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부 47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순, 순순히 넘겨주면 해치지 않을 거야. 그동안 장롱에 숨어있어, 알았지?”
광신도 놈들은 문을 부술 듯 두들기며 집 안에 있는 부부에게 빨리 나오라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 놈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남성은 옆에서 처량하게 떨고 있는 릴리에게 침실 옆 장롱을 가리키며 말했고 다시 한 번 나를 노려본 뒤 엉거주춤 방을 나섰다.
순순히 넘기면 해치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의문인 상황에서 나는 꽁꽁 묶여있는 양팔과 남성의 말을 통해 내 처지를 대략 예상할 수 있었다.
릴리라는 여인이 나를 대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처음 나를 구했을 당시에는 분명히 다른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틀 만에 중상을 회복하는 능력을 두 눈으로 목격한 뒤 교주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나를 두려워했고 지금 찾아온 광신도 놈들과 같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교주라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공통점이라도 찾은 모양.
낯선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졸지에 광신도 놈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 - - - - 맹세코 몰랐소! 제, 제발!”
“촌장 놈들한테 다 듣고 온 거니까, 입 닥쳐! 그 동양인 어디다 숨겼어!”
“그, 그럴 의도가 아니- - -.”
그리고 내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이 밖에서는 문이 열리는 격한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남성의 애원이 들려왔다.
광신도 놈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번호로 불리며 두려움에 찌들어있던 부부는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며 놈들에게 휘둘렸고 기세등등 집안으로 들어온 광신도들은 집안에 식기들을 부수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놈들 입에서 나온 한 가지 단어 동양인.
물론 동양인들이 미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조그마한 마을에 인종을 콕 집어 지칭하는 놈들은 부부가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대체 동양인을 왜 찾는 거지? 혹시 서장이 언급한 소문과 광신도 거점을 습격한 게 우리라는 정보가 벌써 퍼진 것일까?
나는 상황이 급하게 흘러가는 걸 느끼며 속박을 풀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밧줄을 뜯어내려고 했다.
“어 우아! 아!”
하지만 그 순간 장롱에 숨어있어야 할 릴리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나에게 달려왔고 이내 양팔을 속박하고 있는 두꺼운 밧줄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마치 도망가라는 듯 엉성한 손길로 밧줄을 풀어주며 한쪽 창문을 가리키는 그녀.
남편으로 보이는 저 남자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 앞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이 자신이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보처럼 나를 풀어주는 릴리.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진 양손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 - - - - -!”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고민하거나 말거나 또 바보 같은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고 이내 서랍에서 꺼낸 무언가를 나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밖에서 남성이 광신도 놈들에게 시달리는 매우 급한 상황에서도 그녀가 이쪽으로 가져온 것.
그것은 내가 강에 떨어졌을 당시 몸에 지니고 있던 가죽 홀더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수첩이었다.
그리고 릴리는 수첩 안에 들어있던 채연이의 사진은 어떻게 알았는지 따로 빼놔 소중히 말려둔 상태였고 나에게 어서 도망가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채연이가 찍힌 낡은 사진을 조용히 내밀었다.
항상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소중한 아이의 사진.
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무언가 씁쓸해 보이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에게 나를 풀어주면 위험한 게 아니냐는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순간 밖에서 들리는 욕설과 파괴음은 내 말문을 틀어막는다.
다급한 얼굴로 빨리 가라는 듯 내 등을 밀고 들 몰래 창문을 열어주는 그녀.
나는 연약한 힘이지만 무언가 저항할 수 없는 그 선의 앞에 얼떨결에 창문을 넘어 뒷마당 앞에 보이는 깊은 숲속과 마주했다.
나무가 짙고 햇빛마저 들어오지 못한 짙은 저 숲속으로 도망간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주춤거린 나는 집안 창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 - - - -.”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보란 듯이 아이를 안고 있는 제스처를 취한다.
소중한 갓난아기를 재우듯 기분 좋은 얼굴로 살색의 요람을 조용히 흔드는 릴리. 그녀의 어수룩한 입에서는 분명 자장가가 들려오고 있었고 겁에 질려있던 얼굴은 그날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우수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남성을 말리던 릴리는 나와 광신도들의 차이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살며시 입을 다물며 천천히 뒷걸음질이 쳐 지는 숲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사박.
