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2부 75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경계면을 포위한 광신도 놈들이 시더빌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나무와 고철 따위로 만든 장벽은 더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인 소모전이나 시가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데, 전투 인원과 물자 하나하나가 소중한 우리는 장기전으로 갈수록 전투 자체가 불리했다.
증원이 없는 배수진, 물러난다면 최후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일뿐이었기에 우리는 애매한 버티기가 아닌 ‘승리’라는 어려운 결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고 노인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예상에 두고 있었는지 우리를 향해 읊조렸다.
“우리가 전략 전술적으로 유리한가?”
전략은 적보다 많은 아군을 모으는 것이고 전술은 적보다 많은 아군으로 싸우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문제, 노인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던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전반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되짚는다.
놈들은 인간을 사냥하고 다니던 광신도 놈들이고 우리 민병대는 겨우 기초적인 훈련을 받은 민간인이다.
비록 개인화기에서 우세를 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놈들이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우리는 함부로 우위를 재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를 향해 다시 읊조렸다.
“그렇다는 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그래, 결론은 이것이다. 적이 공세를 취하면 방어하고 물러나면 재정비한다.
양쪽이 별다른 변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이런 뻔한 양상은 계속될 것이고 소모전은 놈들이 원하는 결과이자 우리가 걱정하는 비극이기도 했다.
눈을 감고 검지로 조용히 책상을 두들기는 노인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안.
이 고뇌와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는 하얀색 눈이 소복하게 쌓여가기 시작했고 첫눈을 맞이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밖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침묵과 고민이 계속되는 그 순간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팀을 꾸려서 적의 중추를 친다.”
무모한 도박이다. 자칫 잘못하면 다 죽는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들은 사람들은 이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리한 도박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공세를 취하고 전면전이 아닌 기동대를 꾸려 광신도 놈들의 중추를 공격한다.
까닥 잘못하면 투입된 팀은 물론이고 시더빌까지 위험할 수 있는 작전이었지만, 노인은 어째선지 스페이스 A를 가지고 있는 도박사처럼 지도위에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작전이 가지는 모순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올리버 중사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며 노인에게 물었다.
“타격 목표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통상적으로 기동대를 침투시키는 이유는 후방 보급소나 그 뒤에 존재하는 전략적, 전술적 목표를 타격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올리버 중사와 군인들은 별다른 반대 없이 노인이 세운 작전에 동의를 표했지만, 어디를 공격하냐에 따라 작전 내용이 달라지기에 상세한 개요를 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지도를 살펴보던 노인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교주.”
“- - - - - -.”
높낮이가 없는 그 짧은 한마디에 올리버 중사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켰고 주름진 눈을 감고 상황을 방관하던 노파는 눈을 번쩍 뜨며 노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밖에서 내리는 첫눈처럼 고요하던 방 안 분위기는 노인의 한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격한 감정의 돌풍으로 가득 차버린다.
교주가 누구인가? 이 혼돈의 주원인이자, 이 지역에 살아가는 생존자라면 누구나 죽이기를 원하는 광신도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대한 규모의 광신도 놈들을 등에 업고 공권력이 사라진 이 땅에 무자비한 폭거를 취하고 있는 진정한 악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을 죽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표에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래, 이론상 불가능하겠지.”
잠깐 인지 부조화가 온 올리버 중사는 땀이 흐르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노인에게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는 노인은 손을 들어 중사의 말을 끊었고 당연한 의문이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파른 산길과 좁은 전장 때문에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수진을 친 시더빌에 증원이 있을 턱이 없다.
말이 좋아 군사작전이지 여차하면 그대로 적진에 포위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자살행위,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노인의 말은 어불성설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분명 남아있는 한 수가 있다는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위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올려두었다.
