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부 51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M, Mr 곽……. 릴리를 데리고 나가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가 발사한 총소리는 조용하기만 하던 도시를 깨우며 골목과 하늘 이곳저곳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총소리가 단순한 발사음이 아닌 죽음으로 떨어지기 직전 울린 출발 신호임을 직감했고 제이콥은 나에게 릴리를 대신 데리고 나가 달라고 사정한다.
절망으로 물든 제이콥의 얼굴과 어느새 정신을 잃어버린 릴리.
사방에선 경종을 울리는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지만, 내 허벅지와 어깨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제이콥에게 말했다.
“정신 차리고 릴리부터 업으세요.”
“예?”
퇴행증을 앓고 있는 릴리는 마치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저 오지 않는 우리를 기다리다, 한순간 몰려온 트라우마 때문에 벌인 우발적인 행동.
그리고 놈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릴리는 그 순간만큼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앞에서 주춤거리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피를 질질 흘리고 있던 릴리가 가장 먼저 보인 행동은 자신을 빨리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이 아닌, 죄책감이 가득 담겨있는 진심 어린 사과였다.
미안해요, 멍청하게 행동해서 미안해요. 빨리 도망치세요.
자신이 벌인 일에 어찌할 줄 몰라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 나는 거기서 총을 뽑는 순간 결심했다.
“같이 빠져나갈 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해있던 나를 치료해준 제이콥과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밧줄을 풀어준 릴리.
내 삶을 끝내기 위해 찾아온 사신은 벌써 두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그것을 막아준 것은 천운이 아닌 흑색으로 가득한 도화지에 아직 존재하고 있었던 하얀색 여백이었다.
미안해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영웅 심리에서 오는 치기가 아닌 이 거지 같은 세상에 한 번이라도 좋은 결말이 있었으면 하는 내 오기였다.
이 부부를 우리 캠프로 데려갈 것이다. 채연이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에덴으로.
“빨리!”
나는 얼 때리는 제이콥에게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며 놈들에게서 뺏은 소총을 장전했다.
그러자 피로 점철이 된 손가락이 노리쇠에 닿자 위기의 순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차가움이 온몸을 찌르르 강타한다.
울먹이며 릴리를 둘러업는 제이콥과 어느새 시야에 사라진 고아.
나는 피가 뚝 뚝 흐르는 발자국을 그대로 바닥에 각인시키며 앞을 향해 뛰쳐나갔고 사방에서 이곳을 압박하는 위험본능과 피부를 핥으며 올라오는 소름이 놈들과 함께 몰려온다.
시각, 청각, 후각. 세 가지 감각을 통해 들어온 모든 정보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에 내리꽂혀 정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처럼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과 목덜미가 서늘한 죽음의 기운.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선 한가운데를 달리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있다. 아니, 나가야만 한다. 생존의 불가항력은 절대 옆으로 꼬꾸라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모든 게 최악뿐인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외곽에 있는 도시 출구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부터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큰길을 본능적으로 뒤로하며 트럭이 다니지 못하는 골목으로 뛰어들었고 땀과 피를 뻘뻘 흘리며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는 제이콥을 연신 재촉한다.
아직 일어나기 이른 도시는 우리가 벌인 소란으로 어수선해진 지 오래였다.
골목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창문, 우리는 마치 비극이 결정된 연극 한가운데를 달리는 배우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현장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놈들이 내뱉는 고함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 - - - - -!”
내가 죽인 광신도들의 시체를 발견했는지, 놈들의 행동이 생각보다 빠르다.
나는 큰길에서 우르르 몰려가는 놈들을 한발 빨리 인지하며 재빨리 담장에 숨었고 제이콥은 얼굴이 하얗게 변한 채 담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바닥을 울리는 수십 명의 발소리와 바로 옆을 쌩하고 지나가는 트럭 두 대.
제이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나에게 물었다.
“어, 어쩌죠?”
