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부 53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변종의 힘은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하는 제약이 많았다.
물론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장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지만, 그 힘의 연료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있는 나는 힘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생명을 갉아먹히는 이 기분, 분명 변종의 피로 치료가 되고 있지만 내 영혼의 정수가 끓어 증발하는 이 느낌은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피가 멈추고 치료되기 시작한 상처를 붕대로 열심히 감으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맑은 냇물로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친다.
“- - - - - -.”
어느새 덥수룩해진 수염과 삐죽삐죽 더러운 머리.
탈의한 상반신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흉터들이 가득했고 붕대를 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흉터가 추가된다.
마치 마모되어 가는 감각처럼 몸에 새겨지는 세월.
하지만 나는 무감각한 눈동자로 그 흉터들을 바라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냇물로 얼굴을 씻어내렸다.
찌르르.
밤사이 숲속에 끼어있던 짙은 어둠이 물러가자 언제나 그렇듯 따스한 햇볕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선한 바람과 아침 일찍 일어난 산새의 울음소리.
문명과 동떨어진 숲속에서 아침을 맞은 나는 소총을 챙기는 것을 끝으로 다시 출발한 준비를 끝마쳤다.
시더빌을 빠져 나와 숲속에 숨은 지 하루째다.
몸은 적당히 회복됐고 밤사이 영양분도 충분히 섭취했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에 컨디션을 되찾은 나는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신도 놈들을 여럿 살해한 침입자가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시더빌은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도시 주변은 밤사이 횃불들이 꺼지지를 않았고 동이 터 가는 새벽에도 도시 안팎을 오고 가는 트럭들의 줄은 끊이지를 않았다.
분명 도시 주변을 수색하고 내 흔적을 쫓았을 광신도 놈들.
하지만 도망치는 것에 도가 튼 나는 유유자적 도시를 빠져 나와 거리가 먼 숲속에 숨어들었고 어둠 속에 홀로 버려진 산장에 숨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 되자 산장 밖으로 조용히 기어 나온 나는 조심스럽게 도시가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가 어제 아침과 똑같은 모습의 시더빌을 확인했다.
밤새 침입자를 찾아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았는지, 검은색 연기만이 솟아오르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채비를 마친 나는 아직 도시에 숨어있을 제이콥 부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시더빌로 향하고 있었다.
사박사박.
가벼운 발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쌓인 낙엽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발에 밟혔다.
어제 벌였던 치열한 전투가 다 뭐냐는 듯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는 자연광경.
인간이 그토록 타락하고 도시를 더럽혔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자연은 그 모습 그대로를 지키며 자리에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를 걷고 있는 나는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제이콥 부부의 얼굴을 회상하며 간지러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부부를 배수구에 숨겨두기는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제이콥과 릴리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거기다 습하고 더러운 배수구 안과 어젯밤 꽤 쌀쌀했던 날씨를 고려한다면 부부가 과연 무사히 살아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바에 한걸음이라도 더 옮기려고 노력했고 채 40분이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시더빌로 들어가는 입구 근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 - - -.”
한번 소란이 벌어졌던 시더빌은 날이 선 칼날 그 자체였다.
처음 엉성하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많은 광신도가 출입하는 사람을 검문하고 있었고 트럭 짐칸에 실린 총기 거치대와 중기관총은 매섭게 총구를 빛내며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 그 위용을 과시했다.
처음 약에 취해 찌들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 나는 거적때기를 쓰고 조용히 놈들을 살피다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는 걸 가볍게 포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어갈 길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불안해 보이는 수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 입구 근방을 벗어났고 이내 도시의 장벽이 있는 외곽을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장벽 근처를 바삐 쏘다니는 놈들을 가볍게 피해 장벽 앞까지 도착한 나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새겨진 땅바닥에 조용히 자세를 숙였고 어제 오후 시더빌을 빠져나올 때 사용했던 구덩이에 입구를 재빨리 파헤쳤다.
덤불과 낙엽에 막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 알아볼 수 없는 개구멍.
나는 그 안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욱여넣었고 부부와 무사히 나올 훗날을 대비해 다시 한 번 표식을 남겨두었다.
두근두근 조여 오는 심장과 또다시 활성화되는 변종의 감각.
나는 품속에 숨겨둔 묵직한 권총의 존재를 느끼며 부부가 숨어있던 하수구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 옮겼다.
* * *
내가 시더빌에서 처리한 광신도들의 숫자만 해도 17명이다.
나에게 죽은 놈들은 하나같이 무엇에 당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죽어갔고 목격자라고는 장벽에서 반병신으로 만들어주었던 두 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죽어가는 동료들.
그렇게 이성을 잃은 광신도들은 내가 도망친 오후 사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며 미친 듯이 도시를 싸돌아다녔었고 날이 바뀐 지금도 애꿎은 곳에 화풀이했다.
“- - - -꺅!”
큰길을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창녀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
약과 술에 취해있던 여자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며 끝없이 얻어맞았고 주변 주민들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광신도 놈들의 눈치를 살폈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싸늘한 분위기와 오직 비명밖에 들리지 않는 시더빌은 무언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이용해 마치 귀신처럼 골목을 누빈 나는 부부를 숨겨두었던 배수구 앞에 드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펴보지만, 담벼락과 좁은 길이 둘러싸인 곳이라 놈들이 나를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자세를 숙이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배수구 앞으로 다가갔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곳을 이미 떠났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 나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손전등을 꺼내 들어 배수구 안쪽을 천천히 비춰보았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과 떨리는 손끝, 배수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배수구 근처에는 오직 안에서 밖으로 몸을 끌고 나온 흔적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제이콥이 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배수구를 빠져나갔다는 소리.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바닥이 끌린 자국을 조용히 매만졌고 물기와 냄새를 통해 제이콥 부부가 이곳을 빠져나간 시간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물기로 촉촉한 흙과 분명히 남아있는 두 명의 발자국, 부부가 이곳을 떠난 지 이제 겨우 2시간이 지났다.
