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2부 41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광신도 거점의 성공적인 제압과 내 무사 귀환이라는 희소식은 침체하여 있는 캠프 분위기에 기쁨이라는 설레는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나와 노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승전을 기념하는 작은 파티를 열었고 일행들과 캠프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공터에 모여 웃고 떠들었다.
광신도 놈들이 모아 둔 식자재와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는 술까지 푼 성대한 파티는 어색한 관계를 풀기에 충분했고 나도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즐겁게 시작한 캠프 파티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간 느꼈던 긴장과 두려움 속에 많이 지쳐있었는지, 밤이 찾아오자마자 술과 기쁨에 취해 바닥에 뻗었기 때문이다.
불침번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전부 잠을 청하기 위해 오두막으로 돌아갔고 시끌벅적하던 공터는 어느새 찾아온 풀벌레 소리와 마지막 장작이 불타오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 한가운데 조용히 앉은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눈동자 안에 담았다.
“- - - - -.”
기분 좋게 오른 취기와 저절로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고요한 주변 공기.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노도와 같이 흘러갔고 복잡했던 내 머리도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한쪽에 숨겨두었던 와인을 조용히 꺼내 들며 별이 흐르고 있는 하늘 아래 두 발로 섰다.
위험천만한 작전과 즐거운 파티는 모두 끝이 났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정리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직 풀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곽동윤과 에덴의 단체장으로서가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쓰러지기 전날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혼이나 본 채연이는 파티 내내 풀이 죽어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란 것은 퉁퉁 부은 눈을 통해 알 수 있었고 힐끔힐끔 던지는 시선을 통해 아이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당장 나에게 달려와 안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고민하는 아이가 얼마나 안쓰럽던지 나는 한동안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모닥불 근처를 맴돌았다.
그리고 모든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뜰 때쯤 술에 취해 얼굴에 홍조를 머금은 강수련이 먼저 돌아가겠다는 말과 함께 채연이가 혼자 걸어간 방향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된 좋은 분위기에 아이와 화해를 해보라는 강수련의 좋은 조언.
나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던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공터가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서 청승을 떨던 나는 유리잔 한 개와 앙증맞은 머그잔을 들고 채연이가 혼자 걸어갔다는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찌르르, 찌르르.
한동안 먹구름이 끼어 어둡더니, 오늘 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고요한 숲을 조용히 걸어가며 아이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서 졸졸 흐르는 작은 개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달빛을 머금고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개천물. 나는 빛이 반사되는 그 광경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기다, 나무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채연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채연이도 내가 왔음을 아는지 이쪽을 향해 몰래 시선을 돌리다 흠칫 놀라 나무에 몸을 숨겼다.
얼굴에 맺히는 웃음. 물 위에 비치는 은하수가 아이 대신 부끄러워 모습을 숨긴다.
“- - - - - -.”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니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풋풋한 나이에서 오는 그 오기란 게 무엇이라고.
아직 이 모든 감정이 생소한 아이는 자기 자신도 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는지 나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없는 사이 너무 커버렸다는 노인의 말이 조용히 머리를 맴돈다.
그리고 아이의 복잡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나는 먼저 옆으로 다가가 채연이 옆에 앉았다.
“한국에선 이런 거 보기 힘든데, 그치?”
채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이곳은 정면에 앙증맞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뒤 능선에는 국유림의 전체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는 수많은 나무와 어디가 경계인지 모르겠는 밤하늘의 은하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이곳으로 온다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 물음에 채연이는 눈물이 섞은 콧물을 훌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가지고 온 와인과 잔을 옆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끌어모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아이에게 말했다.
“아빠가 미안해.”
항상 내 등 뒤에 업혀있는 채연이를 기억한다.
너무나 작고 여려 내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았던 그런 아이, 나는 그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갔고 등 뒤를 바라볼 여유를 가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지나 나는 멀게만 느껴지던 종착점 도착했다.
하지만 비로소 끝에 도착한 나의 어깨는 가볍기 그지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업혀있어야 할 등 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새 이만큼 커버린 채연이가 등 뒤가 아닌 내 옆에서 서서 두 발로 걷고 있었으니까.
내 손은 주름졌고 새치는 보기 흉했다.
하지만 그 세월을 거름 삼아 자라난 나의 꽃은 눈이 부실만큼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아마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내 품에 안겨 귀엽게 지저귀던 아이가 이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가 되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내가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힘찬 새를 가두는 새장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달빛에 비추는 아이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고통 받았던 이유가 이 아이를 존재하게 해준 삶의 숙명이었다는 것을.
“- - - - - -.”
그리고 졸졸 흐르는 물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던 채연이는 내 진심 어린 사과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참고 참았는지, 눈가와 볼에 가득한 눈물은 아무리 닦아내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속상했을까, 나는 숨이 넘어갈 듯 꺽꺽 우는 채연이를 말없이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아무리 몸이 컸을지언정 내 기억 속에 아이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날 짧은 부녀싸움을 끝내고 처음으로 술잔이라는 걸 마주해봤다.
물론 채연이는 머그잔에 담긴 와인을 호기심에 한입 먹고 기겁을 했지만, 나는 그 모습도 너무나 즐거워 세상사 걱정 없는 웃음을 오랜만에 터트렸다.
마치 영화관처럼 멋진 풍경과 싸구려지만 달콤했던 와인.
그간 겪었던 고난과 통증이 나에게 강인함을 심었다면, 그날 밤 채연이와 구경했던 달빛의 커튼은 쓰러져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 * *
“넘어간다!!!”