교회첨탑에서 확인했던 시더빌의 지형은 분명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놈들의 포위망을 피해가야 했기에 우리는 도시를 돌고 돌고 또 돌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놈들과 마주치는 빈도는 늘어났으며 우리의 이동속도는 서서히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입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었다. 급한 대로 소총을 챙겨오기는 했지만, 부부를 데리고 놈들과 교전할 수는 없다.
어디가 되었든 제이콥 부부를 밖으로 내보내고 놈들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놈들이 모두 지나가자 제이콥에게 대답 대신 손짓하며 본능이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이쪽으로 가면 위험하고 저쪽으로 가도 위험하다.
머리에 울리는 경종은 발을 디디기도 전에 변하는 저급한 신호등과 같았고 나는 코피가 쏟아질 듯 미친 듯이 움직이는 감각에 조용히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가 아프다, 온몸에는 힘이 없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내 몸을 붙잡고 있는 생존본능은 몸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30분간 벌어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에 끝에 우리는 기어코 놈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 안돼…….”
그러나 출구가 보이는 골목까지 도착한 우리를 반겨준 것은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아닌, 무장한 놈들이 틀어막고 있는 바리케이드였다.
명확한 지휘체계가 존재하고 있는지 벌써 도시를 봉쇄하기 시작한 광신도 놈들. 제이콥은 릴리를 업고 있다는 것도 까먹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나 또한 힘이 탁 풀림을 느끼며 담장에 등을 기댔다.
나름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모양이다.
나는 피가 흥건하게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허벅지에 출혈을 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몸 상태는 이미 최악이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시간도 우리의 편이 아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는 제이콥도 이미 삶을 포기했는지 릴리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상태였다.
모든 요소가 죽으라 윽박지르는 상황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뱉자 피비린내가 울컥 솟아오른다.
아직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도시, 고립, 포위망, 일촉즉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빠르게 조합하며 검은색 바다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위태로운 돛단배를 생각한다.
그러자 온몸에 새겨진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왔다.
‘- - - - -동윤아!!!’
찢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노인과 같이 숨자고 사정하는 용팔이의 얼굴.
나는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눈을 떴고 그 반동에서 튀어 오르는 힘을 힘껏 부여잡는다.
그래, 엄 순경이 총을 발사하던 그때도 분명 이런 상황이었다.
도시에서 고립된 우리와 시시각각 몰려오는 놈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을 직감한 상황에서도 나는 일행들을 살려내었고 심지어 나 스스로도 살아남아 에덴으로 돌아갔다.
비록 우리를 쫓는 대상과 긴박함은 다르지만, 생사를 가르는 해결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릴리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제이콥의 옷을 끌어 올리며 외쳤다.
“일어나요!”
살 방법이 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제이콥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일한 출구는 저 앞에 있다.
하지만 내가 가는 방향은 출구와 멀어지는 도시 중심가였고 제이콥은 얼이 빠진 얼굴로 주춤주춤 나를 따라오며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명확한 대답 대신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때 상황과 비슷한 피난처를 찾기 위해 바쁘게 눈을 굴렸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은 이것만큼은 양보하겠다는 듯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적절한 장소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 - - - - -.”
더러운 오물과 쓰레기들이 고여 제 역할을 상실한 배수로 구멍.
하지만 나는 그곳이 꼭 보물단지라도 되는 마냥 재빨리 무릎을 꿇어앉았고 녹슬어 비틀어진 얇은 철장을 개머리판으로 깨부수기 시작했다.
깡깡-! 목제 개머리판과 녹슨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격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배수로 철장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버렸고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손전등을 꺼내 들어 배수로 안쪽을 비추어보았다.
“Mr 곽?”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무언가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본 제이콥은 넋을 놓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과 마치 내 등을 밀 듯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나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조용히 핥으며 사람 두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배수구에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차갑게 식은 손을 뻗어 릴리를 업고 있는 제이콥에게 빨리 배수구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비록 역겨운 냄새와 오물이 가득한 배수구지만, 사람이 꺼리는 더러움은 도시가 조용해질 때까지 이 부부를 충분히 숨겨줄 것이다.
