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2부 6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죽은 자는 불타오르고 산자는 떠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재와 함께 남은 것은 죽음뿐만이 아닌 순응 해야만 하는 상실의 고통도 있었다.
익숙한 죽음과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영원한 이별. 하지만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감정은 생존자들에게 눈물을 요구했고 사람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울었다.
그래, 슬픔은 무뎌질 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도를 끝낸 나는 눈물과 상실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는 생존자들 앞에 섰고 오른손에 꾹 쥐고 있던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 - - - -.”
핑 소리를 내며 열리는 라이터와 함께 솟아오르는 불꽃.
그러자 뒤에서는 눈물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고 불꽃 앞에 혼자 남은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놈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불태워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사그라들기 직전의 촛불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분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손을 펼치기 위해선 무언가를 놓을 줄도 알아야 했다.
나는 종말 속 죽음 앞에 익숙해진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슬픔을 털었고 내려두었던 소총을 들었다.
“준비 끝났다.”
그러자 내가 뒤돌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은 깨끗해진 얼굴로 다가와 짐을 잔뜩 실은 트럭 한 대를 가리켰다.
비록 도보로 시더빌까지 이동해야 했지만 제이콥 부부가 끄는 트럭은 짐과 부상자들을 옮기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생존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출발 준비를 마친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곧 이동하자는 짧은 지시와 함께 시더빌을 향한 여정을 다시 한 번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는 저녁이지만, 광신도 놈들이 언제 습격을 가할지 모르는 국유림에서 밤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한걸음이라도 더 멀리 교전 현장과 멀어져야 했던 우리는 짐과 부상자들을 태운 트럭과 밤눈이 밝은 나를 앞세워 빠르게 하산을 계획했다.
비록 폭풍의 여파에 휩쓸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우리는 생존이라는 공통분모로 서로를 묶어 힘겨운 발걸음을 뗀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저물고 숲속이 어둠에 휩싸이자, 생존자들은 서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앞서가는 트럭과 내 뒤를 따라왔다.
“용팔아.”
“아직 걸을만해요.”
그리고 어두운 숲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위험을 한발 먼저 알려줄 본능에 주의를 기울이던 나는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경욱이에게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걷고 있는 용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번에 입은 중상으로 아직도 후유증을 겪고 있는지 행군이 힘겨워 보이는 그 모습.
하지만 용팔이는 내 탑승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며 다른 중상자들에게 짐칸 자리를 양보했고 이 어두운 숲속에서 옆을 든든히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용팔이를 걱정스레 바라보다, 그 바보 같은 웃음에 전염되어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그냥요. 같이 걸으니까, 든든한가 봐요.”
워낙 엉뚱한 말을 자주 하는 용팔이라 또 시답지 않은 농담을 구상하고 있나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용팔이는 나와 노인이 그리웠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었고 처음 보는 삼촌의 모습에 경욱이는 남몰래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마치 길을 잃었다, 보호자를 만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용팔이.
나는 앞으로 닥쳐올 위험이 막막하면서도 그런 용팔이의 모습을 보니 비어있던 속이 든든해짐을 느낀다.
그래, 비록 힘들고 두렵다더라고 같이 걸으니까 참 좋았다.
“그래.”
나는 짧게 긍정을 표하며 뒤따라오는 용팔이에게 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리고 시더빌에 있는 동안 잠결의 흘려들었던 그들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힘든 발걸음을 디딘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난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난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어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마치 읊조림과 같은 바람 소리는 밤 속 깊은 나무들을 파도처럼 일렁이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쭈, 이 새끼들이 행군 중에 웃어? 나는 저 뒤에서 생고생하는데 너희는 여기 앞에서 웃고 떠들어? 푸닥거리 한번 해?”
그리고 우리가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나타난 노인이 용팔이와 경욱이의 뒤통수를 톡 때리며 웃는 낯으로 대화에 껴들었다.
물론 여유로운 말투와는 다르게 얼굴에는 피곤과 흙먼지가 가득했지만, 우리가 웃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어딘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대열 선두에서 들려오는 숨죽인 웃음소리.
정찰을 끝마치고 온 노인은 쑥스러워 죽으려고 하는 용팔이를 한동안 괴롭히다 저 멀리 어둠에 휩싸인 능선이 끝나갈 때쯤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흔적은 세 갈래로 나눠놨으니 금방은 못 따라올 거야. 그리고 놈들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추격조도 아직 안 보이고……. 일단 좋은 자리가 보이면 야영지부터 꾸리자.”
