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68화 (268/313)

# 268

2부 65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삼촌!”

허공에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처절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경욱이는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서 삼촌을 향해 달려오는 여러 명의 광신도를 발견했고 느리기만 한 자신의 장전을 탓하며 그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다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총을 발사하는 용팔이.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발로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그 모습은 평소 어수룩한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경욱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탄창을 끼워 넣으며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전장을 주시했다.

북쪽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불시에 습격을 가한 광신도 놈들.

다행히 비교적 온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던 캠프 군인들과 사람들이 빠르게 대응했지만, 부족한 총기와 탄약은 우글우글 몰려오는 놈들을 전부 저지할 수가 없었다.

생존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광기를 터트리는 광신도들과 그런 놈들을 막기 위해 온몸은 던지는 사람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섞인 현장은 혼돈과 두려움이 혼합된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10명분의 몫을 거뜬하게 해낸 용팔이는 정확한 사격으로 몰려오는 놈들을 쓰러트리며 경욱이에게 외쳤다.

“경욱아, 뒤로 빠져! 빨리 빠지라고!”

용팔이를 중심으로 뭉친 전투 인원은 일행들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감의 접착제로 똘똘 뭉쳐 연신 몰아치는 놈들의 일선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전은 어디까지나 발악일 뿐,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란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용팔이는 형님이 항상 그랬듯 자신을 미끼로 다른 일행들을 도망치게 하려고 했지만, 경욱이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용팔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못가요! 아니, 안가!”

한쪽이 무너지면 실처럼 유지되고 있는 방어선이 우르르 무너진다.

비록 경험이 적을지라도 자신들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알고 있는 경욱이는 지금만큼은 삼촌의 말을 거부하며 열심히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남아있는 탄창도 이제 다 떨어졌고 숲 곳곳에서는 생존자들이 내뱉는 비명과 코끝을 자극하는 피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언제 내 옆에 방어선이 뚫려 뒤를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방아쇠를 당기는 내내 목덜미를 자극했다.

[ - - -이 - - -이쪽도 있습니다! 이쪽도 놈들이 있어요! 포위, 포위! - - -칙- 치익-!]

그리고 그 순간 옆으로 뛰어드는 광신도 한 놈을 대검을 처리한 용팔이의 무전기에서 다급한 메리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할 수 없는 인원을 데리고 먼저 도망쳐달라고 부탁한 게 겨우 10분 전인데, 저 앞에 무언가 변고라도 생겼는지 메리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잡음과 비명이 섞여 좋지 않은 통신상황과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교전 현장.

하지만 용팔이는 그 잡음과 단순한 단어의 나열 속에서 도망친 일행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팔이는 이를 악물며 사방에서 분전하고 있는 캠프 군인들과 생존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후퇴! 후퇴해!! 대열로 합류해!!”

단순한 추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놈들은 이미 우리가 도망칠 것까지 예상해 노골적인 토끼몰이를 하고 있었다.

이 실 같은 방어선을 10분간 유지했던 게 일행들을 살린 것이 아닌, 서로가 떨어지게 돼버린 패착이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용팔이가 소리를 지르며 엄폐물을 뛰쳐나가자 죽을 각오로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전투 인원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혼란도 잠시일 뿐, 귀에 날아와 박히는 용팔이의 지시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놈들은 10분간 유지하고 있던 방어선을 해제시켰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과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

푸르른 숲은 화마와 짙은 화약 냄새로 범벅이 되었고 뜀박질을 시작한 용팔이는 목이 찢어지라 고함을 질렀다.

“채연아! 수련 누나! 애들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이미 놈들의 포위로 대열은 무너졌는지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는 생존자들과 그런 그들을 잡자마자 칼을 휘둘러 멱을 따는 광신도들.

한동안 유지되었던 평화는 보란 듯이 파괴되었고 용팔이는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할아버지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하는데, 형님이 돌아올 집을 지키고 있어야 했는데, 이 모든 각오가 불가항력이라는 이름 앞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 - -꺄아악!”

그리고 후방으로 후퇴하는 전투 인원과 이끌고 한 1분가량을 정신없이 뛰었을까, 저 앞쪽에서 학살을 당하고 있는 생존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왔다.

큰엄마라고 불리며 먼 타지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그녀, 이 고된 여정과 힘겨운 인생 속에서도 해바라기처럼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버텨주었던 그녀.

겁 많고 여리면서도 그 누구보다 빛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

용팔이의 시선이 꽂힌 그곳에는 바닥에 쓰러진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처절한 발버둥을 치는 강수련이 있었다.

“이 개새끼야!!!”

탕-!

하지만 그것을 발견한 이상 보고만 있을 용팔이가 아니었다.

비록 상처가 터져 붕대 밖으로 피가 흐르고 눈알을 돌아버리기 직전이었지만, 용팔이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고 강수련에게 권총을 들이밀던 광신도의 머리는 그대로 터져버렸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뇌수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강수련.

