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79화 (279/313)

# 279

2부 76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옛 생각이 났다.

서울 한복판을 살기 위해 뛰어다니며 일행들의 발걸음을 이끌던 과거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삶의 혈투.

하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내 몸에는 짙은 흉터와 세월의 흔적이 남았고 항상 곁을 지켜줄 것 같은 노인과 용팔이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을 맞았다.

하지만 지금 어둠으로 휩싸인 눈밭을 뛰는 이 순간만큼은 나는 왠지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눈이 내렸고 지금은 콘크리트의 숲 대신 하얀색 산을 미친 듯이 올라간다.

그리고 내 숨소리와 일행들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무의식에 공간에서 어느덧 저 멀리 들리는 총성도 서서히 침묵에 집어삼켜진다.

한시가 급하다. 숨을 쉴 시간도 없었다. 나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백색을 가로질렀다.

“- - - - - -.”

그리고 경사가 급한 능선을 얼마나 뛰고 또 뛰었을까.

우리가 몸을 숨기고 있던 구덩이는 이미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았고 교전 지역과 별세상인 백색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하는 함박눈과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

나는 땀과 눈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고 곧 실뭉치처럼 굴러다니는 놈들의 기척을 찾기 위해 신경을 펼쳤다.

핑핑 돌아가는 눈과 온몸을 강타하는 짜릿한 전기신호.

눈을 감았음에도 모든 요소가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얼마 있지 않아 유색 속 흑백에서 번쩍 눈을 떴다.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없이 꿈틀거리는 내 신경은 분명 교주의 것으로 보이는 강렬한 존재를 포착했다.

여태 악행을 지시하고 관망만 했던 것이 교주 놈은 마지막 순간인 지금만큼은 직접 행차해 광신도 놈들을 이끌고 있는지 저 앞에는 수많은 실타래가 엉킨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검지를 재빨리 들어 올려 놈들의 본대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고 뒤쪽에서 힘겹게 따라오고 있는 노인과 용팔이가 잽싸게 몸을 움직여 공격을 위한 대형을 펼친다.

서서히 이명으로 바뀌는 소음과 사방으로 튀는 눈 조각.

얼마 남지 않았다. 시더빌이 버텨줄 때까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 - - - - -!!”

그리고 광신도들의 본대를 300m 앞둔 그 순간 우리가 가야 하는 진행 방향에서 손전등 빛과 광신도 놈들의 웅성거림이 적나라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공세를 취하는 시더빌의 움직임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눈밭을 뛰고 있는 광신도 놈들.

그리고 놈들은 이곳이 후방임을 말해주고 싶었는지 탄약상자와 중화기들을 챙기고 허겁지겁 전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순간 멈추고 소총을 들어 올리는 나와 일행들.

별다른 신호는 없었지만, 우리는 마치 한 몸이 된 듯 타깃을 나눈 뒤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따닥-! 딱! 따다닥!

한 명당 한발씩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비록 숨은 폐가 터질 듯 달아올랐지만, 눈앞에 정렬된 조준선은 정확하기 그지없었다.

소음기에서 묵직한 총성이 터지고 산 아래를 허겁지겁 내려가던 놈들의 가슴팍과 머리에 총알 꽂혔다.

이리저리 비산하는 피들과 흰 눈밭을 구르는 손전등. 노인과 용팔이는 사격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달려가 운 좋게 급소를 피한 놈들을 확인사살 했고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체를 발로 밀며 숨을 훅 내뱉었다.

한 탄창을 전부 비우지는 않았지만, 저 앞에 존재하는 본대를 위해 미리 갈아 끼운다.

“가자.”

그리고 확인사살을 끝낸 노인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내 어깨를 툭 밀었고 용팔이는 나를 따라 탄창을 교환했다.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우리가 내뱉은 입김은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수놓았고 하늘에 뜬 별은 이 모습을 보지 않겠다는 듯 모습을 감춘다.

하얀색으로 스크레치 된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치 무형의 돔처럼 어둠을 밝히는 조명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고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놈들이 세운 본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교주가 직접 행차했다는 소리에 낑낑거리며 기지를 세웠을 광신도 놈들.

하지만 나와 일행들은 그것이 전부 헛수고였던 것처럼 너무나 손쉽게 장벽 첨탑을 기웃거리는 초병을 제거했다.

“용팔아.”

그리고 노인이 장벽에 넘어지듯 등을 기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용팔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쭈그려 앉아 미리 챙겨온 갈고리 밧줄을 꺼내 들었다.

