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59화 (259/313)

# 259

2부 56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경계면에 있는 시더빌은 종말 전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래선지 주민 중 일부분은 보호구역에 살던 인디언들이었고 광신도 놈들이 이곳을 점거하고 나서도 그들은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노파의 일가 또한 자신들의 집을 지키며 가문이라는 작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영감님이 생각나는 깊은 눈과 주름진 얼굴. 나는 소년이 가져다준 찻잔을 조용히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히 웃고 있는 노파와 마주 봤다.

“그래, 궁금한 건 이제 다 풀렸나?”

한때 이 주변 토지와 건물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노파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몰려와 시더빌을 점거한 광신도 놈들은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밀며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고 이 지역 유지인 노파의 일가 또한 그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미친 광신도들에게 모두 죽고 총부리에 고개 숙인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빼앗겼다. 빈털터리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은 주민들과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

사람들 대부분은 놈들이 행하는 폭거에 희망을 잃었고 시더빌이라는 도시는 서서히 죽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노파는 절망이 내려앉은 순간에도 쉽사리 주저앉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전부 모아.’

도시에서 이름난 재산가에다 워낙 베푼 것과 인정이 많아 종말 전 주민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노파였다.

물론 대부분 재산을 몰수당해 가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일가와 주민들을 보살필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은 가지고 있던 노파는 허허벌판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전부 모아 이 외곽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광신도들과 난민들로 이루어진 타락의 지옥에서부터 서로를 보호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내가 기대하고 있었던 저항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생존자들이었다.

“차 맛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해 준 노파는 내가 캘리포니아 북서부 전역에 퍼진 소문의 당사자인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나와 부부를 구해 준 것이라고 솔직히 말해 주었다. 하지만 대가를 원할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노파는 나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그저 도시가 조용해지고 부상이 완치되거든 일행들 곁으로 조심히 돌아가라는 덕담만을 남긴다.

처음 내 정체를 알고 이용하려고 했던 빅벤드 서장과는 차원이 다른 선한 행동. 순간 궁금증이 든 나는 차를 마시며 왜 아무 대가도 원하지 않았느냐고 솔직히 물었다. 그러자 물음을 조용히 곱씹던 노파는 곰방대에서 연기를 훅 내뱉으며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노망이 들었나, 처음에는 나도 고민이 들더구나. 그 책에서 나오던 이야기처럼 나쁜 놈들을 몰아내 달라고 할까? 아니면, 깔끔하게 교주를 암살해 달라고 할까? 그래, 별다른 탈출구가 없는 자네라면 어쩔 수 없이 들어줄 거라 생각했지.”

수많은 재산과 토지를 대가로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목숨만 건졌을 뿐 노파의 일가와 기존 주민들은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 한 점 없이 덧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저 배부른 돼지가 되어 똥통에서 꿀꿀거리는 비참한 인생.

인생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노파는 그런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고 나를 이용한다면 상황이 충분히 좋아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파와 그 일가들은 그러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 자네도 우리처럼 소중한 가족이 있었어. 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잠시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고”

그래, 그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돌려야만 했던 부끄러움, 불의를 피해 돌아가며 일신의 안전을 도모했던 부끄러움, 목숨을 대가로 목숨을 받으려고 했던 그 부끄러움. 비록 엎드려 살지언정 하늘 아래 떳떳하다.

오직 자신이 두 손으로 들어 옮길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한 그들의 조상처럼 노파와 일가는 나에 대한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노파와 마주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향긋한 차향과 은은하게 흔들리는 조명.

담배 연기를 내뱉은 노파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부담가지지 말고 편히 쉬었다 가.”

*       *       *

이 지역에 홀로 낙오되고 나서 하루도 편히 쉬어 본 날이 없었다. 하지만 노파가 편히 쉬어 가라고 했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는지, 나는 놈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안전 가옥에서 편히 몸을 뉘었다.

