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74화 (274/313)

# 274

2부 71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영감님.”

“알았다.”

노인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고 소총과 가방을 재빨리 챙기며 저격 포인트로 적당해 보이는 4층 건물을 향해 뛰어간다.

비록 조준경이고 스코프가 다 숙소에 두고 온 상태지만, 기계식 조준기로도 충분히 저격이 가능한 노인이니 걱정이 없었다.

쳰 덕분에 약 30초가량 벌 수 있었던 시간,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오기 전에 미리 자리를 잡으려 용팔이를 데리고 국도와 이어져 있는 입구를 향해 재빨리 뛰어갔다.

그러자 저 멀리서는 차 엔진소리와 함께 두 무리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용팔이를 우거진 가로수 사이로 밀어 넣으며 모습을 숨겼다.

불어오기 시작하는 흙먼지와 놈들이 무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위험본능.

내 옆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킨 용팔이가 물었다.

“…누굴까요.”

“모르겠어.”

미국에 사는 생존자라면 블랙 라인이 주는 공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한때 지옥이 강림했던 이 시티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고 나와 일행도 당분간은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었다.

하지만 정말 불시에 나타난 저 정체 모를 무리는 이곳이 어떤 곳인 것을 모르는 것처럼 너무나 태연하게 달려오고 있었고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시티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부웅.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정문을 통과하는 검은색 대형 SUV.

이 지역을 돌아다니는 낡은 트럭들과는 다르게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그 검은색 쉐보레에는 분명 광신도를 나타내는 문양은 보이지 않았고 짙게 선팅이 되어있는 창문은 차 외관처럼 꺼멓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SUV들이 정문을 통과한 그 순간 앞섬에 꽂아둔 무전기에서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노인이 판단을 내려달라는 듯 나에게 무전을 보내왔다.

[어쩔까.]

“……잠시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것은 적을 단순히 섬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 지역에 우리의 적이 아닌 집단이 있겠냐마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나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많은 고민과 신중함을 가해야 했다.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벌집을 건드렸다가, 감당하지 못할 후폭풍이 몰려오면 어찌하겠는가.

나는 사정권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노인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지시를 내리며 용팔이와 함께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자 정문에서 벗어난 차량 두 대는 이쪽을 향해 달려와 본 건물 앞에 멈춰 선다.

덜컹-!

시동을 껐는지 고막을 울리던 거친 엔진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와 용팔이는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놈들이 차를 세운 공터로 천천히 접근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무리는 이곳에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위협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차 문을 열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차량 두 대에 나눠 탔는지, 대략 7명으로 보이는 무장 인원들.

그들은 하나 같이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임무 복에 질 좋은 방탄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쪽은 파란색 모자를 또 다른 한쪽은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적은 인원으로 왜 차를 두 대나 끌고 다니나 했더니, 3명과 나머지 4명은 서로 다른 팀이나 소속인 모양,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용팔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나에게 물었다.

“군인들이에요?”

“아닌 것 같아.”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이 내뿜는 특유의 분위기나 기색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에 유난히 예민한 나는 이들이 전문적인 훈련은 받았지만, 메리제인과 올리버 중사에게서 느껴지는 그 군인 신분의 딱딱함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예리한 것 같으면서도 주머니에 숨어있는 것 같은 은밀함.

나는 온갖 광학 장비가 매달려 있는 자동화기와 든든한 부무장들을 조용히 주시했고 차에서 내린 그들은 아비규환만이 남은 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줄이며 노인에게 말했다.

“일단 지켜보세요.”

정체는 아직 파악하기 힘들지만, 광학 장비와 방탄복을 갖춘 놈들의 무장상태가 생각보다 좋았다.

거기다 아우라와 신경을 자극한 생존 본능은 그들이 만만치 않은 요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섣부르게 움직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변수는 아직 존재했기에 나는 노인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지시를 내리며 불어오는 바람과 새소리에 기척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러자 차에서 내린 놈들은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정면에 보이는 본건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고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담을 빠져나온 건물로 향하는 놈들의 뒤를 그대로 밟아 공터에 세워진 차량에 접근한다.

