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2부 7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쿵-! 파스스스스.
“흐흑-!”
“- - - -엄마!”
어두운 지하실에는 많은 이들이 촛불 하나에 의존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더빌 외곽에서 폭음이 들려올 때마다 하나뿐인 촛불은 정신없이 일렁였고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에서는 먼지가 파스스 떨어졌다.
밖에서 얼마나 치열한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잔잔한 여파.
하지만 부상자들과 전투를 할 수 없는 인원들이 모인 지하실에서는 누가 이기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오직 두려움과 불안함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생존자들이 열심히 싸우듯, 이곳에선 몸을 웅크린 이들을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는 인원들이 있었다.
“아주머니, 그러다 감기 걸리세요. 여기 담요…….”
“이분 피부가 너무 차가워요! 여기 따뜻한 물 좀 주세요!”
“어? 벌써 떨어졌어요?”
가만히 있으면 희망이 도망간다. 자신들을 거두어준 남자가 항상 말했듯 에덴의 아이들은 두려움이 자욱한 이 순간에도 지하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노력 덕분인지 지하실에 모여있는 주민들은 두려워할지언정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돌발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한기가 몰아치는 지하실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괜찮을 거다, 그래, 분명 괜찮을 것이다.
생존자들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가족이 싸우고 있을 저 치열한 전장에서 모두가 무사하기를 빌었고 오직 혼자 타오르는 촛불은 그 모든 것을 상징하듯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덜컹-!
“채연아.”
그리고 에덴의 아이들이 바삐 움직이며 사람들을 보살피는 그 순간 하나뿐인 지하실 문이 열리며 흙먼지로 범벅이 된 강수련과 이연경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피난 신호가 떨어진 시더빌에 잠시 다녀왔는지, 화약 냄새와 흙먼지를 풀풀 풍기며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 무언가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모자라 꼭 수급이 필요했던 담요와 황급히 끓여서 가지고 온 따뜻한 물이었다.
폴폴 김이 솟아오르는 따뜻한 물에 저절로 모이는 시선.
채연이는 자신을 부르는 엄마에게 환히 웃으며 달려갔다.
“엄마! 밖은요? 상황은 좀 어때요?”
지휘부나 전투팀이나 다 지상에 있어 소식 전달이 힘들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적의 중심부로 들어간 자신의 아빠와 소중한 가족들.
채연이는 애써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아빠를 향한 걱정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두근두근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둔 강수련은 정말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미세하게 떨고 있는 채연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안심이 묻어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쳰씨가 성공한 것 같다고 말해줬어.”
본대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산 중턱에서 대지를 진동시키는 큰 폭발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폭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시더빌 민병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전방을 향해 뛰쳐나갔고 후방에서 큰 피해를 본 광신도 놈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연락이 끊긴 지휘부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야전 간부들.
당연히 쳰과 캠프 군인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총공세를 펼쳤으며 산불로 번진 화마와 혼란을 맞이한 광신도 놈들은 하나둘 각개격파 당하기 시작했다.
물론 바퀴벌레 같은 그놈들을 전부 전멸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번 작전이 목숨을 걸고 이긴 대승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 - - 아!”
그리고 이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채연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또 한 번 울타리가 되어준 아빠를 향한 미안함과 그런데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가 이미 굳은살이 박인 아이의 심장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훌쩍이는 채연이를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강수련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지하실에 조용히 머물렀다.
* * *
추적추적 내리는 눈물의 비는 차가운 날씨와 만나 하늘을 수놓는 함박눈으로 변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앉는 그 첫눈은 왜인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먹먹함이 섞인 슬픔과 같았고 하얀 세상은 뿌연 시야처럼 눈가를 닦게 만든다.
타오르는 불과 눈이 만난 이 이질적인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는 한 인간이 남기고 간 신념은 아지랑이처럼 떠나지 못해 흔들리고 있었다.
“훅, 훅, 후욱!”
“- - -아아- -아아아-!!”
노인의 새하얀 백발은 땀으로 범벅이 된 지 오래고 주름진 눈에서는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입을 꾹 다물고 참으려고 해도 멈추지 않는 울음과 거친 숨.
노인은 바닥에 쓰러진 곽동윤의 위로 올라가 심장을 압박하며 이를 악물었고 이성을 잃은 용팔이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창백한 곽동윤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미 멈춘 그의 심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언제나 서 있을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봐도 죽었다고 말할 출혈량과 상처다.
하지만 노인과 용팔이는 마치 잠이 든 듯 누워있는 곽동윤의 죽음을, 그리고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 - - - - - - -.”
아무리 가슴팍을 눌러도 심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목구멍에 숨을 불어 넣어 봐도 꺼진 촛불은 다시 붙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기면 살릴 수 있을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어보지만, 쓸데없이 나타난 이성이 초를 깬다.
그래,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함정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손을 떠난 현실을 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상상하기도 싫었던 결과는 눈앞에 쓰러져있다.
노인은 허망한 눈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내가 너를 어떻게 보내냐. 내가 너를 지금 어떻게 보내…….”
생각보다 많은 전력이 빠져나간 본대는 다 차려진 밥상에 불과했고 빠르게 광신도 놈들을 처리한 노인과 용팔이는 교주와 싸우고 있을 곽동윤을 도와주기 위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산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창문에서 뛰쳐나와 순식간에 사라지는 변종은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꼬여 있었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리고 노인은 이것이 모두 한 사람을 겨냥한 함정이었다는 걸 직감한 순간 분노로 소름이 돋는 팔다리를 움직여 재빨리 문을 박살내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는 곽동윤이 아닌, 서 있는 채로 심장이 멈춘 신념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먼저 가는지, 또 뭐가 그리 행복해서 웃고 있는지.
