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2부 4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나는 이틀 동안 햇볕에 말려 보송보송해진 임무복을 걸치며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강에 떠밀려 도착한 곳은 네바다 주와 인접한 캘리포니아 서부.
노인의 예상대로 이 지역은 광신도들이 이미 점거하고 있었고 기존에 있던 생존자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있었다.
장벽 하나를 두고 극과 극인 생존자들의 모습에 이 부부가 받았을 고난이 얼마나 심했을지 예상이 간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벌인 일에 책임을 지고자 기구한 삶을 지내고 있는 그들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자는 한쪽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는 릴리를 보며 나에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해온다.
“놈들은 생존자들이 지역 밖으로 나가는 걸 극도로 꺼려요. 그래서 차로 지나갈 수 있는 도로는 전부 봉쇄시켜 두고 걸어갈 수 있는 경계면에는 전부 사냥개를 풀어놨죠. 저랑 릴리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어요.”
나조차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위험한 지역이다.
그리고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남자는 일찍이 탈출을 포기하며 고개를 흔들었고 나는 그런 남자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문다.
하지만 가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내 손에 죽은 광신도들의 숫자만 6명. 남자와 릴리는 이성과 자비가 존재하지 않는 놈들을 상대로 나와 연관이 없다는 설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부부도 결국 정착한 집을 떠나 어디론가 피난을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나는 이 부부가 어느 한 곳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시 다른 생각이 있습니까?”
“……릴리와 함께 도시로 갈 생각입니다.”
부부가 사는 집은 도시를 완전히 벗어난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외진 곳에 있어 이웃을 만나려면 2km 넘게 걸어가야 하는 동떨어진 오두막집.
덕분에 놈들의 시체와 트럭을 조용히 치울 수가 있었지만, 광신도들에게 들키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오랜 도피 생활을 해본 남자는 차라리 사람 속에 숨어지내기 위해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도시로 향하기로 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향해라. 내가 쉽게 동의를 표하자 남자가 되물었다.
“당신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캠프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나는 움직임에 신중함을 가할 수밖에 없었고 가장 최우선으로 취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기는 강물에 휩쓸려 전부 분실한 상태며 무전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
결국,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거나 일행들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이곳에 빈손으로 떨어진 나에게는 그 어떠한 수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도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한참 의자에 앉아 고민하던 나는 오랜만에 막연함이라는 감정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 상황, 나는 개인 보관함에 두고 온 위성 전화기를 기억해내며 일단 연락 수단을 수소문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동행 제안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나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그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잘 돌려서 한 것 같아 나는 기분이 좋았다.
* * *
내가 죽인 놈들의 시체는 전부 땅에 묻고 광신도들이 타고 온 트럭은 혹시 몰라 우리만 알 수 있는 장소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휴대성이 좋은 권총만 챙기고 폐기했으며 조그마한 오두막집은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이동하는 내내 먹을 식량과 옷가지들만 챙긴 우리는 부부가 1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던 집을 뒤로하고 가장 인접한 도시를 향해 여행길을 나섰다.
“우아-!”
놈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큰 국도를 피해 산등성이와 중턱에 인접한 외진 길을 골라 이동한다.
하지만 생각 외로 훈훈한 바람과 좋은 날씨는 여행길에 탄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넋이 빠져있던 릴리도 오랜만에 하는 외출에 기분이 좋은지 우리를 따라 쫄래쫄래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자연 광경을 만끽한다.
들꽃 사이에서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며 살며시 웃는 남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나는 급한 일을 해치우느라 조금 늦은 통성명을 위해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진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다른 손으로 옮기며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손에는 짙은 굳은살과 함께 그들이 겪었을 고난이 묻어나왔다.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불러드리는 게 편할까요?”
“호칭은 신경 안 쓰는 편이에요. 편하게 곽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요즘 비슷한 이름을 많이 듣네요.”
제이콥은 오두막과의 거리가 멀어진 뒤부터 걱정이 한결 가신 얼굴로 나와 악수했다.
그간 두려움에 찌든 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긴장이 풀려버리는 나. 선선한 바람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으며 산바람에 휘둘린 나무들은 푸르른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깨끗한 코트를 입은 채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든 풀밭을 지나가는 릴리의 모습은 마치 꿈에 나오는 풍경처럼 몽환적이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긴 시작한 제이콥은 나와 조곤조곤 수다를 떨었다.
“그나저나, 위성 전화기를 찾으시는 거 같은데 맞으시죠?”
제이콥은 아까 출발하기 전 나눴던 대화를 통해 내가 도시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 내었다.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시기상조고 구체적인 탈출 경로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황, 적어도 일행들에게 곽동윤이 살아있다는 것만은 알리고 싶었던 나는 이 부부를 도시로 데려다주고 그 도시에서 위성 전화기 수소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막연한 생각뿐인 그 계획은 타지에 홀로 떨어진 나로선 그저 맨땅에 헤딩일 뿐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어렵겠네요. 이런 상황에 위성 전화기라니….”
꼭 소유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한 번의 통화, 딱 한 번만 전화기를 빌리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흔한 물건이 아닌 위성 전화기는 이 지역에 빠삭한 제이콥조차 난색을 보이며 한숨을 쉬었고 내 머리는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복잡하게 변해갔다.
용팔이는 괜찮을까? 노인은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캠프 사람들은 어떨지 그리고 채연이와 강수련은 몸 성히 있을지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덩그러니 떨어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오랜만에 몰려오는 무력함은 저항조차 할 수가 없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상처에서 생기는 욱신거림을 조용히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제이콥은 무엇을 망설이기라도 하는지 찢어진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한숨을 깊게 내쉰 제이콥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나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어왔다.