광신도 놈들이 나름 교주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야영지를 차린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 이 나무 장벽은 쓸데없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용팔이가 내민 갈고리를 받아들고 소총을 뒤로 맨 노인은 긴장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하얀색 입김을 훅 훅 내뱉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목표는.”

“움직임이 없어요.”

“……서두르자.”

이쯤 되면 교주도 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왔다는 걸 변종의 감각을 통해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영지 중앙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놈은 가만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고 대다수 광신도 놈들은 전방에서 벌어지는 교전을 보급하거나 지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다.

수상하다, 이상하다. 막판에 벌어질 반격은 예상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가만히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작전을 철회할 수 없었고 이미 많은 희생을 투자한 노인과 나는 뒤로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뒷걸음질 치면 낭떠러지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나아가야 했다.

노인은 들고 있던 갈고리 밧줄을 힘껏 던져 장벽 위로 통로를 만들어낸다.

탁-!

그리고 나무 장벽을 넘어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우리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무전기 잡음과 빛이 들어오는 캠프를 향해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다.

정신없는 전방과 마찬가지로 지휘본부인 이곳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노인이 소리 없이 초병을 제거한 덕에 놈들은 우리가 왔는지도 모른 채 자기 할 일에 빠져있었고 저 멀리서는 연신 전방을 향해 몰려가는 놈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지체할 것이 없다. 노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을 용팔이에게 내밀며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탄약고를 가리켰다.

“신호하면 날려버려.”

놈들은 소유하고 있는 모든 탄약을 한곳에 모아둔 것 같지는 않지만, 사방에 분산해둔 것을 고려하더라도 저 탄약들은 한곳에 모아두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혹여나 저곳에 폭발물이라도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 주변은 진정한 지옥으로 변해버릴 것이 분명한 상황.

그리고 그 점을 빠르게 캐치한 노인은 조명이 비추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폭발물이 가득 든 가방을 넘겼고 막중한 임무를 맡은 용팔이는 굳은 얼굴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기회가 있을 때 놈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 지휘체계의 혼란과 피해를 줘야 한다.

나와 노인이 교주를 공격하고 나오는 즉시 용팔이는 점화 장치를 붙여 이곳을 완전히 날려버릴 것이다.

- - 쿵 -!

“움직여!”

그리고 시더빌과 광신도 놈들이 교전이 한참 절정을 치닫고 있는지, 전방에서는 붉은색 불꽃을 일으키는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낀 우리는 그 폭발을 출발신호 삼아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용팔이는 본대 안에 존재하는 무전시설과 탄약고를 처리하고 나와 노인은 교주의 존재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산장 건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뜀박질을 시작한 그 순간 용팔이가 뛰쳐나간 방향에서는 격한 총소리와 함께 수류탄이 놈들의 천막으로 기어들어 가는 폭음이 들렸고 우리는 그 소리만을 기다렸다는 듯 소총을 뽑아 들었다.

쾅-!

따닥-! 딱딱! 따다닥!

전방의 교전이 절정으로 치달은 이상 은밀함을 요구하는 건 욕심이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 큰 피해를 주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모든 화력을 이곳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고 사전에 이미 합의를 해둔 용팔이는 아낌없이 총알과 수류탄을 집어 던지며 본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에서 벌어진 교전 탓인지 최소한의 친위대와 통솔 인원만 남아있던 본부는 한순간 혼란에 빠져버렸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방에서 귀를 따갑게 울려왔다.

하지만 나와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교주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산장 앞까지 달려가 이쪽을 향해 황급히 뛰쳐나오기 시작하는 친위대 놈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 - - - -끄아악!”

“동윤아!”

조준할 시간이 없다. 나와 노인은 그대로 땅을 지탱하고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놈들에게 총알을 난사해 탄창 하나를 순식간에 비워버린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비명과 용팔이가 날뛰는 공터에서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

그리고 빠르게 탄창을 교체한 노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한순간 마주한 눈빛을 통해 노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은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변고를 눈치챈 광신도 놈들이 서둘러 회군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놈들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선 교주를 향한 공격은 필수적이었고 공격진의 핵심이 내가 여기서 묶여있을 틈이 없었다.

‘부탁한다.’

‘버텨줘요.’

0.5초간 짧은 눈빛 교환.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신뢰와 믿음을 재빨리 확인했고 나는 노인에게 예비 탄창이 든 띠를 던져주며 그대로 뒤돌았다.