트리니티강에 빠져 떠밀려온 이곳은 국유림과 인접한 곳이 아닌 다른 지역 같았다.
그것도 광신도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보란 듯이 차를 타고 다니는 위험한 지역인 것이다.
현재 몸 상태도 꽝이고 최소무장인 대검마저 사라진 상태, 저 집에서 놈들과 싸우다가는 수많은 광신도 놈들에게 추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점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녀는 내가 무사히 아이를 만날 수 있게 창문 밖으로 빼내 준 것이다. 운이 좋았다.
“- - - - - -.”
놈과 싸우면서 온몸을 난도질당했었다.
하지만 꼼꼼하게 묶여있는 붕대들은 내 변종 능력과 맞물려 몸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었고 물에 빠져 차갑게 식어있던 체온은 그들의 따뜻한 간호로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 안전하게 캠프로 복귀하기면 되는 일, 하지만 간질거리는 미묘한 본능은 내 심장에 묵직하니 머무르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고 숲을 걷고 있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그들의 안전을 미끼 삼아 또 한 번 채연이를 만날 수 있게 된 비겁한 남자의 운.
그래, 근데 내가 그걸 만끽해도 될까?
라디오 속 광신도들의 교주는 인간의 이기심이 또, 인간의 욕심이 이토록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 일부분이 된 것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세상을 여행하면 할수록 그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상처 입은 가슴은 사람에게 치료받고 사람에게 절망한 마음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참한 현실의 양면은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 -꺄악-!!”
삐걱거리는 몸과 흘린 피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띵하다.
그리고 중상을 입고 겨우 일어난 몸은 단연하건대 최악이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반사적으로 내 몸을 움직이게 했고 나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저 앞에 보이는 집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강대한 적이 만나 낭떠러지에 떨어지다가도 항상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나게 된 나.
세상은 늘 그렇듯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여주며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뒷면이냐, 아니면 앞면이냐.
그리고 나는 이런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동전을 곧게 세우고는 했다.
왜냐하면, 어떤 면이 보일지는 동전을 쥔 내 손이 결정하는 것일 테니까.
“안, 안돼! 릴리!!!”
숲을 빠져 나와 비명이 들린 집을 향해 달리자, 창문 사이로 제압당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 온몸이 구속당한 채 자신의 아내를 울부짖는 털북숭이 남성, 그리고 그 앞에는 머리에 권총을 겨눠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릴리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부부는 갑자기 사라진 나 때문에 졸지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속삭임은 근육을 미친 듯이 펌프질하는 윽박지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뒷마당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뻑뻑한 눈동자를 연신 굴렸다.
남자를 구속한 광신도 셋, 릴리 옆에 하나, 그 근처 나머지 둘.
머리를 스쳐 지나간 정보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을 긋는다.
“우리가 병신새끼로 보이지? 셋 셀 동안 말해. 아니면 머리통에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10m. 놈들의 고함과 웃음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모른다고 울부짖고 있었고 미련하게 나를 풀어준 여자는 그저 울고 있을 뿐이다.
깊은 숨을 훅 내뱉는다.
녹진한 심장의 향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온다.
그리고 창문과 1m 앞에서 있는 힘껏 점프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유리창으로 막힌 창문을 뛰어넘었다.
순간 사라진 중력과 유리창이 쨍그랑 깨지는 소리.
고개를 들자 느려진 시야 사이로 흩날리는 유리 조각들과 놈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 - - - -!!”
중심을 잡을 찰나도 필요 없었다.
릴리에게 총구가 겨눠진 자리로 떨어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는 광신도 놈의 울대를 쳤고 자동으로 움츠려지는 움직임을 따라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권총을 낚아챘다.
엉망인 파지법 때문에 너무나 손쉽게 내 손으로 들어오는 45구경 권총.
외마디 신음을 내뱉은 놈은 울대를 부여잡지만, 나는 무엇에 당했는지 인지할 순간도 주지 않기 위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45구경이 주는 묵직한 반동과 그대로 뚫려버리는 머리통.
느려진 시간 속에 갑자기 일어난 대이변은 방 안에 있는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나는 착실하게 몸을 움직이며 판단이 정한 다음 움직임을 천천히 시행했다.
머리가 터져 쓰러지는 놈을 밀어내고 바닥에 쏟아지는 뇌수 사이로 놈들을 바라본다.
