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2부 74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감각에 잡히는 기척이라는 것을 형상화해 표현해보자면, 마치 불규칙적으로 엉킨 실타래와 같다.
인간은 하얀색 실로 뭉쳐서 굴러다니는 것 비슷한 느낌이고 놈들과 변종은 마치 꿈틀거리는 기생충들이 모여 하나의 군체를 이룬 느낌과 비슷하다.
물론 직접 느껴보지 않는 이상 타인은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 모든 물체는 자기들끼리 뭉쳐있는 선처럼 느껴진다.
끊어지면 죽음, 이어지면 삶.
선은 때론 혈관이 되기도 하고 아직 붙잡고 있는 미련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저 앞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의 실타래는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100m 반경에 난민이 있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 - - - - - -.”
그리고 수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사방에서는 대원들이 내뱉는 입김이 긴장으로 얼룩진 채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분명 시더빌의 초병이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이들이 무장하지 않은 난민인 것을 확인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정찰대와 싸우고 온 이들은 쉽사리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적당히 유지되는 이 긴장감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 나는 별다른 제지 없이 주의하라는 짧은 말과 함께 앞장섰고 기침 소리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밟히는 낙엽들과 바삐 움직여 정면을 핥는 눈동자.
난민들을 풀숲이 가려진 공터 한가운데 있었고 나는 앞을 향해 소총을 겨눴다.
“힉!”
그리고 때마침 공터 앞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한 여성 생존자는 총을 겨누며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어 버린다.
경련하듯 떨리는 몸과 새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 그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몸은 깡말라 있었고 얼굴에는 씻지 못해 더러운 때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소총을 천천히 내리며 마른 입술을 핥은 나는 고개를 들어 마치 무리에서 쫓겨난 동물처럼 공터에 모여있는 난민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광신도 놈들이 침공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쳤을 그들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Mr 곽! 나일세! 나!”
그리고 내가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난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그 순간 공터 안 유일하게 존재하는 천만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돌고 외관도 깨끗한 무리의 가장 선두에는 나에게 친한 척 양손을 벌리며 다가오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선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있는 더러운 야망과 다른 이를 이용해 제 욕심을 차리는 종말 속에 위선자.
이들은 채연이네를 가차 없이 버리고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빅벤드의 서장과 생존자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서장.”
“그래! 맞네, 서장이야! 역시 기억하고 있었어!”
어찌 잊을까. 첫 만남부터 어긋났고 그 후 부상자와 약자들을 미끼 삼아 도망친 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잊을까.
많은 사람이 굶주렸고 지쳐 쓰러지며 죽어갔다.
걸어온 땅에는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으며 소중한 자와 이별한 사람들의 눈물은 완전한 강을 이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타인의 생명을 담보삼은 이들은 멀쩡하게 살아있었으니 생존의 모순이 또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누가 이들을 벌할까,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의라면 도대체 어떤 신이 이들을 벌해줄까.
허공에 읊조림이 맴돌았지만, 답은 없었다.
“하하! 내가 말했잖아! 아주 친하다니까!”
조용히 눈치를 보던 서장은 내가 자신을 기억해주자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며 생존자들에게 외쳤다.
이 지경이 났는데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작은 정치판을 벌이는 서장, 첫 만남 때 공손함을 위장하던 그 말투도 어느새 거만한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곽동윤이라는 말을 듣자 서장 근처에 서 있던 잔존 민병대들과 사람들은 이제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이곳에서 마저 소외당한 나머지 난민들은 무장한 우리의 눈치만을 살폈다.
지시를 내려달라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메리제인과 대원들.
하지만 나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늘어놓는 서장을 바라봤다.
“자자!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빨리 들어…….”
탁-!
그리고 자기 허세가 진하게 섞인 일장연설을 끝낸 서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여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정치적 요소가 다분하게 묻어나는 그 손을 '탁' 쳐냈고 내 행동만을 기다리고 있던 메리제인과 대원들은 재빨리 소총을 견착하고 그들을 겨눴다.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는 분위기와 넋이 빠진 얼굴로 엉거주춤 물러나는 서장.
내 입에서는 녹진한 한숨이 터져 나오며 뜨거웠던 분노는 차가운 머리와 만나 심장 위에 뚝뚝 떨어졌다.
나는 난민들 사이를 한번 훑어보며 서장에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빅벤드 생존자들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내 몸과 용팔이를 치료해준 의사였다.