“음……. Mr 곽. 저희가 지금 가는 곳은 시더빌(Cedarville) 이라고 불리는 경계면 도시입니다. 명목상 광신도 놈들이 점거하고 있는 곳이기는 한데, 난민들이 많아서 비교적 몸을 숨기기 좋은 장소이에요. 아……. 그리고 이건 되도록 추천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정말로 급하신 거면 도시 외곽에 있는 외다리 전당포로 찾아가 보세요.”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집과 시더빌을 자주 왕래한 제이콥은 이쪽 사정에 나름 빠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성 전화기를 찾는다는 말에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우리가 가는 도시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 전당포를 찾아가 보라는 말을 건네 왔다.
외다리 전당포, 이름만 들어도 수상함이 퍽퍽 묻어나는 이름이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이름에서 계획의 실마리가 한 가닥 존재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제가 찾는 물건이 있을까요?”
“네, 분명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우려를 표하던 그였지만 전당포에 관해서 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 제이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한쪽에는 정말 이곳을 추천해줘도 되는가에 대한 걱정이 여전히 서려 있었고 조용히 눈치를 보던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척 제이콥에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전 괜찮습니다.”
인생사 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고난과 위기가 없으면 어색할 정도 익숙해진 나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에게 괜찮다고,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달라고 다시 한 번 청한다.
하지만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제이콥은 무언가 결심이라도 했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래요, 제가 같이 가면 그렇게 큰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어? 릴리!”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실마리를 찾아다 준 것도 고마운데 외다리 전당포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말하는 제이콥.
하지만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저 앞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제이콥의 말문을 틀어막았고 순간 시선이 쏠린 그곳에는 릴리가 돌부리에 넘어져 엉엉 울고 있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다 말고 깜짝 놀라 릴리를 부르며 뛰어가는 제이콥을 바라보던 나는 덩달아 놀라며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갔다.
* * *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요즘 놈들이 동양인만 찾아다니시는 거 모르시죠? 조용히 하고 발라요.”
부지런히 걸어 시더빌에 도착하자, 해는 어느새 황혼을 넘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시더빌로 들어오기 전 미리 집에서 가지고 온 숯가루를 꺼내든 제이콥은 내 얼굴과 옷을 거멓게 칠했고 냄새가 풀풀 나는 거적때기를 내밀며 입으라는 말을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지 깔깔 웃으며 숯가루를 바르는 릴리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허둥거리는 제이콥.
나는 그 모습에 살며시 웃으며 거적때기를 입었고 이내 저 앞에 보이는 시더빌 도시를 향해 걸어갔다.
짙은 어둠과 없다시피한 조명 덕분에 흔한 거지처럼 보이는 나와 제이콥 부부.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길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인파 속에 조용히 묻혀 제이콥에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어느새 떨어진 환영 간판이 있는 도시 입구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역겨운 탄내와 드럼통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릴리가 흠칫 떨며 제이콥의 손을 잡았다.
“- - - - - -하하하!”
마을 입구와 건물에는 분명 광신도들의 표식이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고 부숴진 콘크리트들이 즐비한 바닥에는 흙먼지와 함께 더러운 오물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를 점거한 게 광신도들인 것을 광고하기라도 하듯 장작이 피워져 있는 드럼통 곳곳에는 웃고 떠드는 광신도들이 널려있었는데,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제이콥이 순간 내 팔을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개 숙여요. 절대 눈 마주치지 마요.”
다행히 몸수색 같은 건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놈들의 더러운 성격을 알고 있는 제이콥은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당부했고 나는 순순히 눈을 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정하자. 현 목적은 짐승 굴에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지 그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의 경중함이 어디 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했고 제이콥의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웰컴투 시더빌! 바닥에 떨어져 흙먼지에 휩싸인 환영 간판은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땅만 보고 걷기를 1분. 제이콥이 조용히 속삭인다.
“들어왔어요, 이제 고개 들어도 돼요.”
오물과 쓰레기들만이 가득한 바닥을 보고 걷느라 속이 메스꺼워진 참이었다.
나는 제이콥이 고개를 들어도 된다고 말을 건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고 최대한 신선한 공기를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광신도들이 점거하고 있는 이 시더빌의 모습은 오물과 쓰레기들이 널린 바닥만큼이나 더러운 곳이었다.
“- - - - - -!!”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분명 해가 진 하늘은 칠흑이었지만, 이곳저곳에서 설치된 횃불들은 이 도시 자체를 붉게 만들었다.
마치 선혈이 뚝뚝 떨어지기라도 하듯 피 냄새에 눅눅해진 도시.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고함과 머리채가 끌려다니는 매춘부들의 비명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정신을 더럽히는 마약 냄새가 풍겼고 공터 중앙에는 광신도 놈들이 만든 더러운 조형물들이 즐비했다.
거지들과 다를 바 없는 난민들과 길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고아들.
하지만 시더빌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인 마냥 조용히 수긍하고 있었고 곳곳에선 쾌락에 몸을 던진 인간들이 뱀의 머리처럼 선한 인간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궁창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와 곳곳에서 맡아지는 절망과 두려움의 향기는 시나브로 다가와 나를 더럽혔다.
분명 신을 믿지 않지만, 타락과 지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인외의 광경이다.
나는 구역질이 치솟아 오르고 눈에는 힘이 들어갔지만, 내 팔을 조용히 잡아끄는 제이콥 덕분에 순간 몰려오는 역겨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더러운 이면을 보지 못하도록 릴리의 얼굴을 품속에 가둔 제이콥은 나에게 씁쓸한 얼굴로 읊조렸다.
“역시 외부인이 맞으셨군요.”
내가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보았던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광신도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쳐가는 사람들. 나는 마을 교회 중앙에 부서진 십자가를 보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