용팔이는 재빨리 총구를 거두며 그곳을 향해 뛰어갔고 얼마 남지 않은 전투 인원도 그 뒤를 따랐다.

“누, 누나! 수련이 누나!”

그리고 주변에서 응전하는 광신도 놈들을 가볍게 처치하고 달려온 용팔이는 황급히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강수련을 부여잡았다.

얼마나 강하게 저항을 했는지, 짙은 상처가 남은 팔다리와 바닥에 줄줄 흐르는 피.

용팔이는 펑펑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소매로 피투성이가 된 강수련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뒤늦게 도착한 경욱이와 전투 인원이 아비규환으로 변한 현장을 수습하며 용팔이에게 외쳤다.

“삼촌, 다들 무사해요!”

경욱이와 이연경을 제외하고, 현장 투입이 어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강수련을 따랐었다.

하지만 광신도들의 공격을 받은 아이들은 그녀의 분투 덕에 대부분 경상에 그쳤고 뒤로 후퇴한 전투 인원들은 1순위로 보호해야 할 그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포위를 옥죄어오는 광신도 놈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져만 갔다.

이를 악문 용팔이와 표정이 어두워지는 생존자들. 그리고 그 순간 눈가를 파르르 떨며 한쪽 눈을 뜬 강수련이 찢어진 입술 사이로 속삭이듯 말했다.

“채연이…. 우리 채연이…….”

채연이?

강수련은 흐릿한 정신 속에도 마음으로 낳은 자신의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 석 자에 정신이 번쩍 든 용팔이는 채연이라는 이름을 입속에 읊조리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아이 중에 채연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부들부들 떨리는 팔.

용팔이는 정신을 잃기 직전인 강수련의 목덜미를 황급히 받치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을 했다.

“누나! 채연이는요!”

“아아…….”

그리고 용팔이의 질문에 사력을 다해 정신을 잡은 강수련은 채연이가 혼자 뛰어간 방향으로 손과 검지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그녀에게는 마지막 힘이었는지 곧 고개를 떨어트리며 정신을 잃고 만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훌쩍이는 아이들과 점점 좁혀오는 놈들의 포위망에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보는 전투 인원.

그리고 그 현장 가운데 위치한 용팔이는 조심스럽게 점퍼를 벗어 강수련에게 덮어주고 잠시 내려두었던 소총을 손에 쥐었다.

“- - - - 경욱아,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지키고 있어.”

생존자들을 몰살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곳곳에는 놈들이 만들어낸 화마와 소리를 잡아먹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뿔뿔이 흩어져서 싸우고 있는 생존자들과 그 자리에 도태돼버린 용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강수련이 정신을 잃기 전 내뱉은 말에 충실히 반응한 용팔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지막으로 기억해두었던 방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삼촌?”

그리고 용팔이의 지시를 들은 경욱이는 넋이 빠진 얼굴로 손을 뻗어 달려가는 용팔이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목적지를 잃은 그 손은 옷깃에조차 닿지 못했고 터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친 용팔이는 화마가 이글거리는 숲을 향해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채연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혼자 뛰어가 버린 숲을 바라보던 경욱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바닥에 쓰러진 강수련과 아이들을 앞에서 총을 부여잡았다.

*       *       *

탕탕탕-! 탕!

“- - -끄으으윽!”

유일하게 존재하던 방어선이 무너지고 생존자들이 흩어지자, 더는 교전이 의미가 없는 학살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를 가리는 짙은 숲과 그 사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화마.

그리고 그사이를 가로질러 뛰기 시작한 용팔이는 불시에 자신을 습격한 광신도 한 놈을 벌집을 만들어버리며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채연이를 목놓아 불렀다.

“채연아! 채연아, 들리면 대답해!”

강수련이 정신을 잃어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 채연이가 혼자 뛰쳐나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채연이를 데리고 오기 위해 폭풍의 눈으로 뛰어든 용팔이는 놈들을 만나는 족족 쏘고 찌르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상을 입은 몸에는 점점 한계가 오기 시작하는지, 용팔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짙은 기침과 함께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그러나 언제나 쓰러지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걸었던 용팔이는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앞을 향해 뛰어갔고 얼마 있지 않아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장면을, 50m도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서 마주했다.

“- - - - - -!!”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놈들에게 결코 틈을 내주지 않고 엄폐물로 숨어드는 작은 소녀.

하지만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흡수한 그 소녀는 몸에 노출을 최소화하는 절묘한 사각지대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고 자신을 상대로 방심한 놈들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비록 소구경이지만, 목숨을 빼앗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가진 그 권총은 요동치는 공이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앞서 달려오는 광신도 한 놈의 목숨을 뺏어버렸다.

이미 피로 물든 머리와 얼굴, 그리고 싸우는 내내 눈물을 흘렸는지 양 볼에는 눈물이 만든 두려움의 줄기가 나 있었으며 권총을 잡은 손은 나약하게 떨리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소녀는 마치 원수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온 작은 살쾡이처럼 어딘가 부족한 움직임을 디뎌가며 곳곳에 보이는 광신도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용팔이는 채연이가 밤새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 자리로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를 돌려줘.’