“지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웬만한 차량보다 빨리 움직여. 거기다 단일 무력으로는 한 팀이 와야지 상대할 수 있고 아무런 제약 없이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 말 그대로 사전 정찰이나 공군 지원이 없이 교주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거야. 거기에 공세를 받아줄 적절한 모루만 있으면…….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규격 외 무기. 모두의 시선은 노인이 지도위에 올려둔 돌멩이로 향했고 나 또한 지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붉은 선과 돌멩이들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는 지도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작게 추려놓기라도 하듯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전장 한복판에 방금 노인이 올려둔 돌멩이는 작고 연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모두의 앞에 이끌듯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노인이 올려둔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 - - - - - -.”
다른 사람들이 공세를 취해 놈들의 시선을 끌어올 동안 은밀하게 본대로 접근한다.
그리고 본대 자체에 타격을 입히던, 교주를 목표로 움직여 처지 하던 적진 한가운데를 휘젓는 모든 움직임은 놈들에게는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순간 나에게 몰리는 시선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
나는 손에 쥐고 있는 돌멩이 조용히 내려놓으며 숨을 들이켰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했다.
착, 착. 담배에 불을 붙인 노인이 나에게 말했다.
“동윤아.”
또 사지로 가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같이 가자.
나는 노인의 눈빛에서 진한 죄책감과 함께 이번만큼은 기필코 같이 가주겠다는 신뢰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다리와 마치 담금질을 하다 깨어나듯 단단해진 영혼.
나는 넋을 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창틀로 조용히 다가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솜인형 같은 함박눈이 내렸는지 바닥에는 어느덧 하얗게 내린 눈밭이 수를 놓았고 그 위에서는 시더빌의 아이들이 모두 모여 뛰어다니고 있었다.
분명 밤이 되어 사방은 어두웠지만, 눈에서 반사된 눈이 부신 빛은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비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애처럼 웃고 있는 채연이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내 눈에 희망을 고요히 투영시킨다.
“……내일 밤에 시행할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창틀에 걸터앉아 조용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자 묘한 돌풍이 우리를 감돌아 바닥에 가라앉았다.
내 귀에 여실히 들려오는 심장박동과 마른침을 삼키는 고요한 소리.
캠프의 군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례를 붙였고 노파의 일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그 살벌한 폭풍전야 속에서도 오랜만에 아이처럼 뛰어놀고 있는 채연이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이 잡히고 아이의 옆으로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친다.
* * *
해가 떠 있는 낮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싸울 수 없는 인원은 전부 안전한 지하실로 향했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참사를 위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두었다.
그리고 총을 잡을 수 있는 인원이라면 누구나 자원해서 총을 들었으며 캠프의 군인들과 일가 사람들은 부지런히 차를 몰아 탄약과 개인화기를 개인에게 보급했다.
시시각각 보이는 놈들이 정찰대와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하는 검은색 연기.
우리가 바삐 움직이는 그 순간에도 광신도 놈들은 차근차근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이 되자 산 중턱에는 놈들의 모습이 관측됨과 동시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299번 국도는 튼튼한 바리케이드로 전부 봉쇄되어버렸다.
이제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
하지만 나와 노인 그리고 용팔이는 그런 낭떠러지에도 보란 듯이 후문으로 나와 시더빌과 멀리 떨어진 눈밭에 흰 도포를 깔고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렇게 숨죽여 잠복하기를 3시간. 온몸은 얼어붙고 팔다리에 감각은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정면을 노려보는 정신과 시야만큼은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 - - -후.”
온몸에 매달려있는 대검과 허벅지 홀더에 꽂혀있는 권총.
우리의 오른쪽 손에는 소음기가 달린 자동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등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는 잔뜩 담긴 탄약과 무거운 폭발물의 무게가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나와 일행들은 익숙하다는 듯 손에 입김을 불며 추위를 몰아내었고 저 멀리 황혼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하늘을 바라보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 옆에서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던 노인이 한숨을 쉬는 나에게 피식 웃으며 물었다.
“춥냐?”
“버틸만해요.”