“오…….”

검은색 대형 SUV 두 대. 노인이 봤다면 당장 훔쳐가자고 했을 만큼 잘빠진 이 쉐보레 차량은 내부 공간도 널찍했고 유리창도 검은색 선팅으로 은밀히 가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방탄유리에 방탄몸체로 보이는 외관은 이 종말이 온 세상에 나만큼 잘 어울리는 차량이 있냐고 콧대를 올리는 것만 같았다.

이것들…. 민간 집단이 아니다. 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차량 유리를 만지려는 용팔이의 손을 빠르게 제지하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경보장치를 경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나는 본 건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격 포인트에서 대기하고 있을 노인에게 무전을 쳤다.

“정부 요원인 거 같아요.”

[FBI? CIA?]

“맞거나 비슷하겠죠.”

[하! 아마 CIA 그 꼴통 새끼들이겠지.]

블랙 라인이 휩쓸고 간 폐허를 찾아온 불청객.

그들은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값비싼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전문 군인에 필적할 훈련도 받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차량과 유니폼에는 마치 신분을 감추듯 그 어떠한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은밀함은 도리어 수상함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단서와 로직을 결합해 그들이 정부에서 온 인원이며 더글러스 시티 본 건물에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는 용팔이와 무전 건너편에서 침묵을 지키는 노인. 나는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온 놈들을 확인하고 다시 무전을 보냈다.

“……차량으로 돌아오면 덮칩시다. 되도록 살려두세요.”

[그래.]

미 정부가 내 변종화 데이터를 원한다는 건 이미 에덴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경계해야 할 레벨일 뿐 피부에 직접 와닿는 위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정부 요원들은 그 생각을 단숨에 깨부수는 위험한 이레귤러의 등장이었다.

긴장으로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마른침.

내 행적을 좇아온 것으로 보이는 놈들을 캘리포니아 동북부 지역에서 활개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손속이 과격하기로 유명한 CIA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노인도 내 생각에 짧은 동의를 보내며 무전을 끝낸다.

검지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떨림. 나는 조정간을 돌리며 용팔이에게 말했다.

“탑승하기 전에.”

“네.”

무려 정부 요원이 사용하는 방탄 차량이다.

유리는 고사하고 타이어를 터트려도 그대로 달릴 테니 이들이 탑승하게 두면 곤란했다.

그리고 내 짧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용팔이는 조금 시간이 걸릴 놈들을 환영해주기 위해 적당한 자리를 찾아 뛰어갔고 나는 놈들의 차량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쳰에게 무전을 보내려고 했다.

금방 집으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또 꼬여버린 일정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쳰씨, 일단 놀라지 마시고…….”

탕-!!!

“- - - - -!!!”

뭐?

고요함에 취해있던 고막이 갑자기 터져 나온 총성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총성이 들려오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엎드린 나는 재빨리 소총을 앞으로 들며 가장 먼저 용팔이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용팔이는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자신이 무사함을 알렸고 고막을 때리던 총성은 두어 번 더 들려오기 시작했다.

탕-! 탕탕탕!

총성은 밖에 노출되어 있던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닌, 분명 정부 요원들이 들어간 본건물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뭐지? 혹시 남아 있는 변종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그 당혹스러움은 얼마 있지 않아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경악으로 인해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미친놈들, 자기들끼리 쏘기 시작했어!]

“왜요?!”

[나도 몰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나는 우리가 공격당한 게 아니라는 걸 자각한 순간 재빨리 건물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고 용팔이는 주춤주춤 사방을 살피다 빠르게 내 뒤를 따라왔다.

그 어떠한 전조도 추측도 없이 갑자기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정부 요원들.

당황한 나는 뛰어가는 와중에 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몸은 건물 입구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순간에도 2층에서 연신 들려오는 총소리는 그들이 서로가 교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나는 재빨리 문을 걷어차 건물 안으로 진입해버린다.

