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82화 (282/313)

# 282

2부 79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미국 뉴욕 JFK 국제공항.

종말 전이라면 많은 사람으로 붐볐을 이 거대한 국제공항은 전 국토가 봉쇄된 뒤로 군용기나 간혹 주요 인사들이 타고 다니는 국내선만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 넓은 공항에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몇 남지 않은 공무원들과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뿐이었고 공항 내부를 돌아다니는 그들은 하루하루 계속되는 의미 없는 순찰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닥에 널린 캐리어 더미들과 치우지 못할 정도로 많이 굴러다니는 생활 쓰레기들.

그리고 그사이를 지나가는 한 군인이 조용히 하품했다.

“오늘도 봉쇄랍니까?”

“인우드(Inwood) 쪽에 구덩이가 하나 생긴 모양이야.”

“아하, 어쩐지 대낮부터 시끄럽더라니.”

인우드(Inwood)면 JFK 공항 바로 밑에 주거지역이다.

주택단지가 밀집된 만큼 예고도 없이 등장한 구덩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초기대응 빨라서 많은 시민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구덩이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괴물 놈들은 4시간이 지난 지금도 육군을 한곳에 묶어두고 있었다.

새로 생겨난 구덩이가 정리될 것 같으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싱크홀.

많은 학자가 연구에 매달렸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구덩이의 패턴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질문한 군인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이러다 뉴욕까지 큰일 날까 봐 걱정이네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근무나 서자고.”

재수 없는 소리로 치부하고 싶지만, 갈수록 나빠지는 상황에 질문을 받은 군인은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부분 배급제로 돌아선 식량 상황과 발현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싱크홀.

시민들은 겁에 질려 집안에 처박혔고 갈수록 치안은 안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군인 신분이기에 안전할 수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공항을 순찰하는 군인들은 소총을 굳게 쥐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귀에 착용하고 있던 삽입형 이어폰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관제탑의 통신이 들려왔다.

[NW 706 비행기 편 활주로 진입. 모든 근무자 2번 게이트로 와주십시오.]

“응? 오늘 전부 결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고 받은 건 없다고 들었는데…….”

사전에 통보받은 내용이 없다. 하지만 관제탑에선 JFK 공항에 일본에서 오는 비행기 편 하나가 착륙했다고 통신이 날아왔고 유리창 너머로도 육중한 비행기가 활주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가한 평일을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지시에 허겁지겁 게이트로 향하는 공무원들과 군인들.

그리고 순찰을 하던 이 두 명 또한 소총을 앞세우고 2번 게이트를 향해 재빨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 - -.”

그리고 3분 뒤, 군인 두 명이 현장에 도착하자 게이트 앞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차근차근 입국 절차를 밟고 있는 인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전에 이미 이야기가 끝내기라도 했는지 직원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본에서 온 연구팀을 바라봤고 연구팀 또한 무미건조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름대로 기대를 안고 출발했던 연구 원정과는 다르게 귀환길은 그 환영인파도, 기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군인은 맥이 빠져버렸는지 입맛을 다시며 동료에게 말했다.

“저번에 그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 마지막 희망이니 뭐니 하던…. 한 몇 달 전에요.”

“다 똑같지, 뭐.”

종말이 왔음에도 기자는 가십거리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몇 달 전만 해도 이 사태의 원인을 밝히러 떠나는 연구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며 신문을 뽑아냈지만, 그 마지막 희망이라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갱신되고 있는 씹을 거리였다.

성과가 없으면 대우도 없고 환영도 없다. 거창하게 출발한 것 치고는 너무나 조촐한 귀환식에 군인은 입맛을 다시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구팀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다른 군인 하나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뜨며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 남자도 연구원입니까?”

일본으로 떠났던 연구팀은 20명 정도의 연구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국 절차를 밟고 있는 연구팀 중 유난히 눈에 띄는 남성이 있었는데, 혼자 양복을 입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정말 기네스에나 나올법한 거대한 체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 남성의 차례가 오자, 군인은 소총 손잡을 꽉 쥐며 긴장된 눈빛을 굴렸고 입국 절차를 받는 직원도 눈에 띄게 떨리는 목소리로 남성의 여권과 관련 서류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남성의 신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지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입국 후 무슨 일을 하실 예정입니까?”