급히 움직이느라 응급조치밖에 하지 않은 상처도 다시 치료하고 정말 음식다운 음식도 배불리 먹었다. 손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성대하게 반겨 주는 노파의 일가.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훈훈한 사람 냄새에 잠시 들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좋은 기분도 불시에 몰려오는 그리움만은 어찌 막을 길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노파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위성 전화기를 들고 방을 뛰쳐나와 일행들에게 연락을 걸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한 대로 캠프에 두고 온 위성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나는 수차례 이어지는 통화 대기음만을 들으며 아쉬움이 짙게 남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위성 전화기를 찾아뒀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내 연락과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를 생각해 본다면 전화기를 켜 두고 내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행동일 뿐이었다.

여차하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오작교가 영원히 끊겨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참담한 심정을 끌어안고 전화기 전원을 꺼 버렸을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목소리를 못 들어서 아쉬울 뿐, 노인과 연락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캠프와 달리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노파의 건물에선 언제든지 전화기를 충전할 수 있었고 가끔 전화기 전원을 켤 노인은 분명 내가 남긴 부재중 통화를 확인할 것이다. 비록 시간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확인하게 될 서로의 생사.

나는 통화 대기음이 끊겨 버린 전화기의 액정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침대에 몸을 누이며 눈을 감은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에 내 시선은 방문으로 향했다.

내가 하염없이 전화를 거는 사이 깨끗하게 세탁된 임무복과 장비들을 챙겨온 소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이제는 입에 붙어 버린 감사 인사를 건네며 그것들을 받아 챙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지막이 괜찮냐고 물어보는 소년의 말에 나는 침대 위에 옷과 장비들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걱정해 주는 거니?”

어른처럼 굴어서 그렇지 인제 보니 정말 어린 아이다. 하지만 어리게만 보이는 이 소년은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광신도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구해 주었고 노파의 집에서 머무는 나를 능숙하게 대접해 주었다.

항상 무표정이지만, 분명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행동과 손길.

나는 마치 어린 시절 채연이를 상대하듯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지만 역시나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 소년은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을 시크하게 치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붕대들을 회수한 소년은 나에게 말했다.

“항상 약에 취해서 헤롱헤롱거려도 교주 말이라면 껌뻑 죽는 놈들이에요. 아마 이틀 정도는 검문이다 봉쇄다, 시끄러울 것 같은데,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놈들도 요즘 세력 확장에 정신이 없어서 금방 조용해질 거예요.”

석양이 자리에 드러누운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도시 중심가에선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시더빌의 장벽에선 혼란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의 비명과 그런 그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놈들의 광기 어린 총성이 들려왔다.

교주의 명령을 받아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광신도들.

만약 노파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머릿속에 훤했다. 그리고 붕대와 수건이 담긴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소년은 복잡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그럼 쉬세요.”

한순간 풀린 긴장감 때문에 머리를 누이는 즉시 잠이 들 것 같았다. 나는 소년의 말에 지켜보고 있던 창문에 커튼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책상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후 불어 껐다.

식사가 방금 끝난 조금 이른 저녁이지만, 집안사람들은 전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탁을 끝낸 소년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지 나에게 좋은 밤 보내라는 건조한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촛불이 꺼지자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드는 방과 조용히 침대에 누운 나. 내일 아침에 있을 스케줄을 위해 일찍 자리에 누운 나는 방문을 닫고 사라지는 소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아저씨.”

응?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소년은 닫힌 문 너머에서 조용히 나를 불렀고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뜬 나는 침대를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상반신을 일궜다.

감정이 없는 것 같으면서 너무나 슬픈 소년의 목소리, 한동안 짙은 침묵에 복도와 방안을 휘감았고 나는 덩달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나를 부른 소년은 콧물을 훌쩍이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눈물을 삼켰다. 자신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던 소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애처럼 울고 있던 것이다.

“아, 아저씨가 죽여 버린 그 저격수 있잖아요. 사실 우리 아빠랑 엄마를 쏴 죽인 놈이에요. 제, 제가 평생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꼭 죽이겠다고 맹세한 놈인데, 사실 너무 무서워서 한 번도 덤비지를 못했어요. 저 한심하죠?”