“- - - - - -!!”

그리고 문을 박참과 동시에 바닥을 정신없이 굴러다니는 탄피들과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시체 한 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교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는지, 2층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도대체 왜 서로에게 총구를 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요원을 한 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선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개머리판을 견착한 채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는 본능이 가리키는 꼭짓점을 수없이 핥아낸다. 어디지?

“- - - - - -아악!!”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시체들을 밟고 뛰어오른 나는 실시간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본능에 온몸을 맡기며 코너를 돌았다.

그러자 복도 끝방에서는 총성과 함께 굵직한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고 나는 그곳을 향해 몸을 날리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박찼다.

그 순간 코끝을 꿰뚫는 화약 냄새와 비산하는 나뭇조각.

시간은 한순간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으며 나는 앞에 보이는 풍경을 빠르게 자각했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져있는 흑인 여성과 그런 그녀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는 한 백인 남성.

누가 봐도 모자를 쓴 팀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방아쇠 위에 재빨리 검지를 얹었다.

표적지가 누구냐.

“- - - -Big Father, 거룩한 영광과 숭고한 자비를.”

하지만 그 순간 내 정신을 혼탁하게 하는 읊조림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찰나가 야속할 정도로 멍해지는 머리와 감각.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광기가 어린 얼굴을 한 채 히죽 웃고 있는 백인 남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Big Father, 거룩한 영광과 숭고한 자비를.

사이비 교주와 광신도 놈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그 말이 정부 요원이라고 생각한 백인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탕-!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놈은 같은 정부 요원을 속인 광신도들의 프락치였고 경악으로 점철된 생각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본능은 재빨리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그리고 짧은 총성과 함께 터져버리는 놈의 머리는 느리게 흐르는 공간에 더러운 뇌수를 흩뿌렸고 동료의 배신 앞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흑인 여성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용팔이의 총소리와 노인이 가하는 저격.

한순간 정리되어 버린 상황에는 나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을 번갈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       *       *

결과적으로 7명 중 2명은 광신도 놈들이 심어둔 프락치가 맞았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 또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심어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주의 암시는 정보국의 그물망을 속일 만큼 대단했고 어디까지 연결되었는지 모를 흑막은 깊이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3개의 배지와 4개의 수첩은 캘리포니아 서북부를 찾아온 이들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3명은 FBI, 4명은 CIA.”

“……이런 식으로 같이 다니기도 합니까?”

“합동작전이 흔한 건 아니지만, 지금 같은 시국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정부 측 요원일 거란 예상은 맞았지만, 설마 앙숙을 자처하는 FBI와 CIA가 같이 다닐 거라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에 왔던 강 형사의 경고가 몰려오기 직전에 폭풍전야였다니, 나는 점점 꼬이기 시작하는 상황에 차라리 신변 정보를 넘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어깨를 붙잡은 노인은 겨우 이거 가지고 놀라냐는 말과 함께 아까 놈들의 차량에서 가지고 온 서류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던졌다.

“봐봐.”

탑 시크릿. 영화에서나 봤던 그 서류봉투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든 나는 노인이 던져놓은 서류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곳에서 몇 장 되지 않는 사진과 관련 서류를 꺼내 들었다.

각각 FBI와 CIA에 문양이 진하게 찍혀있는 극비 서류.

그리고 그 서류 사이에는 캘리포니아 지역 전체를 양분하는 위성 사진이 있었고 그 뒤에는 하얀색 양복을 입은 채 수많은 인파를 가로지르는 교주의 사진이 있었다.

“- - - - -.”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하는 손과 한숨이 터져 나오는 입.

사진을 본 순간 머리에는 번개라도 친 듯 생각이 지워졌고 나는 서류와 사진 더미를 다시 책상 위로 올려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위성 사진과 교주의 얼굴 사진 뒤에는 서울에서 몰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내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침을 삼킬 힘조차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