남녀노소 수많은 생존자가 사지로 걸어가는 기동대에 자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사 선택권을 가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노인과 용팔이를 데려가는 것을 선택했고 나머지 지원자들은 따로 엄호팀을 만들어 반대쪽에서 놈들의 시선을 뺏어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냐하면 지금 같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상황에선 내 속도를 힘겹게나마 따라올 수 있는 용팔이와 노인이 최적의 팀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비를 점검하며 사색에 빠진 그 순간 내 앞주머니에 달린 무전기에서 고요한 침묵을 깨는 작은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작전 시작 5분 전입니다.]
무전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어딘가 잔뜩 긴장되어 보이는 쳰이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작전 시작이 5분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노인과 용팔이는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며 도포 위에 쌓인 눈을 조심히 털어냈다.
앞으로 5분 뒤면 쳰이 작전 시작을 알리면 시더빌 민병대들은 도시에서 총동원한 차량을 이끌고 도시 앞 공터에서 포위망을 구축한 놈들에게 중기관총과 박격포를 쏟아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쪽에 있는 엄호팀은 부산스럽게 움직여 놈들의 시선을 뺏는 가짜 기동대 역할을 해줄 것이고 산 중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셋은 그 혼란을 틈타 재빨리 산을 넘는다.
[3분 전.]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이 톱니바퀴처럼 잘 들어맞아, 나와 일행들이 교주가 위치한 본대에 성공적으로 잠입한다면 노인과 용팔이는 가지고 온 폭발물은 본대에 설치해 화려한 불꽃놀이를 일으킨다.
조용하기만 하던 후방에 피어오르는 폭발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갑자기 사라진 지휘체계의 혼란이 우리의 등을 밀어줄 순풍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주를 죽이기 위한 사선을 쫓을 것이다.
[1분 전! 1분 전! 정문 열립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숨을 훅 내뱉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작전 시작만을 기다린 쳰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민병대에게 지시를 내렸고 저 멀리서는 수많은 차량의 엔진소리와 함께 눈부신 자동차 조명이 어둠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목덜미에 닿는 소름과 순간 번쩍 떠지는 눈.
우리의 목숨을 건 밤 9시는 쳰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GO GO GO!!!]
- - - 퐁! - - - - -
쾅-!!!!!
박격포 포탄이 하늘을 가로질러 놈들이 위치한 포위진에 그대로 직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꽃처럼 피어오르는 폭발과 함께 공터를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차량에서는 우리가 노획한 중기관총에서는 끊임없이 총알이 뿜어져 나왔고 이동 차량에서 내린 민병대들은 개인화기를 견착한 채 두려움을 떨쳐내는 방아쇠를 당겼다.
조용하던 시더빌과 평야에는 한순간 불어오는 격한 조류로 인해 미친 듯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와 일행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눈 속을 뛰쳐나가며 눈앞에서 일렁이는 전운의 조류에 거침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 - -후욱, 후욱- - -후욱.”
구덩이에서 뛰쳐나오자 모든 세상이 백색이었다.
발이 밟히는 바닥도 흰색, 저 앞에 펼쳐진 평야도 백색.
전운이 감돌던 능선에는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보였고 시더빌 앞에는 놈들과 교전을 치르고 있는 수많은 총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빛 한 점, 소리 한 점 없는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우리는 마치 저 전장과 완전한 다른 세상인 우주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서서히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뜀박질.
주변을 가득 채운 어둠은 순식간에 양옆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분명히 정면을 직시했다.
‘아빠는 그러지 않잖아.’
계속되는 어둠과 내 몸을 당기는 조류가 계속된다. 그리고 순간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채연이의 목소리는 이 모든 행동과 생각을 무의식 속으로 빠트렸다.
하지만 저 멀리 수많은 광신도 놈들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막연함을 짐승처럼 씹어 삼켰다.
한 마리의 야수가 되자. 놈들보다 더한 괴물이 되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으로 얼룩진 바닥을 밟고 또 밟았다.
‘아빠는 도망치지 않잖아.’
실타래가 보인다.
완전한 어둠을 헤쳐 나간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