비록 통성명조차 나누지 못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죽을 뻔한 내 목숨을 살려주고 사경을 헤매던 용팔이까지 치료해준 의사 선생님.
하지만 이들은 빅벤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난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서장을 조용히 쳐다보던 나는 한순간 미간을 작게 찡그리는 그의 위선을 읽을 수 있었다.
“하하, 보시다시피 상황이 참 안 좋잖아? 레이건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도망을…….”
“거짓말이에요!”
서장은 그가 도망쳤다고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던 난민들 사이에서 한 거적때기를 걸친 여자가 뛰어나오더니 울음과 처절함이 섞인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거짓말이에요! 그러자 한순간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는 서장과 여자를 보며 흉악해지는 민병대들의 기세.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외친 여자는 이미 많은 것을 놓은 상태인지 이쪽으로 비틀비틀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피와 오물이 잔뜩 묻어있지만,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분명 하얀색 간호사복임을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에요……. 레이건 선생님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셨어요. 이 사람들…. 아니, 이 새끼들이 미끼 삼아 버리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다고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죄책감과 존경하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찍소리 못하고 목숨을 연명한 역겨움.
그 모든 것이 점철된 혐오의 감정은 서장을 미워하고 동시에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놓아 우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감정을 조용히 삼켰다.
내가 쓴 일기를 조용히 품에 안고 빨리 가라고 약까지 챙겨주던 그 사람 이름이 레이건이었구나.
나는 너무나 평범한 그 이름을 입에서 읊조리며 이제는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은 그에게 형체가 없는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눈치를 보던 서장이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미친년 말 듣지 말게. 습격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뿐인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인가? 비록 부상자들은 다 따라오지 못했지만…….”
“메리 제인.”
“Sir!”
노인은 사람이 비겁해지면 말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 말이라는 걸 방금 확인한 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서장의 말을 자르며 메리제인을 불렀다.
그래, 사람들을 이끌다 보면 죽는 이도 나오고 슬픔을 가슴을 묻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서장의 거죽 안에 꿈틀거리는 너무나 더러운 실타래를 보며 이 모든 말이 거짓말이고, 변명이고, 찢어발기고 싶은 역겨움임을 알 수 있었다.
실성해서 우는 간호사와 살지 못해 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전해졌고 내 입에서는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저기 따로 모여있는 사람들 전부 몸수색해주시고 시더빌로 데려가세요.”
“Yes, Sir!”
여기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은 저들에게서 자기혐오를 읽었다.
나는 왜 이리 약할까, 나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온갖 죽음을 담보로 여기까지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메리 제인에게 어떠한 신도 해주지 않은 타인의 자비를 그들에게 내밀며 시더빌까지 안내해주라고 요청했다.
더러운 난민과 깨끗한 비겁자들 사이에 그어지는 분명한 선.
내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간호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손을 뻗자 혼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그녀는 실성하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조, 좋은 분이셨는데……. 착하신 분이셨는데….”
“………….”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모두가 원하지만, 모두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
결국 살아남은 인간은 외면한 자들뿐이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무리 정의가 올바르다고 생각해도 언제나 그 각오를 꺾고 사람을 홀리는 합리화.
그리고 내 손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도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팔을 붙잡고 간호사를 일으켜준 나는 알고 있었다. 무너진 건 세상이 아닌 그녀 자신이라고.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솔해서 복귀하겠습니다.”
악몽은 끝이 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랜 고독과 자기혐오에 종착지는 서러운 눈물뿐이었다.
나에게 인계받아 여자를 부축해주는 메리제인과 아까와는 다르게 숨죽인 눈물을 내뱉는 간호사.
나머지 대원들도 내 지시에 착실하게 따라 더러운 몰골에 난민들의 몸을 가볍게 수색하고 시더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직 남아있는 찌꺼기는 돌아서려는 나를 붙잡았다.
“이, 이봐!”
당혹함과 분노에 찌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시더빌로 돌아가려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얼굴이 붉어진 서장과 일부 소수의 빅벤드 민병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만 해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에 희희낙락하던 그들은 순식간에 역전된 입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장은 설마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인지 부조화가 온 얼굴로 말을 더듬었지만, 그들도 내 태도 속에 숨은 의도를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서장은 조급한 목소리로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인원만 20명이야! 총만 쥐여 주면 당장이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20명인데 그걸 한낱 치기 때문에 마다한다고? 자네는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해, 현실을!”
