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2부 6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큭…….”
“삼촌!”
검붉은 빛이 감도는 낡은 붕대와 창백하기 그지없는 얼굴.
산 위를 향해 힘들게 걸음을 옮기던 용팔이는 앞에 보이는 돌부리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불안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가던 경욱이는 정말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어깨를 잡아 주었고 용팔이는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여실히 느끼며 미간을 찡그린다.
그러자 저 뒤에서 노약자들과 아이들을 챙기던 강수련이 황급히 앞쪽으로 달려와 물었다.
“용팔 씨! 괜찮아요? 조금 더 쉬었다 갈까?”
어제 새벽, 결국 단합되지 못한 생존자들은 각자의 지도자를 따라 사방으로 찢어졌고 얼마 남지 않은 캠프 사람들과 살아갈 힘을 잃은 생존자들만이 숲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캠프 사람들에게 전해진 희소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에덴 원정팀 중 하나인 용팔이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곽동윤이 실종된 후 트럭에 실려 와, 두 번의 고비를 넘겨 겨우 살아남은 최 용팔.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두려워했던 캠프 사람들은 그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한편으로는 자기들만큼이나 슬퍼할 그를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용팔이는 곽동윤과 노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그것은 담담한 체념이 아닌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란 확신이었고 이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단호함이었다.
부족한 식량과 시시각각 수색망을 좁혀오는 광신도들, 지도자를 잃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던 생존자들의 미래가 자연스럽게 그려졌지만,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용팔이는 아직 완치되지 못한 몸을 이끌며 지난 세월, 노인과 곽동윤이 없이 에덴을 이끌던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용팔이는 고개를 저으며 강수련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누나. 사람들은 좀 어때요. 잘 따라오고 있어요?”
분류하기 쉽게 난민이라는 단어가 붙긴 했지만, 정작 이번에 합류한 자들은 채연이네 캠프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각 캠프에서 거둬가길 꺼리는 어린아이들과 노약자였고 그나마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는 성인남녀는 소수였다.
그래도 빅벤드의 서장과 던스뮤어 회장에게 실망한 성인 생존자들이 다수 합류해서 다행이지, 그들마저 없었다면 이 긴 행군도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따뜻한 위로로 그들을 보살피던 강수련은 어두워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부상자들 때문에 간격이 너무 넓어지는 것 같아요……. 나눠 먹을 식량도 부족하고…….”
어디 문제가 한두 개일까.
산짐승들이 돌아다니는 숲속에 차마 부상자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캠프 사람들은 각 마을의 지도자들이 버리고 간 부상자들을 전부 수용했고 최대한 식량을 아껴가며 놈들의 수색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점점 늘어지는 이동속도와 바닥을 치는 사기, 거기다 이틀분밖에 남지 않은 식량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숲속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설명하려다 결국 말을 흐린 강수련은 땟자국이 자욱하게 묻은 얼굴을 다물며 물기 어린 콧물을 킁 삼켰다.
순간 조용해지는 주변 분위기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빈약한 기침 소리.
용팔이는 피곤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이동하자는 신호를 보냈고 강수련에게 지나가는 투로 조용히 묻는다.
“……채연이는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모두가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이 순간에도 제일 아픈 손가락은 역시나 채연이었다.
하루아침에 아빠와 할아버지를 잃고 죽음의 위기에서 도망쳐야 하는 처지에 놓인 채연이.
당연히 아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밤만 되면 들려오는 숨죽인 울음소리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저 멀리서 걸음만 옮기는 채연이는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절벽 위에 꽃 같았다.
그리고 용팔이의 질문에 다시 한 번 코를 삼킨 강수련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똑같아요. 밥도 안 먹고, 잠도 못 자고. 요즘은 환청이라도 보는지 깜짝 놀랐다가 갑자기 울기도 해요……. 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믿음직한 모습으로 항상 채연이의 옆을 지켜주던 강수련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힘든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그만큼 채연이의 정신 상태는 심각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또한 하루하루 메말라간다.