이들의 정체와 목적이 뚜렷한 이상 관련 정보만 확인되면 그냥 보내주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직원은 남성의 덩치를 보고 긴장했는지 입버릇처럼 입국 절차 때 던지던 질문을 했고 이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그냥 가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큰 체구의 남성은 정말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큰 체구에 다부진 얼굴, 그리고 큰 체구만큼이나 두꺼운 목소리는 침묵이 휩싸인 주변에 울려 퍼졌다.

“비즈니스(business).”

여권과 관련 서류에 찍혀있는 이 남성의 이름은 카즈마, 국적은 일본. 연구팀의 경호원 신분으로 이들과 동행했으며 곧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하지만 진짜 카즈마는 아직 일본에 있었고 짧게 대답한 이 남성은 곧 실종될 예정이다.

그리고 진짜 이름을 속으로 숨긴 두식이는 강 형사가 시키는 대로 잘했다는 뿌듯함에 히죽 웃었고 곧 다시 모자를 쓰며 유유자적 공항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곰과 같은 기세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지만, 두식이는 자신의 가족들을 본다는 생각에 그 시선조차 가볍게 떨쳐내 버렸다.

“……사람이 맞겠죠?”

“…….”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두식이를 넋 놓고 바라보던 군인은 팔과 목에 돋은 소름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다른 동료는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며 두식이의 큰 몸집에서 느껴지는 투기를 읽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꺼운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무언의 하울링.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적은 상대했을지 모를 만큼 두껍게 쌓인 퇴적층을 아주 잠깐 엿본 군인 두 명은 서서히 멀어지는 두식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에덴에서부터 온 최대의 증원군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미국에 도착했다.

*       *       *

이번 전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최초이자 최후로 벌였던 시더빌의 투쟁은 끝내 전멸할 것으로 예상하던 생존자들의 승리로 들어갔고 교주와 지휘부를 잃은 광신도 놈들을 제각기 모여 사방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치는 놈들의 뒷모습을 지켜본 민병대들은 지하실에서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주민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렸고 긴장과 전의만이 감돌던 시더빌에는 오늘 하루 기쁨이 묻어나는 소소한 축제가 벌어졌다.

하지만 승리의 주역의 가족들인 캠프 사람들과 노파의 일가는 그 축제를 같이 즐기지 못하고 침묵과 슬픔이 가득 끼인 회의실에 모여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혹시 크게 다쳤나요? 그것만 좀 말해주세요, 제발.”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물기가 어린 눈가를 닦은 강수련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용팔이가 있었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 그쪽으로 간절한 시선을 보내며 복귀하지 않은 노인과 곽동윤의 소식을 기다렸다.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가 이 불리한 전황을 뒤바꿔준 책 속의 영웅.

하지만 무슨 일인지 도시로 돌아온 에덴팀은 자잘한 상처를 입은 용팔이밖에 없었고 노인과 곽동윤의 모습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에 지하실에서 뛰쳐나온 강수련과 채연이는 혹시 그 두 사람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걱정에 자초지종 사정을 물었다.

‘곧 오실 거에요.’

하지만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 용팔이는 두 분은 무사하다고, 곧 복귀할 거라는 대답만을 한 채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곽동윤과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 채연이와 강수련에게마저 숨겨야 하는 진실.

무전기도 있고 작전 지역도 불과 2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을 텐데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복귀하지 않는 걸까?

당연히 곽동윤의 행보가 이해가 되지 않은 그 두 사람은 애원하다시피 물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회의실까지 당도한 용팔이는 동상처럼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형님이……. 형님이 조금 다치셨어요.”

하지만 용팔이는 강수련이 참고 또 참으며 한 마지막 질문까지는 침묵할 수 없었는지 결국 입을 열었고 급소가 관통당해 심장이 정지했던 형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과연 다쳤다고 치부할 만큼의 상처인지는 모르겠지만, 채연이와 눈을 마주친 용팔이는 조금 다쳤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용팔이가 드디어 입을 열자 회의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고 채연이와 강수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훌쩍임을 참으며 속으로 슬픔을 삼켜냈다.