예쁜 옷을 좋아할 나이에 피 칠갑이 된 옷을 입고 필기구를 들어야 할 손에 권총을 잡는다.

아이가 겪어보지 못한 일상은 너무 멀리 떨어진 희망과 같았으며 주변을 감도는 절망은 친숙한 친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세상의 절망을 모두 맛본 아이에게도 곽동윤이라는 이름 석 자의 등대가 있었다.

생판 모르는 자신을 구해주고 삶의 행복이라는 요소를 맛보게 해준 자신의 아빠.

그리고 곽동윤이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이었듯, 이 아이가 험난한 세상을 버티던 이유도 자신의 아빠였던 것이다.

복수라는 이름의 자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현실이 용팔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 여기다! 이쪽이라고 병신들아!”

하지만 끔찍한 현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낭떠러지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흩어진 생존자들을 광기에 휩싸인 채 쫓아다니던 광신도들로 인해 교전 현장은 아수라장이 돼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정신을 판 놈들 덕분에 채연이는 소수의 적을 상대하며 그나마 버틸 수 있었고 용팔이도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수와 소비한 탄창이 점점 많아지자 결국 놈들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된 것이다.

“채연아! 도망, - - 큭!”

그리고 현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눈치챈 용팔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날리며 삶을 포기한 채연이에게 당장 빠져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몰려온 놈들은 용팔이가 들고 있는 소총을 발견하자마자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했고 허벅지에 탄이 박힌 용팔이는 넘어지듯 나무 아래에 숨었다.

허공을 장대비처럼 가로지르는 고속 탄과 불개미에게 씹어 먹히듯 조각나기 시작하는 나무들.

용팔이는 총알에 찢긴 나뭇조각들이 흩날리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기어가며 채연이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 - - - - -아!”

하지만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비극의 탄환은 놈들에게 응전하는 채연이의 어깨에 박혀 들어가 그 작디작은 몸을 바닥에 쓰러지게 했다.

그리고 총소리가 들린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경사가 있는 사각지대에서 아이가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위에 숨어 사격을 가한 광신도 한 놈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잡았다는 비열한 얼굴과 함께 히죽 걸리는 웃음.

놈은 운 좋게 머리를 피해간 총알을 재차 발사하기 위해 방아쇠 위에 검지를 얹어놓았다.

그래,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심장 소리마저 숨을 죽인다.

그리고 아이가 총을 맞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면한 용팔이는 총을 쏜 놈을 잡기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아야 한다, 내가 막아야 한다.

용팔이의 검지는 방아쇠에 위에 올라가고 총알은 금방이라도 머리를 터트릴 듯 귀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다르게 정렬된 조준선에는 경사로 만들어진 사각지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 표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돼…….”

그리고 그 순간 용팔이의 입에선 절망 어린 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허우적거리듯 채연이를 향해 달려가는 팔다리와 불가항력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볼.

저 앞에는 어깨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비어버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고 50m라는 짧은 거리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직 심연뿐인 늪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지속한 용팔이는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현실에서 생각했다. 자신이 너무 늦었고 우리는 전부 죽을 것이라고.

0.01, 0.02, 0.03.

픽셀 단위로 찢기듯 현실의 흑백화면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듯 주변에 가득한 노이즈 사이로 고함을 지르는 광신도 놈들과 마지막으로 아빠를 부르며 눈을 질끈 감는 채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것이 느려진 공간, 불타오르는 화마마저 숨을 죽이고 혀를 날름거리는 그 공간에서 용팔이는 천천히 앞으로 나자빠지는 자신의 몸과 피 묻은 손등을 시야에 담는다.

이제 끝인가? 이게 마지막인가?

“- - - - - - - -.”

아니, 정말 이상하게도 눈 앞에 펼쳐진 무(無)의 공간은 끝나지 않았다.

“- - - - - - -아?”

무언가가 온다. 이 느려진 공간을 지배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기분, 마치 누군가 선심 쓰듯 빌려준 이 공간에서 바닥에 엎어진 용팔이는 전율했다.

이것이었구나, 그가 보던 광경은 이것이었구나.

그리고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에서 홀로 날개를 펼친 형님이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 난입했다.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차가운 분노와 요동치는 생명력이 온몸을 강타한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간 단검 하나는 채연이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며 경사위에 서 있는 광신도의 목을 관통했다.

곡선이 아닌 직선, 멀리 날아오르는 새.

손잡이에 달린 독수리의 깃털은 파르르 떨렸고 날과 피보라가 만들어낸 눈부심에 용팔이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공터 한가운데에는 권총을 든 형님이 서 있었고 주변 기류는 빠르게 뒤바뀐다.

그리고 용팔이는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을 입속에서 읊조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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