노인은 악몽인지 아니면 비정한 현실인지 모를 상황과 마주해 결국 가늘게 이어지던 이성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놓아버린 그 이성은 분노도 놈들을 향한 증오도 아닌 속을 썩어 문들이 지게 만드는 슬픔과 후회, 죄책감이었다.
자식을 잃었을 때 이후로 절대 흘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입에서는 절규 같은 설움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직 미미한 체온이 남아있는 곽동윤을 끌어안은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할 것 같이 따뜻한데, 숨이 멈춘 것조차 모를 만큼 곤히 잠들어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먼저 떠나버렸다.
노인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입을 열어 용팔이를 불렀다.
“- - - - -용팔아.”
하지만 이 모든 비극보다 더 원망스러운 것은 끊어진 이성 사이를 오가는 현실감각이었다.
동윤이가 먼저 떠나고 정신은 움직일 수만큼 피폐해졌지만, 저 시더빌에 남아있는 또 다른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쓰러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꺽 꺽 울음을 내뱉은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피투성이가 된 곽동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갈라진 목소리로 용팔이를 불렀다.
놈들이 후퇴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본대를 폭발시키고 시더빌로 돌아가야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늘 우리 곁을 감도는 죽음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용팔아, 가자. 동윤이가 너무 춥다.”
죽음의 순간은 외롭고 추웠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마지막을 위해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인은 곽동윤을 들춰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닥에 주저앉아 허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용팔이를 부르며 빨리 돌아가자는 말을 읊조린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쏟아지는 눈물. 노인은 자신의 살점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아이들과 강수련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했다.
항상 선두에서 빛을 밝혀주는 등대가 사라지고 이제 앞길에는 짙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산장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발목을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용팔이가 붙잡았다.
“영, 영감님.”
“용팔아, 우리 인제 그만…….”
심정지가 온 지 8분이 지났다. 그 어떤 유능한 의사가 와도, 아니. 병원을 통째로 옮겨와도 동윤이를 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용팔이는 아직 미련이 남는지 노인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런 용팔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노인은 인제 그만 놓아주자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눈물로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용팔이는 미련과 허망함이 아닌 분명 희망이라는 빛을 두 눈에 머금고 필사적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 영감님!!! 영감님, 저기! 저거!!”
완전히 흩어진 줄 알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아예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빨리 저곳을 바라보라는 다급한 용팔이의 목소리는 어둠으로 절인 눈길과 마음을 이끌었고 노인은 용팔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을 만큼 어두운 구석에 놓여 있는 검은색 상자 하나.
용팔이가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자에는 분명 눈처럼 새하얀 가루들과 투명한 캡슐 용기에 담긴 검은색 액체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있었다.
“마약…….”
괴물의 피를 마약 성분과 정제해 만든 광신도 놈들의 사료.
이곳이 놈들의 본거지인 만큼 산장 어딘가에 마약이 있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약이 있다는 것이 아닌 왜 용팔이가 마약과 검은색 액체를 가리키며 노인을 붙잡았느냐다.
그러나 흐린 정신 속에서도 총명함을 잊지 않고 있던 노인은 금세 용팔이의 생각과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머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뇌리에 입을 헤 벌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 - - -아.”
마약을 만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사용하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투명한 비닐에 감겨 쌓여있는 마약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이 가는 것은 괴물 놈들의 피로 보이는 재료였는데, 그 피는 질이 좋아 보이는 용기와 특수한 방법으로 보관한 듯 역겨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래, 저걸 사람 혈관에 투입하면 독약을 맞은 것처럼 죽거나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변종이 된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저주를 내리고 싶다면 사용하기 딱 좋은 악마의 액체.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한순간 번쩍 빛났다.
“용팔아, 놈들이 쓰는 투여기가 분명히 있을 거야. 빨리!”
“- - - - - - -!”
심정지가 온 지 9분이 지났고 앞으로 1분이면 완전한 사망이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눈앞에 나타난 희망은 그 1분이라는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어지게 했다.
그리고 노인은 들춰 맸던 곽동윤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피로 범벅이 된 소매와 옷을 찢어냈고 이내 정맥 주사를 할 수 있게 모든 준비를 순식간에 끝낸다.
그리고 노인은 재빨리 검은색 상자로 다가가 마치 타르처럼 꿈틀거리는 액체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쥐었다.
“- - - - - -.”
곽동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변종도 아니었다.
마치 바둑판 위에 흑과 백돌이 치열하게 겨루듯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곽동윤의 몸.
그리고 그 치열함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은 그를 만들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치명적인 공격으로 인해 박살이 나버렸고 완전한 죽음을 알리는 심정지가 4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은 없다. 기적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이 변수와 곽동윤에게 달려있었다.
“영감님!”
그리고 그 순간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용팔이는 몸을 날리듯 뛰어와 마약을 투여할 때 사용하던 주사기를 내밀었고 노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실린더 안을 검은색 액체로 가득 채웠다.
10초, 9초, 8초, 7초. 이 모든 원흉의 근원이자 동시에 곽동윤의 생명줄이 되어줄 동아줄이 혈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주사기를 찔러 넣은 노인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곽동윤에게 놈들의 피를 주사했다.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린다. 옆에서는 흐느끼는 용팔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첫눈이 오는 날, 이상하게 회색 봄은 코앞에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곽동윤은 항상 일기 끝에 작성하던 한마디를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