그리고 내 의도를 정확히 눈치챈 제이콥은 릴리와 함께 배수구 안으로 들어가며 떨리는 눈동자로 나에게 말했다.
“위, 위험해요…. 빨리 들어오세요.”
어쩜 이렇게 그때와 똑같을까.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으며 잠시 치워두었던 쓰레기들을 모아 배수구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이콥은 깜짝 놀라며 나에게 손을 뻗었고 릴리는 피가 뚝뚝 흐르는 눈을 힘겹게 뜨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여기 자리 아직 있어요. 같이 숨을 수 있잖아요! 제이콥은 그렇게 외치며 입구를 막는 쓰레기들을 치워보았지만, 나는 단호한 손길로 입구를 막으며 대답했다.
“조용해지면 나와요.”
망설임 없이 총을 발사한 내가 그나마 잘한 것은 적어도 목격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총소리와 시체를 통해 습격자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그 숫자와 신상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광신도 놈들.
왜 생각을 못 했나 싶을 정도로 몸을 숨기기 딱 좋은 조건이었고 나는 놈들이 찾지 못할 적절한 장소까지 찾아내었다.
하지만 도시를 봉쇄하기까지 하며 우리를 찾는 놈들에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나 숨었소!’라고 홍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어도 도망칠 수단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은 놈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도망이든 사살이든 이 사태의 종결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어야 했다.
외전이 없다면 알 수 없는 결말의 허점, 내가 위기의 순간에서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를 들어 올린 나는 릴리가 또르르 흘리는 눈물을 마지막으로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 - - - - -아.”
바보천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부부였다.
하지만 바보같이 착한 그들을 만난 나는 정말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아 갈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라는 합리를 따지며 세상을 저울질하게 된 나, 마음은 검은색 도화지처럼 까맣게 변했고 자기학대와 피폐라는 요소는 나를 죽이게 했다.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변명과 겁에 질려 잡지 못한 행복.
나를 괴물로 만든 것은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먼 타국에서 우연히 만난 부부는 길을 잃고 헤매던 나에게 잊지 말았어야 할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말할 수도, 형체를 알 수도 없는 그것.
그래, 이제부터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핑계로 진짜 현실을 피하고 점점 변해가는 나를 두 눈으로 직시할 생각을 버린다.
나는 살아있다.
인간 곽동윤은 그날과 똑같은 풍경과 바람을 눈동자에 담으며 이 한마디 문장을 머리에 새겼다.
찰칵-!
좋은 날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전 소리로 사진을 찍는다.
비록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피 때문에 웃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춰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발이 땅바닥에 닿자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놈들의 기척과 중천에 떠 있는 해는 절묘하게 교차하며 그림자를 지워냈다.
그리고 나는 살겠다는 일념을 품은 채 마지막 담을 넘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었어?! 교주님 오시기 전에 빨리 찾아내라고 개새끼들아!!”
그리고 비교적 지원이 느릴 반대쪽 외곽을 목적지로 잡고 큰길 바로 옆에 있는 갈림길을 돌자, 한쪽 골목에 트럭을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란스러움을 알리기라도 하는지 연신 울리는 무전기들과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남성.
그는 다른 광신도들과 다르게 깨끗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목에는 광신도들이 벽에 그려놓던 문양의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이상하리만큼 굽신거리는 광신도들을 통해, 나는 저 남자가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고위직 개새끼인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 - - -어?”
그리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침묵이 몰려오는 공간.
트럭 옆에서 연신 고함을 치던 남자와 광신도들은 멍청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고 내 손에는 어느새 풀오토로 조정간을 돌린 소총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언제 한번 노인과 나눈 적 있는 대화 내용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영감님, 호랑이굴에 빠져도 정말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럼요?’
‘당연히 호랑이를 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