희망이 없기에 미래도 없다.
환하게 앞을 밝혀주던 등대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강수련의 대답에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용팔이는 너무나 허전한 자신의 옆자리를 느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추운 날씨와 먹구름으로 어두컴컴한 하늘. 또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옆에 꼭 붙어있어 주세요.”
“……네.”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커버려 이제는 사춘기에 들어선 채연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가뜩이나 암울한 현실에 아이가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무서웠다.
그리고 최대한 표현을 순화해 말한 용팔이의 당부에 강수련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 듣기라도 할까 봐 위태로운 발걸음을 옮겨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다시 한 번 터지는 한숨과 함께 절뚝절뚝 걸어 대열의 선두로 걸어가는 용팔이.
능선 하나를 넘으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수많은 생존자가 일렬로 걸어오고 있었다.
‘형님, 어떻게 버티셨어요.’
그리고 가슴과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는 검은색 책임감에 용팔이는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을 내뱉으며 읊조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과 뒤를 바짝 쫓아오는 두려움.
오로지 빛을 찾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다릿심이 풀릴 것 같은데, 항상 이 길을 혼자 걸어간 형님의 어깨 위 무게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용팔이는 주먹을 꽉 쥐며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앞에서 걸어가는 것만 같은 거대한 등을 그리워하며 일행들을 살리기 위한 걸음을 또 한 번 디딘다.
너무나 추운 날이었다.
* * *
‘요즘 삶에 대해 자주 고민하고는 합니다. 동윤 씨도 그러신가요?’
나에게 차를 대접한 단체장이 언젠가 한 번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하늘이 개어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던 그 날, 마땅한 임무도 없어 햇볕이 잘 드는 단체장 실에 차를 나누던 그 날은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 아주 사소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마치 눈처럼 스며들었던 대화 내용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회상이라는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단체장에게 대답했다.
‘철학도 공부하십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에게 유대감이 쌓인 우리는 스스럼없이 식사와 농담을 건네는 사이로 발전했고 나는 단체장과 대화를 나눌 때면 그가 특정 종교에 단체장인 것을 잠시 까먹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휴식시간에 그와 수다를 나눌 때면, 간혹 사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지 생각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의연한 척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단체장이 대답했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누구나 하는 그런 유치한 고민이죠.’
오랜만에 보는 내 여유로운 모습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 단체장은 창가에 놓인 꽃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내가 앉아있는 책상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풍겨오는 유자 향과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단체장은 다 쉬어빠진 차를 음미하듯 마시며 눈을 감았고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래서……. 고민한 결과는 찾으셨습니까?’
그냥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상에 젖어, 우리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잠시 잊고 살고는 했다.
삶이라는 짧은 문장이 주는 철학적인 고민.
그러나 입에 올리면 피곤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되는 그 문장은 점점 혼자만 지니게 될 뿐 누구 하나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하고 생존이 우선시되는 ‘종말’이 일상 한가운데 떨어져 모든 것을 박살 내버리자, 대부분 인간은 삶과 죽음이 만들어낸 그 사선에서 진지한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질문에 단체장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아뇨,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아무도 모를 겁니다.’
인간은 요람에서 태어나 무덤에서 죽을 때까지 고민한다.
삶의 본질적 의미와 숨이 끊어지는 지금 그 순간까지 남아있는 미련.
그리고 개개인이 운 좋게 정립한 그것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소중히 남게 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각 개인에게 어울리는 신념은 있을지언정, 모두를 이해시킬만한 답은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차 잘 마셨습니다. 또 내일 뵙죠.’
나는 다 마신 유자차를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단체장은 바쁜 내일을 위해 떠나는 나를 웃는 낯으로 배웅했다.
자신의 교리가 적혀있는 십자수를 끝까지 잊지 않았던 단체장과 그런 그를 죽음으로 이별했던 나.