그리고 노인의 엄호를 등에 업어 조잡한 울타리를 넘은 나는 저 앞에 보이는 산장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핑핑 날아다니는 총알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음. 시간이 나에게 싸움을 걸었다.

내 정신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얌전히 잠자코 있던 피는 펄펄 끓어올랐고 삐쭉 서는 정신은 온몸에 모든 신경을 세운다.

한 마리 짐승이 된다. 시간이 느려진다.

나는 마치 어두운 통로처럼 이어지는 절망을 뚫고 뛰쳐나왔다.

쨍그랑-!

산장에는 강렬한 교주의 존재감과 함께 친위대로 보이는 놈들이 문을 틀어막고 버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는 교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울타리를 넘어 몸을 날렸고 유리창과 나무판자로 막혀있는 창문에 그대로 몸을 날렸다.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힘이 직선을 향하자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유리창과 나무판자.

하지만 느려진 시간을 핥는 감각은 비산하는 유리 조각 사이에서 모든 것을 인지하게 했고 나는 공중에 몸을 날린 그 상태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문을 틀어막고 있던 친위대 세 놈이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털썩.

“……어?”

탕-! 탕탕탕탕!

마치 깃털이 바닥에 떨어지듯 가벼운 착지.

앞으로 뻗은 권총은 사선을 노렸고 방아쇠 위에는 검지가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잠시 인지 부조화가 온 놈들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어두운 방 안 내부는 순식간에 총염이 수를 놓았고 문을 지키고 있던 놈들은 9mm 탄이 급소에 박혀 들며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 - -후욱, 후욱.”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와 정신없이 이어지는 감각의 물결.

나는 그대로 땅을 짚으며 재빨리 일어났고 소진한 권총 탄창을 교환했다. 그러자 저절로 삼켜지는 마른침.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교주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끌어당겨 파지한 권총과 눈동자는 마치 뻥튀기처럼 펑펑 뛴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복도와 불쾌한 마약 향이 느껴지는 공기는 내 감각을 극대화했고 교주가 쉴 수 있게 개조한 산장 곳곳에는 놈들의 더러운 성물과 핏자국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그리고 복도에는 오직 내가 내는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쾅-!

“죽어어어어-!!”

하지만 나를 교주 곁으로 보내줄 쉽사리 친위대 놈들이 아니었다.

내가 제법 긴 복도를 중간쯤 걸어가자 첫 번째 방이 부서지듯 열렸고 곧 상반신을 탈의한 광신도 한 놈이 대검을 든 채 나에게 달려들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역한 구린내와 찢어지는 괴성. 놈은 마약과 흥분으로 인해 이성을 잃기라도 했는지 몸을 사리지 않고 권총 아래 복부를 향해 대검을 찔러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방에 숨어 나를 노리고 있는 놈들이 있다는 것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던 나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려 칼부림을 피해내고 괴성을 지르는 놈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내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무너지는 중심축과 가슴팍으로 오는 놈의 머리. 나는 대검을 꺼낼 필요도 없이 아래턱에 권총을 겨누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팡-!

턱뼈가 박살나고 안면을 통과한 총알이 머리를 휘젓는다. 저지력이라는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즉사한 광신도 놈.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는지 기회를 노리고 있던 광신도 두 놈이 건너편 방에서 뛰쳐나왔고 내가 놈을 처리하는 틈을 이용해 이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이미 폭발한 신경은 그 위험요소마저 전부 잡아내었고 나는 본능이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즉사한 놈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가 움직임과 동시에 이쪽을 향해 쏟아지는 총알은 몸을 엄폐해준 비곗덩어리에 전부 꽂혔고 나는 놈의 어깨 위로 권총을 뻗어 그대로 두 놈의 대가리를 날려버린다.

탕 탕-! 탕탕탕! 훅하고 터지는 숨과 함께 미끄러지듯 권총에서 빠져나오는 빈 탄창, 나는 시체를 넘어트리며 탄창을 교환했다.

“- - - - - -.”

이제 이 산장에 남아있는 친위대는 없다.

하지만 방에 틀어박혀 있는 교주는 무슨 이유에선지 나오지 않고 있었고 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일행들의 움직임에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빨리 죽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변종의 본능과 마치 긴장을 핥듯 방아쇠를 매만지는 검지.

나는 놈들이 시체와 탄피를 넘어 재빨리 뛰어갔고 마지막으로 남은 방의 문을 걷어찼다.

운명이라는 거친 조류가 온몸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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