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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252화 (252/313)

# 252

2부 49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시더빌의 밤길은 셋이서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방에서 뻗어오는 광기의 끈적거림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제이콥은 종말 초기부터 안면이 있는 지인의 허름한 여관으로 나와 릴리를 안내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거리는 식탁 앞에서 빨리 들어가라는 듯 계단을 향해 턱짓하는 주인 할아버지와 곳곳에 쓰러져있는 부랑자들과 술병, 우리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방으로 발을 들인다.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여관 시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촛불 하나 켜져 있는 어둡고 좁은 평수와 더러운 짚을 천에 감싸 만든 싸구려 침대.

벽과 바닥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고 얇은 벽은 방음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을 숨길 수 있는 벽이 있다는 것에 큰 안심이 된다.

우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따로 방을 잡지 않고 같은 방에 짐을 풀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고함과 욕설, 방안에 앉아있는 릴리는 아직 적응이 안 되는지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봤고 제이콥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판자로 만든 문 옆에 앉아 사방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재정비하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이가 잃은 충격으로 백치가 되었지만, 그 착한 마음만큼은 간직하고 있는 릴리와 그 옆에서 성심껏 그녀를 돌보는 제이콥.

나는 그 풍경을 조용히 시야에 담으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덜컹거리는 판자에 등을 기댔다.

비스킷 하나와 물 두 모금.

우리는 집을 떠날 때 챙겨온 식량으로 가벼운 요기를 하고 내일 있을 여정을 위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고된 행군이 많이 피곤했는지 침대에 몸을 누이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는 릴리와 제이콥.

나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언제든지 뽑아 들 수 있게 권총 손잡이에 손을 올려두었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광기의 비명을 의식하며 눈을 감는다.

천천히 빠져드는 상념은 폐부에 갇혀있던 묵은 숨을 끌어낸다.

“- - - - - -.”

시더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마주친 광신도 놈들만 수십 명이 넘는다.

그들은 전진기지를 점거하고 있던 놈들과는 다르게 규격화된 자동화기로 충분히 무장하고 있었고 살인이라는 행위에 숙련이 된 듯 감각이 보내는 경고가 심상치 않았다.

종말 초기 에덴 전성기급의 규모라고 생각했던 나와 노인의 예상을 가뿐하게 깨부숴버리는 광신도 집단의 규모.

제이콥이 이런 규모의 도시가 적어도 2~3개 있다고 하니 내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 떨어졌는지 실감이 났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블랙 라인은 위협적이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을 사리는 미 육군은 쓸모가 없었다.

공권력과 윤리가 사라진 이 지역이 얼마나 빨리 붉은색으로 물들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찢어져 버린 일행들과 하염없이 우리만을 기다리고 있을 캠프 인원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물론 한두 번 당해본 낙오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몰려오는 허전함에 나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작은 창밖을 주시하며 그렇게 밤을 보냈다.

*       *       *

“새벽이 되니까 거짓말처럼 조용해지죠?”

하늘 사이로 얇은 여명의 띠가 생길 때쯤 제이콥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릴리를 깨웠다.

그리고 새벽 동안 소란스럽던 밖을 힐끗 쳐다보며 아직 피곤해 보이는 릴리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낸다.

제이콥의 말대로 무척이나 조용해진 거리.

밤새 쾌락을 불태우던 사람들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잠자리에 들었고 반대로 우리는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제이콥은 가지고 온 가방을 뒤적이며 작은 꾸러미를 하나 꺼내 들었다.

“전당포로 먼저 갑시다.”

전당포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바꾸기 위해서는 화폐로 사용되는 물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제이콥은 그것까지 미리 생각해두고 있었는지, 작은 꾸러미 안에 전당포에서 받을법한 낡은 달러부터 금빛이 반짝이는 패물까지 꼼꼼하게 준비해왔다.

내가 무일푼인 것을 알고 있는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금품을 꺼내 드는 제이콥.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고민을 풀어준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말 신세만 지네요. 꼭 갚겠습니다.”