총알은 총 6발, 정렬시킨 총구는 다음 표적을 찾아 조용히 들어 올려 졌고 이내 가장 먼저 총을 뽑을 수 있는 놈이 누구인지 판단한다.
“뭐, 뭐야!”
허리춤에 권총을 꽂아둔 놈, 부부를 조롱하느라 지팡이처럼 소총을 짚고 있는 놈.
정말 제각기 병신들인 광신도 놈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로 인해 동료의 머리가 날아가자 황급히 상황을 인지하며 엉거주춤 총을 꺼내 들렸고 했다.
하지만 발을 디딘 순간부터 신경을 폭발시키고 있던 나는 움찔거리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찢어진 입술을 핥았고 생각이 아닌 본능이 시키는 방향으로 사선을 정렬해 총을 뽑아 드는 순서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묵직한 45구경 탄은 어디를 맞던 공평하게 숨을 끊어놓았고 바닥과 벽지에 흩뿌려지는 피 사이로 약실을 빠져나온 탄피가 허공을 수놓는다.
나는 총성에서 오는 먹먹함을 조용히 삼키며 뒤에서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는 마지막 광신도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발버둥 치지 못하게 몸을 잡고 있다가 순식간에 죽은 동료들 때문에 총조차 뽑지 못한 그놈.
하지만 용케 칼은 쥐고 있었는지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눈 광신도는 나에게 소리쳤다.
“오, 오지 마! fuc- - -”
탕-!
전형적이다. 광신도 놈은 영화를 많이 보기라도 했는지 인질을 잡은 후 나에게 소리쳤지만, 놈이 잡은 칼과 두려움보다 내 총알이 더 빨랐다.
나는 마치 한국산 카우보이처럼 놈이 욕설을 끝내기도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총알을 발사했고 울려 퍼진 파동은 유리 찬장에 놈이 흩뿌린 피와 뇌수가 덕지덕지 튀어 오르게 만들었다.
총구에서 실안개처럼 올라오는 나약한 화약 연기.
나는 그것을 후 불까 하다가 넋이 나간 남자를 보고 그만두었다.
* * *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곧 일어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릴리 옆에서 침울해진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가 타온 싸구려 커피를 조용히 마시며 아직도 피 얼룩이 묻어있는 마룻바닥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놈들을 죽이고 현장을 정리하기를 1시간, 내가 놈들을 죽이자마자 정신을 잃은 릴리는 아직 침대에 누워 옅은 숨을 색색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내 위로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릴리가 풀어 준 거죠?”
큰일을 겪은 남자는 많이 지친 듯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나에게 사건의 정황을 물어보았고 씁쓸한 커피와 함께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처럼 나를 풀어준 릴리와 그런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은 남자.
한동안 침묵과 창문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우리 사이에 맴돌았고 남자는 대화를 이어갔다.
“어린 딸이 한 명 있었어요. 난임 때문에 몇 년을 고생하다가 정말 기적처럼 얻은 아이여서 릴리도 나도 애지중지 키웠죠. 그러다 종말과 대지진이 일어나고……, 우리는 남들이 다 그렇듯 놈들을 피해서 여기로 정착했어요.”
남자는 마치 하소연을 하듯 이마와 눈을 손으로 가리며 읊조렸다.
그리고 나는 릴리의 부자연스러운 모습과 헤어지기 전 보여주었던 그 행동을 통해 부부가 겪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할 수가 있었다.
남자는 잠들어있는 릴리의 손을 조용히 붙잡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는 날에 마당에서 총을 맞아 제 품에서 죽었어요. 식량을 뺏어가려던 부랑자들 짓이었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지가 않아요. 내 품에서 죽어가던 어린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정신을 놓아야 살 수 있었던 릴리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밖에 내뱉을 수 없는 입과 무언가 나사가 풀린 듯 몽롱한 행동.
릴리는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고 찢어지는 냉혹한 현실을 살기 위해 스스로 정신을 놓았다.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채연이의 사진을 쳐다보는 그녀와 마치 소중한 추억을 회상하듯 살색의 요람을 흔들던 몸짓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어떠한 영화와 드라마보다 질척하고 사무치는 현실을 느끼며 식어가는 커피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해가 떠 있는 낮인데, 이상하리만큼 눅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