파스스스스스 - - - - - - 쿵!
노인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이곳에서 수년째 뿌리박고 살았을 나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일행들은 재빨리 손도끼를 들고 나무의 잔가지를 쳐내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도 찌르르 울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땀을 닦아낸다.
오전에 잘라낸 나무만 세 그루. 물론 일손이 모자라 작업의 진행속도는 느렸지만, 캠프 사람들이 웃는 낯으로 한 손씩 거드니 고된 일에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날이 완전히 나가버린 도끼를 바닥에 내려두고 그루터기에 털썩 앉는다.
“줄톱으로 잘라다가, 한쪽에 세워놔!”
그리고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 사이로 바삐 현장을 지휘하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장벽 정도는 설계할 줄 아는 노인.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노인이 바위를 표시해둔 표식들이 캠프로 들어가는 입구 주변을 크게 빙 두르고 있었다.
빅벤드 마을에 외관을 보고 영감을 얻은 우리는 본격적으로 캠프의 요새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근처에서 마을을 점거하고 있던 광신도들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쉽사리 포기할 놈들이 아니란 건 여러 번 언급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빅벤드 마을을 제외하고도 국유림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마을은 수십 개가 넘었는데, 그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적대관계를 세우는 등 독자적인 차지권을 가지고 생존해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빅벤드 마을의 경우를 봤던 우리는 당연히 그들도 잠재적인 적이라고 규정하고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광신도들에게 뺏은 풍족한 자원과 능력 있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먼 타국에서 제2의 에덴을 만들게 된 것이다.
“뭘 실실 웃고 있어?”
해가 중천에 뜨자 열심히 일하던 캠프 사람들은 잠시 점심을 먹기 위해 앉기 좋은 자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제일 바쁘게 일하던 노인은 식사가 배달된 방향이 아닌, 내가 앉아있는 그루터기로 다가왔고 톱밥들 위에 털썩 앉으며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대답이 없자 머리를 벅벅 긁은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바쁘게 찾았다.
그리고 한쪽에서 무리를 이룬 채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채연이를 발견하고 피식 웃는다.
“화해했냐?”
채연이는 어제 있었던 대화로 슬픔을 완전히 털어냈는지 밝은 얼굴로 또래 아이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내가 손수 챙겨준 권총 홀더가 매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분명 소구경 권총이 꽂혀있었다.
9mm 탄만은 인정할 수가 없어 찾아준 FN사의 소구경 권총.
하지만 채연이는 도리어 기뻐하며 강수련과 친구들에게 열심히 자랑하고 다녔고 그 총이 꼭 내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끼고 다녔다.
“네.”
그리고 노인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한 나는 땀을 식혀주는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며칠 전부터 노인에게 체력훈련과 가장 기초적인 호신법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 하지만 오늘부로 채연이를 포함한 아이들의 훈련은 내가 직접 담당한다.
더 안전하게, 더 확실하게. 그간 내가 겪으며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는 에덴이라는 이름을 이어갈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미련은 물속에 쥐고 있는 모래알이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틈새로 서서히 빠져나가 작은 찌꺼기만을 남길 텐데, 나는 여전히 그것을 위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모든 행동이 미련을 향한 미련함인 걸 알게 되었다.
채연이도 나와 같은 성인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의 품을 떠나 많은 것을 배우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터인데, 그 과정 안에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채연이는 자신의 아빠가 그래왔듯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정을 이루고 자신의 삶 속에 큰 획을 긋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꽃이진 자리에 다시 꽃이 피듯, 아이는 행복했던 내 삶을 이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행복한 종착지.
하지만 그 종착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수많은 고통과 위험이 아이를 가로막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동윤아.”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입안에 조용히 삼킨 나는 서서히 몰려오는 허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부르는 노인은 톱밥에서 벌떡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고 그늘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나에게 뭐 잊고 있지 않았냐는 얼굴로 물었다.
“너 언제 할 거냐?”
“뭐를요?”
내가 까먹고 있던 일이 더 남아있던가? 마을에 거점을 차린 광신도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무사히 병상에서도 일어났다.
거기다 개인적인 채연이와의 문제도 해결했으니 장벽을 세우는 것 말고는 까먹은 게 없었다.
하지만 답답한 표정에 노인은 나를 보며 혀를 쯔쯔 찼고 어딘가를 향해 안쓰러운 눈을 보냈다.
그리고 얼떨결에 노인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강수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환한 웃음과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다정한 분위기.
종말 속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이지만, 강수련은 나에게 채연이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 여전히 예쁘다. 근데 강수련이 왜?
“결혼 말이야, 결혼!”
말귀를 못 알아먹은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노인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걸어와 내 뒤통수를 냅다 쳐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냐는 어투로 호통을 치며 결혼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꺼내 들기 시작한다.
그 단어를 듣자마자 순간 번개가 치는 머리와 멍해지는 눈.
결혼? 강수련하고 내가? 나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멍청하게 노인을 바라봤고 노인은 정신을 차리라는 말과 함께 내 이마를 딱! 친다.
“어이구 등신…….”
어…….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노인에게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강수련에게 향했고 그곳에서 갑자기 더 예뻐 보이는 그녀를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단아하게 땋은 긴 머리.
하지만 푸릇푸릇한 주변 광경에 둘러싸인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상하리만큼 얼굴에 열이 오른다.
같이 있는 게 당연하다 여겼기에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그녀와의 관계는 봄바람처럼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