우연히 구한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을뻔한 위험에 휘말린 부부다.

하지만 제이콥은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초행길을 여행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제는 일행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을 구해주기 위해 재산의 일부를 망설임 없이 넘겨주었다.

종말 전 일상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그 친절.

나는 면목이 없어 그 부부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릴리의 손을 잡은 제이콥은 참 순박하게도 웃으며 고개를 숙인 나에게 대답했다.

“따님을 무사히 만나시면 좋겠네요.”

딸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심장.

그래, 이토록 고통받고 쓰러져도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 못이 박히듯 남아있는 아이의 얼굴을 기억하며 고통을 조용히 곱씹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는 눈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부부처럼 밝은 햇살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       *

아침이 찾아오고 있는 시더빌은 다 타고 남은 회색의 재와 같았다.

거리 곳곳에서 뒹굴고 있는 오물들과 아직도 남아있는 역겨운 탄내.

약에 취해 거리를 장악하던 광신도 놈들과 미친 주민들은 다 숙소로 돌아가 뻗었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과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지들만이 이른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를 앞서 걸어가던 제이콥이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원래는 이 시더빌에서 유명한 지역 유지였는데, 광신도들에게 재산을 뺏기고 이제는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곳저곳에 선을 대둔 것이 워낙 많아서 놈들도 대놓고 시비를 걸지 못해요. 그만큼 주인이 아주 괴팍하니까, Mr 곽도 조심하세요.”

야행성인 도시와는 다르게 새벽같이 문을 여는 외다리 전당포, 한두 번 그곳을 가본 적이 있는 제이콥은 나에게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릴리를 달래며 도시 외곽에 있는 전당포로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차가우면서도 눅눅한 시더빌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왠지 모르게 몰려오는 긴장감은 꼭 차가운 늪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쪽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을 옮기기를 40분, 우리는 중심가를 완전히 벗어나 마을의 출구가 보이는 외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아주 넓은 공터와 함께 홀로 서 있는 콘크리트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꼭 버려진 것처럼 간판 하나 없는 회색의 폐건물.

하지만 제이콥은 저곳이 분명하다는 듯 나에게 손짓했고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는 느린 발걸음으로 공터를 지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딸랑, 딸랑.

하나뿐인 나무문을 열자 기름칠을 하지 않은 경첩의 비명과 함께 문 위에 달린 종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왔다.

꼭 다시 나가라는 듯 경고를 하는 것 같은 종소리.

릴리는 너무나 어두운 건물 안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제이콥의 뒤로 숨었고 나는 갖가지 물건들이 걸려있는 벽면을 둘러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그 종소리에 반응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저 멀리서 불규칙한 발소리와 함께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 수면제를 사러 왔나?”

전당포의 이름처럼 외다리인 노파는 꼽추처럼 등이 구부러져 있었지만,

백발과 주름 사이로 보이는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제이콥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또 수면제를 찾냐는 말과 함께 지팡이를 바닥에 짚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괴팍하다는 제이콥의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지쳐 보이는 노파의 얼굴.

나는 앞으로 나서려는 제이콥 대신해 노파에게 다가가며 공손하게 물었다.

“혹시 위성전화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떨어진 곳이 적진 한가운데인 것을 알게 된 이상 밖에 있는 일행들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위성전화기의 존재가 꼭 필요로 했다.

그리고 조금 절박해 보이는 내 물음에 주름진 입술을 조용히 다물고 침묵을 지킨 노파는 나와 부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차가움과 비웃음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험한 걸 찾는구먼. 놈들한테 들키면 당신들이나 나나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외부 유출을 철저하게 막고 있는 광신도의 도시에서 위성전화기를 찾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파는 물건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그 위성전화기가 주는 위험과 여파에 대해 경고했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거적때기를 쓰고 있는 내 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이콥의 예상대로 역시 물건을 가지고 있는 모양, 마치 정체가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맑은 눈동자와 한동안 마주했다.