그래, 대충 훑어만 봐도 전투가 가능한 인원만 밥을 먹이고 잠자리에 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은 살아가는 서장은 여기까지 온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일 급한 전투 인력을 줄 테니, 대접해주고, 자리를 보존해주고 빅벤드에서 그랬듯 큰소리치게 해 달라.
아무리 많은 피와 양심을 흘려도 바뀌지 않는 위선의 심리에 나는 순간 몰려오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버린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그 살벌한 태도에 순식간에 바뀌어버리는 분위기는 서장과 민병대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서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현실이 이겁니까? 여기까지 도망치는 거?”
더 많은 인원이 있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잠시만 내려놓았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장은 도망치고 또 도망쳐 이곳까지 왔고 그 많은 생존자를 저 지옥에 내버려 두고 왔다.
시체는 태워지지 못한 채 놈들의 조롱감이 되었을 것이고 분명히 있었던 기회는 전부 재처럼 날아가 지금의 상황이 당도했다.
최악의 최악, 막다른 길에 낭떠러지. 그토록 현실을 울부짖었지만 두 손에 남은 건 이상보다 못한 찌꺼기였다.
“자, 자네도 그 난리를 겪어봤으니 알지 않나? 사람들을 이끌다 보면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야! 몇몇 사람 살리겠다고 다 죽으라는 거야!”
에덴의 장벽 아래에는 몇몇 사람을 위해 다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총을 뽑아 서장을 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어쩌면 낙오라는 비참한 최후가 이들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충동을 참아냈다.
변명에는 침묵으로 대하고 자신이 다르지 않았다고 악을 지르는 원망은 외면으로 상대한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몸을 돌리자 서장을 향해 소총을 겨누는 대원들로 인해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어버린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곧 우리를 맞이해줄 노인에게 연락했다.
“이쪽 상황 끝냈어요. 금방 합류할게요.”
[수고했다.]
난민 30명을 확보하고 시더빌로 복귀한다.
그리고 고민 없이 낙오시킨 저 쓰레기들은 이곳을 떠돌다 죽든 아니면 평생을 도망치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해 달려오려다 대원들에게 저지당해 바닥에 넘어지는 서장과 결국 허벅지에 총을 맞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하는 그 따까리들.
나는 소총을 뒤로 매며 시더빌로 향하는 무리에 선두로 재빨리 걸어갔고 뒤에서는 등을 미는 순풍과 함께 서장이 지르는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다.
“- - - - 너도 똑같잖아 -! 이 위선자 새끼야! 너랑 내가 뭐가 다른데- - -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아악-!!”
두 발로 서 있는 순간이 고통이고 내딛는 발자국이 죄책감이다.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죽은 이와 꿈에서조차 나를 놓아주지 않는 악몽.
저들의 말대로 서장과 나의 차이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용서를 받기 위한 비겁함이 아니라 단 한 번도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대원들과 일행들을 따라잡고 가볍게 추월한다.
그리고 언제나 내 자리였던 선두에 서자 맞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걸음을 딛자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걸음을 멈추자 내 뒤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 * *
“20분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벌써 지역 경계면에 야영지를 차렸더군요.”
“규모는?”
“예상보다 더 많습니다.”
해가 지고 나자마자 우리를 급하게 소집한 쳰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채 놈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기했다.
시더빌 부근을 빼곡하게 포위하고 있는 놈들의 위치.
교주는 나와 일행들이 시더빌로 도망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 경계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그 산간지역 부근과 299번 국도를 전부 틀어막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인원보다 4배는 넘게 차이나는 규모 앞에 노파와 일가 사람들은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훅 내뱉었다.
“……도움을 청하네.”
노파와 일가들이 지금까지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이끌었다고 하지만, 지금부터는 민간인과 전문가의 영역이 판가름 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노파는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앉아있는 노인에게 정했고 나와 군인들은 그 누구보다 노인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증원도 없고 그저 버티기만 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
하지만 노인은 모두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고 멋들어지게 백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상났어? 왜 이리 다들 울상이야.”
그리고 여유만만한 그 한마디는 모두의 절망과 걱정을 녹여내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의 가방에서 나오기 시작한 수많은 서류와 지도위에 표기되기 시작하는 붉은 선들의 향연.
백전노장이자 수많은 위기에서 에덴을 살아남게 만든 노인의 마법은 머나먼 타국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안 지니까 걱정하지 마.”
어두운 창밖에서는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