그러나 노파는 아직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수련을 대신해 용팔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치료 시설은 분명 시더빌에 있는데……. 못 오는 이유라도 말해주면 마음이 편하겠어.”

시더빌의 주민과 난민 중에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와 시설이 충분히 있다.

비록 상당한 수의 부상자들 때문에 의료품이 부족할지 몰라도 광신도 놈들이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물품을 차차 노획하면 되는 일.

하지만 다쳤다던 곽동윤은 시더빌로 복귀하지 않은 상태고 용팔이의 말에는 큰 모순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저렇게 입을 다무니 사람들을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고 결국 짙은 한숨을 내뱉은 용팔이는 붕대로 감긴 이마를 살며시 긁으며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자기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몸이 치료되는 대로 바로 가겠다고……. 그전까지 상황을 조금 수습해달라고요.”

평범한 팀원이 말했다면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곽동윤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신뢰는 그 어떤 벽보다 단단했기에 사람들은 짙은 의문과 걱정을 가지면서도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입장이었지, 지금 이 자리에는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수련과 채연이를 향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눈물은 얼마나 더 흘려야 멈추게 될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격정의 고통에 혹시 정신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이곳저곳에서 몰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채연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울음도 슬픔도 아닌 고개를 추켜들며 일어난 다부진 각오였다.

“아직 동부를 떠도는 난민들이 많아요. 그리고 놈들이 버리고 간 물품들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하고요. 아빠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시련은 곽동윤만을 강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채연이는 사람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얼굴에 다부짐과 독기를 품고 아빠가 꼭 무사할 거라는 확신을 심장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괜찮다고, 지금 만큼은 슬픔이 아닌 다시 되돌아 사람을 위한 길을 만들어두자고 말했다.

한참 소녀라는 명칭을 달 나이에 능숙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그 모습.

회의실에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던 침묵은 어느새 사라졌고 귀여우면서도 너무나 대견한 채연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사람들은 그 아빠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했다.

“꼬맹이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이제 우리 차례지.”

그리고 파이프 담배를 재떨이 위에 턱 하고 올려둔 노파는 테이블 위에 양손을 다부지게 움켜잡고 있는 채연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곽동윤과 그 일행들이 없었다면 시더빌의 주민들은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며 절망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구세주처럼 내려온 그들은 이기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는 상황을 보란 듯이 뒤집어 냈고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던 최대의 적들은 이곳에서 몰아내 주었다.

생존자라는 돛을 달고 있는 돛단배라면, 적어도 저 앞에 보이는 별 정도를 따라갈 줄 알아야 하지 않은가?

*       *       *

- - - - - -부우웅.

석양을 끼고 지나치는 푸른색 산맥은 상념을 저절로 몰고 올 만큼 아름답고 광대했다.

그리고 그 산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고 있는 노인은 오늘 하루도 밤을 보낼 장소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주변을 살핀다.

동윤이가 괴물의 피를 투여받은 지 이틀하고도 반나절. 다행히 그날 멈춰버렸던 심장은 피를 투여하자마자 기척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고 입을 쩍 벌린 변종의 피는 온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 - - - - -.”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뒷좌석에 누워있는 곽동윤은 쓰러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채 이틀이 지난 여태까지 잠이 들어있었다.

마치 가사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듯 잔잔하게 뛰는 심장박동과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몸.

이제 반 인간인 상태에서 탈피한 곽동윤은 무언가를 준비하기라도 하는지 번데기처럼 기세를 웅크렸고 그런 그를 차에 태운 노인은 최대한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오늘도 차를 몰았다.

“……동윤아, 뭐가 그렇게 슬프냐?”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 곽동윤은 유일하게 눈물이라는 변화를 흘리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습이 익숙해진 노인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듣지 못하는 그에게 조용히 읊조렸고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황혼에 시선을 던진다.

혹시 자신의 욕심이지 않았을까, 이로 인해 동윤이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몰려오는 죄책감.

하지만 노인이 운전하는 차량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없이 펼쳐지는 산길을 달려 나가고 있었다.

구불구불하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본 길은 지금 달리고 있는 산길처럼 굴곡지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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