“…….”

그리고 나는 노파의 눈빛에서 영감님이 적들을 관찰할 때 품고 있던 웅크린 맹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나이를 먹은 맹수가 굴속에서 세상을 관찰하듯 세월의 노련함을 한가득 품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

나는 놈들이 점거한 무법 도시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이 노파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눈을 마주친 노파는 무언가 미묘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가지고 온 거 한번 열어봐.”

거래하겠다는 노파의 말.

그와 동시에 제이콥과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고 나는 제이콥이 자신들이 쓸 것을 제외하고 전부 넘겨준 꾸러미를 들어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노파는 손가락을 까닥거렸고 나는 눈치껏 꾸러미를 벌려 그 안에 들어있는 달러와 폐물로 사용 가능한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마 주름을 찡그린 노파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쓸 만한 거 가져와.”

“네? 아니, 저번에는 받아주셨잖아요.”

분명 약간의 달러와 금붙이로 수면제를 구매한 적이 있는 제이콥이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 노파는 이번 거래만큼은 더 쓸 만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말하며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나와 제이콥에게 말했다.

“쉽게 팔았다가 놈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적어도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물건 정도는 가지고 와야지 팔 생각이 생기지, 다른 물건들이랑 같은 취급 하면 곤란해.”

너무 쉽게 생각했나? 나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노파의 말에 낭패를 느끼며 조심히 꾸러미를 접었고 나만큼이나 실망한 제이콥은 자리에 앉아있는 노파에게 연신 따졌다.

하지만 노파의 주장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제발 부탁한다는 호소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볼일 더 없으면 이만 나가봐. 곧 놈들이 순찰할 시간인데, 눈에 띄게 소리치지 말고.”

하지만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노파는 곧 도시를 순찰 다닐 광신도들을 언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어떠한 호소도 흥정도 통하지 않는 단호한 거절.

위성전화기가 이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온 나는 지팡이를 짚고 우리와 조금씩 멀어지는 노파를 바라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다.

노파가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물건이 무엇일까? 총? 총알? 아니면 놈들에게 노획한 차량? 그래, 분명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물건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부부가 살던 집 근처에 전부 숨겨 두고 왔고 설사 가져온다고 해도 놈들의 감시와 검문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 - - - - -아.”

더이상 방법이 없다. 저 멀리 사라지는 노파처럼 흐지부지 해져버린 계획.

나는 한동안 넋 놓고 자리에 서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막연한 감정을 머리에 품는다.

그리고 막연한 감정 사이로 피를 토하며 내 이름을 부르던 용팔이와 캠프에서 나를 찾으며 울고 있을 채연이에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지쳤다는 기분을 느끼며 팔다리에 힘을 풀었고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망막과 같은 상념을 깨운 것은 새로운 각오가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제이콥의 목소리였다.

“릴, 릴리? 릴리!”

릴리? 제이콥 옆에 있던 릴리?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옴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낭패를 느끼고 있던 제이콥은 어느새 사라진 릴리를 찾으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깜짝 놀란 나는 헛숨을 들이키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딘가로 하늘하늘 사라져버리던 릴리.

분명 제이콥 옆에 있어야 할 그녀는 우리가 시끄럽게 흥정을 하는 사이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고 나는 전당포를 무서워하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해내며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우리는 역시나 열려있는 전당포 문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열린 문을 통해 흔들리는 종소리는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나와 제이콥을 타박하는 것 같았다.

잠깐 제이콥을 손을 놓은 사이 전당포 밖으로 나가 버린 릴리. 나와 제이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뜀박질을 시작하며 전당포 밖으로 뛰쳐나갔다.

볼일 더 없으면 이만 나가봐. 곧 놈들이 순찰할 시간인데, 눈에 띄게 소리치지 말고.

노파의 마지막 말이 불안한 내 귓가를 조용히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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