어째 사람들 몇 명을 데리고 바삐 움직인다고 했더니, 이미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낸 모양이다.
나는 지쳐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일을 처리해준 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시선을 돌려 몹시 지쳐 보이는 일행들과 생존자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래, 이 분야에 도가 튼 노인의 말이니 따라서 나쁠 것이 없었다.
이제 적당히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노인에 의견에 가벼운 동의를 표했고 이내 저 앞에 보이는 적당한 계곡을 가리키며 일행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 * *
사방이 깊은 협곡으로 가려진 계곡이라 마음 놓고 불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는 장작불에 차가운 손을 놓인 나는 노인이 가져다주는 뜨거운 차를 받아들고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싸늘한 밤 날씨에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거센 바람.
야영지 곳곳에서는 기침 소리와 함께 유가족들의 훌쩍임이 들려왔고 나와 노인은 그 초입에 위치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따뜻한 차 한잔과 온몸에 몰려오는 탈력감. 모닥불 앞에 털썩 앉은 노인은 두꺼운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구겨 넣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교주라는 새끼도 변종이니 능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원래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머무는 놈들이 아니잖냐.”
나는 야영지를 꾸리고 일행들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잠이 들자, 아까 간부를 처리하면서 있었던 일을 가장 믿음직한 노인에게 나지막이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의 본질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초창기부터 변종과 싸워온 노인이라면 어쩌면 교주의 정체를 추측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질문에 한동안 생각에 빠졌던 노인은 ‘곽동윤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교주의 변종 능력을 추측해내었다.
“뭐, 거죽을 뒤집어쓰고 인간을 연기하는 놈인데, 지능은 말해봐야 입 아프고……. 광신도 새끼들 꼬락서니를 보니 집단 군체나 암시 쪽 능력이 아닌가 싶다. 그 새끼가 울리는 종소리에 네 몸이 반응했던 거 생각나?”
“네.”
“그게 암시의 시발점인 거지. 그 꼭 개새끼들 사료 줄 때 흔드는 것처럼, 그 종소리가 광신도 놈들을 미치게 만드는 채찍이었던 거야. 근데 생각해봐. 도대체 광신도 새끼들이랑 너의 공통점이 뭐길래, 그 종소리에 서로가 반응했을까? 도대체 공통분모가 뭘까?”
광신도 놈들의 정체를 파헤치는 노인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거세게 불어오는 계곡의 바람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물비린내.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똥이 내 눈동자에 비춰 투영되었고 노인은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침묵이었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린 노인은 투명색 비닐로 포장된 한 흰색 가루를 우리 사이에 던졌다.
놈들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소중히 챙기려던 보물, 그것은 바로 마약이었다.
“너 동인천 전선에서 내가 강 형사랑 보름인가 부랑자 새끼들 조지러 다녔던 거 기억하지. 그때 그 깡패 새끼들이 살판나서 중국놈들이랑 신나게 마약 거래를 했었는데, 당시 인천이 뽕쟁이들 천국이라고 난민촌에 안 돌아다닌 마약이 없었어. 그리고 나랑 강 형사가 그거 팔아넘긴 새끼 잡겠다고 항구를 보름이나 돌아다니면서 마약 냄새만 존나게 맡고 왔지.”
갑자기 2년도 지난 옛날이야기를 하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얼굴을 한 노인은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천천히 꺼내 들어 모닥불 앞에 놓여있는 마약 뭉치를 반으로 갈랐고 마치 더러운 것을 대하 듯 고운 입자의 가루를 얼굴을 찡그린 채 검지와 엄지로 천천히 비볐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몰려오는 거부감과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역겨운 피비린내.
노인은 조용히 내 표정을 살피다 곧 확신이 든 표정으로 말했다.
“로히프놀,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 모르핀, LSD, MDMA, GHB. 의료용부터 시작해서 멕시코에서 들여온 것까지 내가 지구상에서 유통된다고 하는 건 동인천에서 다 본 적이 있어. 근데 이딴 마약은 생전 처음 본다. 아니, 내가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게 뭔지는 그냥 봐도 알아.”