무뚝뚝한 소년의 얼굴 뒤로는 부모를 눈앞에서 잃고 절규하던 진짜 모습이 있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와 그런 아이를 채찍질하는 냉혹한 세상.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숨을 삼켰고 울고 있는 것을 보이기 싫어하는 소년은 내가 보이지 않은 문 뒤에 조용히 서서 울음을 끅끅 삼켰다. 그리고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소년은 울먹이며 말을 이어 갔다.

“죽여주셔서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

가슴에 사무치는 아이의 고통은 겨우 30초간 터트린 울음으로 끝이었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소년의 발걸음과 마치 접착제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내 입.

나는 가슴에 무언가 턱하고 막힌 기분을 느끼며 침대 위에 올려 둔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

*       *       *

‘채연아? 채연아!’

나는 붉은색 화마가 낀 숲을 걷고 있었다.

이곳은 분명 아이들과 일행들이 뛰어놀던 숲이었는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생동감 넘치던 나무들은 전부 불타오른 지 오래였고 예쁘게 날아오르던 나비들의 빈자리는 살벌한 불똥이 대신했다.

발에 이리저리 차이는 재들과 채연이를 목 놓아라 부르는 나. 하지만 아이를 부르면 부를수록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내 귀를 틀어막았고 일렁이는 화마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붉은색 안개를 가지고 왔다.

‘아빠-!’

그리고 얼마나 오래 숲속을 헤맸을까, 목 놓아 부르는 나에게 응답이라도 하듯 저 멀리 숲속에선 채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나는 타오르는 불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뱀의 혀처럼 사방에서 일렁이는 붉은 불꽃과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놈들의 그림자.

분명 미친 듯이 뛰고 있지만, 나를 부르는 채연이의 목소리를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저 앞에서 놈들로 이루어진 파도가 몰려오며 내가 그토록 품에 안고 싶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아빠!!!’

띠리리리리리-!

“- - - - - -컥!”

힘껏 내뱉으려던 고함은 막혀 있던 숨과 더불어 폐부를 힘껏 짓눌렀다. 그리고 숨과 함께 기침을 내뱉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곳이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방 내부인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꿈이었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던 채연이의 목소리와 피부에 닿는 불꽃의 뜨거움은 너무나 생생했지만,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듯 주변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과 벌벌벌 떨리는 몸. 그리고 정신이 든 나는 그 순간 문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서 미친 듯이 울리고 있는 위성 전화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쿠당탕-!

전화다! 전화가 왔다! 밖은 아직 어둑한 새벽이었지만, 분명 위성 전화기에선 수신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흐릿한 정신을 깨우는 그 벨소리에 몸을 날리듯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엎어졌고 쿠당탕 거리는 소음과 함께 손을 뻗어 위성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방금 온 수신이 끊기기라도 할까, 재빨리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영감님?”

[ - - - - -타다탕- - ! 탕!! 치이이익-! ]

하지만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반가운 일행의 목소리가 아닌 거친 잡음 속에 낀 살벌한 총소리였다.

다급히 뛰기라도 하는지 찢어질 듯 울려오는 바람 소리와 사람이 내는 거친 숨소리.

나는 연신 노인을 부르며 떨리는 손을 다잡았고 하얗게 변한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와 듣기만 해도 다급해 보이는 현장 분위기.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해 줘. 제발 무사히 있다고 대답해 줘. 그리고 잠시 뒤 내 간절한 기도가 전해졌는지, 총소리만이 가득하던 전화기 너머에서 처음으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 - 동 - - 윤아! 동윤이냐?! 동윤이 맞- - 지!  - - -탕! 타다당!!! ]

뚝.

“..........”

나 맞아요. 영감님, 나 맞아요. 하지만 위성 전화기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뚝 끊겼고 떨리는 손가락을 든 나는 계속해서 통화 버튼을 누르며 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는 수신음은 넋을 놓은 내 귓가를 조용히 스치고 지나갔다.

위성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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