 근처에는 누군가 가져다준 초겨울 굳센 야생 꽃들이 놓여있었고 누군가 남기고 간 편지와 에덴 시절 찍었던 사진들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기자기하게 놓여있었다.

오랜 잠을 자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이 기분. 나는 고개를 돌려 문짝에 기대 가만히 서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이른 시간인데.”

내가 깨어난 걸 눈치챘음에도, 차마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가만히 담배만 피우는 노인.

하지만 아까부터 기척을 읽고 있던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노인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나를 보살펴주느라 고생했을 미안함과 다시 찾은 아침을 향한 고마움을 진심으로 담아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 듯 아침 인사를 건네자, 노인은 더 심란해진 얼굴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동윤아, 내가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노인이 말하기도 전에 말을 끊은 나는 미안할 필요 없다고, 그리고 내 목숨을 다시 한 번 살려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내 몸 상태. 하지만 나를 위해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었을 노인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할 기회를 준 노인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고마움의 진심을 담아 말하자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문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선반 위에 올려둔 편지를 하나씩 읽기 시작하는 나에게 뻑뻑한 담배 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애들이 써서 보냈어.”

노인과 용팔이라면 분명 일행들에게 자세한 내 소식을 비밀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아이들도 내가 요양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는 아기자기한 편지들을 보내왔다.

시더빌과 오두막을 정신없이 오가며 이 방을 사람들의 흔적으로 꾸며줬을 노인과 용팔이. 나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 웃음을 입가에 진하게 새기며 편지와 사진을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힘이 풀려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인에게 힘찬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요?”

“보름.”

“오래도 잤네요.”

쓰러지고 일어나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이렇게 오래 누워있었던 적은 또 처음이었다.

어쩌면 노인이 나를 오두막으로 데려온 것이 시더빌과 캠프 사람들을 위해서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일.

비록 눈을 떴을 때 아이와 일행들이 없어 안타까웠지만, 재회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의복을 갖춰 입은 내가 오두막에 걸려있는 장비들을 하나하나 챙겨 입으며 노인에게 물었다.

“상황은요?”

“시더빌이 근방 패잔병을 추격하고 난민들을 받고 있어. 아마 이 근방 생존자들을 다 모으는 것 같은데, 현장이 정리되는 대로 아마 나머지 두 개 도시를 공격할 거야.”

나와 노인이 자리를 비운 이상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에덴 원정팀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없는 사이에도 시더빌과 캠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는지 사후처리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위해 착실하게 준비했고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저력은 하나둘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로 일행들의 마음을 전해 들은 나는 울고 있을 거라 생각한 채연이가 의젓하게 버티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노인은 금방이라도 시더빌로 떠날 듯 준비를 하는 나에게 한숨이 묻어나는 얼굴로 만류했다.

“조금 더 쉬어도 괜찮을 거야. 용팔이도 있고, 나도 다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하면…….”

“교주가 살아있어요.”

“…….”

그러나 조금만 더 휴식을 취하라는 노인의 강요는 내가 교주를 완전히 죽이지 못했다는 변명 하나로 정리가 되었다.

나는 분명 교주의 오른쪽 눈에 대검을 쑤셔 넣고 뇌를 휘저어 놓았다. 하지만 심장이 멈출 만큼 치명적인 상처 때문에 놈의 목숨을 끊어놓지는 못했고 하얀색 변종의 도주로 결국 마무리를 저지당해야 했다.

물론 신경과 변종의 감각이 보냈던 속삭임은 교주가 다시는 두 발로 일어나지 못할 거라 확신하게 했지만, 모든 진상을 두 눈으로 확인한 나는 내 손으로 놈의 멱을 따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변종을 조종해요.”

하얀색 변종이 더글러스 시티로 향했던 우리를 습격한 일, 그리고 무전을 받은 순간 산에서 느껴지던 누군가의 시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짙은 흑막의 휩싸여있는 교주의 짓이었고 완전히 변종의 몸을 가진 나는 그가 태어났던 깊은 심연을 두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진실을 말한다면 백이면 백 나에게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하겠지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그 손가락질마저 감내하게 했다.

그리고 변종과 함께 도주한 교주를 보았던 노인은 내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지 어쩔 수 없이 차 열쇠를 챙기며 물었다.

“계획은?”

목숨을 건 전투로 기울어진 판은 한번 뒤집혔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혼란스러운 상황은 정말로 파국을 맞이할지, 아니면 그 끝을 보게 될지가 결정됐기에 잠자코 앉아 고민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국의 정치 상황과 분명 유리한 상황임에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심연의 깊이.

그러나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나는 그동안 갖췄던 일말의 두려움과 망설임을 떨쳐내며 대검과 권총을 몸에 착용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먼지가 닦여있는 에덴의 모자를 푹 눌러쓰며 노인에게 말했다.

“한국하고 에덴 쪽에 알려요. 미국과 정식으로 접촉하겠다고.”

한낱 출렁임을 조류라고 일컫는 교주에게 진짜 파도가 무엇인지 알려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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