“- - - - - -.”
살았다. 그리고 살렸다.
모든 요소가 죽으라 윽박지른 상황에서도 결국 살아남은 나와 부부는 분명 같은 도시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로 갔을까? 아무래도 심한 부상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니 가장 유력한 장소는 처음 우리가 묵었던 지인의 여관이었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손을 놀려 부부의 흔적 지워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적때기를 뒤집어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왔던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며 아까 전 보았던 시더빌의 혼란 속에 조용히 녹아 들어갔다.
“- - - - - - -!!”
응?
배수구가 있는 골목을 조심히 빠져 나와 제이콥 부부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걸음을 옮긴 지 얼마 있지 않아 느껴지는 주변 분위기는 내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일 때랑은 무언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어느새 주변에 몰린 주민들과 광신도들.
뭐지? 설마 들켰나?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고 권총이 잠들어있는 품속에 조용히 오른손을 넣으며 주변에 몰린 사람들을 경계했다.
“와 - - -!!”
그리고 그 순간 울려 퍼지는 광신도들의 환호성.
이쪽으로 접근하는 광신도들을 향해 권총을 뽑으려고 했던 나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며 움찔거렸고 이내 시선과 관심이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주민들의 불안한 눈빛과 광신도들이 지르는 미친 함성이 주변을 빼곡하게 채운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당황한 나는 서둘러 인파 속에 모습을 숨기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부우우웅-!
그리고 잠시 뒤, 주변을 빼곡하게 채운 웅성거림 사이로 부드러운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광신도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을 통제하며 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 보는 놈들의 모습 앞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치 귀한 사람을 호위하듯 정렬된 광신도들의 모습과 광기의 존경이라는 미친 감정이 느껴지는 눈동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큰길을 지나가는 고급 승용차로 향했다.
끼익-.
그리고 고급 승용차는 길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광신도들 사이에 멈췄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고급스러운 차 외관과 누가 탔는지 알아볼 수 없는 짙은 검은색 유리.
이 미친 세상에서 기름을 쉴 새 없이 퍼먹는 저 고급 승용차는 보기만 해도 혀가 내둘러질 만큼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도대체 저런 걸 타고 다니는 미친놈은 누구일까? 조용히 욕설을 삼킨 나는 놈들의 추태를 더 이상 보기 싫어 여관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 문장은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들춰내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었어?! 교주님 오시기 전에 빨리 찾아내라고 개새끼들아!!’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뜯으며 광신도들에게 윽박지르던 간부.
내가 죽인 그 간부는 분명 교주가 오기 전에 침입자를 찾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지금 광신도들이 보이는 행동은 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자 돌이 되기라도 한 듯 멈추는 발걸음과 가까스로 돌아가는 고개.
나는 마른 입술을 조용히 삼키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차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와아아아아아아-!!!!
터벅터벅, 그리고 승용차 뒷좌석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바닥에 발을 딛는다.
그러자 어수선하던 도시는 놈들이 내지른 함성으로 순식간에 물들어버렸고 나는 몰려오는 이명을 느끼며 미쳐 날뛰는 광신도들을 시야에 담았다.
공포에 질려 고개를 숙이는 주민들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미친 광신도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돌린 나는 갑자기 발끝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변종의 피를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 - - - - - - - -.”
가만히 있던 감각이 갑자기 속삭인다.
주변에 모든 소리를 제거하고 이명이 가득 채운 고막은 단 하나의 속삭임만이 시나브로 가라앉았다.
총을 뽑아라. 품속에 있는 권총을 뽑아 차에서 내린 저 남자를 쏴라.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본능의 속삭임.
나는 천천히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고 차에서 내린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Big Father. 오직 진실 된 아버지만이.”
새까만 피부와 하얀 턱시도.
마치 흑요석 조각상을 가져다 둔 듯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단숨에 흐릿한 내 시선을 단숨에 끌었고 두툼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성은 주변을 채운 사람들의 입을 순식간에 다물게 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흑인 남자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구호를 조용히 읊조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수많은 금반지가 햇빛을 받아 사치스럽게 일렁였다.
하지만 광신도 놈들은 그 사치스러운 모습마저 아름답다는 듯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며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구호를 이어간다.
“거룩한 영광과 숭고한 자비를…….”
시끄럽던 도시는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하지만 나는 순간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빨리 총을 뽑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 까닥거리는 오른쪽 손가락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놈을 빨리 죽이라는 본능과 시시각각 떨려오는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동공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그동안 잠자코 있던 변종의 본능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피를 팔팔 끓였다.
무표정이지만 웃음을 머금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아니,
교주.
딸랑- 딸랑-.
그리고 숭고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린 교주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종을 살며시 울리며 선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광신도들을 미치게 하고 나를 혼수상태로 만들었던 그 종소리다.
하지만 모든 실마리를 제공했던 그 날과는 다르게 광신도들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신을 찬양했고 나는 두 번 당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정신과 피를 꿀꺽 삼키며 종소리에 저항해내었다.
머리가 아프다. 코피가 터질 것처럼 미간이 당겨왔다.
하지만 나는 입술이 찢어져라, 이를 악물며 마치 잘못된 낙원 위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정신을 바짝 차렸다.
뭔가 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 교주와 마주한 나는 이 모든 어둠과 처음부터 어긋나버린 톱니바퀴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선한 미소 뒤에 흉측한 살의를 숨기고 숭고함이라는 껍데기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욕망을 담는다.
나만이 알 수 있다. 내 눈만이 실체를 볼 수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교주는 인간을 연기하는 변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