노인은 잠시 바닥에 내려두었던 따뜻한 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약 위에 쏟아부었고 마치 나에게 이것을 보라는 듯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한순간 코끝을 강타하는 역겨운 냄새와 마치 아가리를 벌리듯 절규하는 변종의 본능.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내려 물이 닿자마자 검은색 진창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마약의 정체와 마주했다.
어떤 방법, 또 어떤 방식으로 정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과 만나 그 추악한 정체를 드러낸 마약의 정체는 증오스러운 놈들의 몸에서 나온 역겨운 액체였다.
“최태식 그 새끼가 할 줄 알았으면, 이미 다른 놈들도 해봤다는 소리지.”
놈들의 피를 혈관에 직접 주사하면 10분 내로 죽거나 1시간 내로 변종이 된다.
정신분열, 정신착란, 환각, 자해, 구토, 두통, 토혈, 공격적인 행동. 이 모든 것은 1시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주입 당한 사람은 무의식 속에 빠져있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형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구덩이에서 종말이 만들어낸 강력한 변종이 나온 뒤부터 인간의 변종화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나 또한 한동안 관심을 끄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놈들의 피를 혈관 주입이 아닌, 구강으로 섭취를 한다면? 그 누구도 시도해볼 생각을 못 했던 끔찍한 생각과 결과가 이미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나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교주를 만나거든 두 눈을 믿지 마. 안 보이는 걸 보는 게 네 무기야.”
* * *
나와 광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는 바로 지옥의 존재를 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멀쩡히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는 광신도들이 구덩이에서 나온 그놈들이랑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같은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그들은 충분히 이상했다.
마치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주전자처럼 광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인간의 감정을 너무나 쉽게 버리던 광신도 놈들.
마치 의혹처럼 머리를 맴돌던 로직들은 아까 전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 - -.”
하지만 내가 눈을 감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들려온 부스럭거림은 예민했던 신경을 한순간 깨우게 했고 나는 눈을 감은 채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감각을 뻗었다.
그리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인원을 마음속으로 제외한 나는 얼마 있지 않아 그 소리의 원인이 병상에서 일어난 채연이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채연이.
나는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아이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정신을 잃었던 척하는 것 같은 아이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박, 사박.
내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지 채연이는 야영지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팔이에게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던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나는 무서운 상황에 놓였었던 채연이가 끔찍한 기억에서 도피하기 위해 혹시라도 나쁜 선택이라도 할까 봐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섣부르다는 것과 가봐야 한다는 결정의 순간에서 오는 수백 번의 고민.
하지만 부스럭거리며 사방을 돌아다닌 아이의 마지막 행동은 그런 내 고민을 빠르게 종결시켜 주었다.
“- - - - -.”
내가 근처에 잠자리를 잡았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채연이는 눈을 감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주춤거렸지만, 이내 이쪽으로 살며시 걸어와 내 품에 안겨 왔다.
그리고 아까부터 흘리고 있었는지 눈물을 훌쩍이는 채연이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웅얼거리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무서웠어요, 두려웠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듣지 못해도 느낀다.
나는 가슴 절절히 전해져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아픔과 걱정을 저 밤하늘에 미련 없이 떠나보냈다.
그리고 나는 흉터와 거친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채연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스스로를 가둔 날이 생각난다. 오직 창 하나에 기대 끔찍한 현실을 엿보던 겁쟁이의 인생.
죽고 싶다고 생각했음에도 살기 위해 세면대를 핥던 그 위선자의 인생.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았고 아무리 빌어도 신이 만든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시각각 몰려오는 고독의 속삭임은 누가 산 사람이며 도대체 어떤 것이 시체인지 헷갈리게 했다.
나는 살아있는가? 과연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종말인가, 아니면 스스로인가.
그렇게 죽음은 다가왔고 바뀌지 않는 비참한 결말은 시나브로의 종막이었다.
‘그래, 괜찮아.’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나 알 수 있었다. 작은 공간을 다리 삼아 서로의 위기를, 또 서로의 마지막으로 지켜보던 우리 둘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일어났다. 나는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살았고 생전 처음 손을 잡았다.
오직 차가움만이 존재하던 고독에서 우리가 느꼈던 체온은 흑백의 세상을 현실로 바꾸는 마지막 색감이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너를 구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네가 보호받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단막극의 주인공인 나는 알고 있다.
나를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