기억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 장면을 꿈처럼 지켜보고 있던 내 의식은 저 심연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무의식, 이별, 고난과 고통.
이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는 어둠이 찾아오려고 했다.
‘아, 그런데 동윤 씨. 그래도 딱 하나 깨달은 건 있습니다.’
‘- - - - -?’
그리고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 순간 과거의 발걸음과 내 정신을 붙잡았던 단체장의 마지막 말이 불현듯 기억이 났다.
무언가 후련한 얼굴로 자신의 교리가 적혀있던 십자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단체장.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모든 사람을 이해시킬 답이 아닌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찾았는지, 에덴의 모습이 보이는 창문을 등지며 나에게 읊조려주었었다.
‘삶이 간혹 두려움을 맞닥뜨리게 하더라도.’
쨍그랑-!
내가 실수로 귀퉁이에 세워둔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귀를 찢는 소음을 내지른다.
그러자 서서히 잠들기 시작한 내 정신은 전원이 들어온 필라멘트처럼 번쩍 뜨였고 나와 눈을 마주친 단체장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단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을 관통했다.
‘절대 외면하지 말고 직시할 것.’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무의식에 공간 속에서 단체장의 모습이 마치 사진이 불타오르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다 알고 왔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
이 모든 것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눈을 뜨기 시작한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삶이 간혹 두려움을 맞닥뜨리게 하더라도, 절대 외면하지 말고 직시할 것.
그리고 단체장이 전했던 그 마지막 말은 폭풍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가 영원히 감겨있는 것 같은 내 눈을 떠지게 했다.
* * *
짹짹, 짹짹.
미국에 원정을 와서 가장 익숙해지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저 새소리였다.
폭탄 때문에 많은 숲이 불타고 사라진 서울에서는 이제 보기 힘들어진 산새.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 펼쳐진 자연광경은 인간의 이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렇게 아침잠을 방해하고는 했다.
눈이 서서히 떠짐과 동시에 온몸에서 격통이 밀려온다.
그리고 낯선 천장을 마주한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으며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목숨을 걸고 싸울 때까지만 해도 내리던 비, 하지만 지금의 하늘은 너무나 밝기만 했고 따뜻한 햇볕은 오두막을 타고 들어와 나를 반겨준다.
“- - - - - -.”
여기가 어디지? 매번 다치고 모르는 공간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하니 낯선 천장이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번처럼 모르는 곳에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저 멀리 벽난로에는 제이콥과 가족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있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는 내 장비들과 총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경계 없이 잠이 들어도 안전한 것 같은 공간, 마치 지난날 고통이 악몽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은 너무 평온했다.
“- - - - -.”
마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듯 깨끗한 정신에 몸에서 몰려오는 고통마저 후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제이콥 가족을 부르려던 나는 코까지 고는 릴리를 발견하며 깨우기를 가볍게 포기했고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나무 바닥에 맨발이 닿을 때마다 요동치는 온몸의 감각.
이전 세상이 짙은 찌꺼기가 낀 안개 속의 공간이었다면, 죽다 살아난 지금은 모든 것이 환하게 변한 여명의 아침과 같았다.
달칵, 그리고 문을 열자 비온뒤 맡아지는 구수한 흙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동윤아.”
하지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세상뿐만이 아니었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두꺼운 털모자를 쓰고 허리에 죽은 토끼 여럿을 매달고 있는 노인은 기절해있는 나와 제이콥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있었는지, 등에는 튼튼한 수제 활과 화살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못 본 사이에 수척한 얼굴과 피곤이 서린 주름은 내 시선을 뺏었고 노인은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물기가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쓰고 있는 털모자를 조용히 벗었다.
편안한 침묵이 감도는 공간으로 시나브로 불어온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와 노인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며 익숙하면서도 소중한 감정을 다시 한 번 만끽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