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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243화 (243/313)

# 243

2부 40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빅벤드 마을의 서장은 내가 곽동윤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어떤 이유로 알아보고 확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사이에 바뀐 그들의 태도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소문의 당사자인 내가 분위기를 망쳐서 그렇지 아마 웃는 얼굴로 식사를 끝내고 대화를 했더라면 메리 제인이 좋아할 법한 후식까지 얻어먹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내 섣부른 행동에 잔소리는커녕 도리어 칭찬을 해주며 윗옷을 걸쳐 입었다.

“잘했다, 이용당하느니 초장에 잘라두는 게 좋겠지.”

나를 우습게 본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지, 능글맞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던 서장은 우리를 잘 구워삶아 자신의 마을에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 같았다.

대중이 선호하는 물건을 이용하기 좋아하는 정치인 습성 딱 그 자체,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듣기도 전에 격한 감정과 불쾌함을 내보였고 그들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딴 인형놀음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크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영웅이라는 역겨운 단어에서 이득을 취하려던 소인배와 완전히 척을 진 것뿐이니까.

쿵쿵-!

“…빨리빨리 움직이십시오! 곧 마을 정문이 닫힐 시간입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에게 과한 호의를 보내오던 남성은 식사자리가 파탄이 나자마자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고 병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빨리 나가라는 잔소리를 해댄다.

우리 들어온 지 1분도 안 됐거든 시발놈아? 물론 우리 대신 노인이 소소한 반항을 해 보였지만, 그들이 한국말로 하는 욕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순간 웃음이 터진 메리제인과 자신이 욕을 먹었는지도 모른 채 근엄한 얼굴을 지어 보이는 남성.

나는 한쪽에서 숨죽여 웃으며 벗어두었던 양말을 신었고 따로 챙겨둔 가방을 등 뒤로 맸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노인이 홀가분한 얼굴로 내 등을 툭 쳐주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자.”

뭐……. 당연히 쫓겨났다. 아니, 쫓겨나기만 해서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게 맞다.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옛 기억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지 서장을 해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하필 오른손에 잡혀있던 게 식사용 나이프였고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자경단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기에도 무언가 구차해지는 상황.

나는 침착하게 숨을 내뱉으며 일단 서장에게 사과를 건넸지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경단과 함께 서장은 자리를 피했고 온화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던 식사자리는 그렇게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서장은 대외적인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지 우리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일단 입 다물고 조용히 나가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고 하루 동안 신세를 졌던 주택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저 뒤쪽에서 다급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문지방을 밟은 발걸음이 뚝 멈춘다.

“Mr. 곽! 잠시만요!”

조용히 떠나려는 우리를 불러 세운 것은 나를 물심양면 치료해준 그 의사 선생님이었다.

나와 일행들이 떠난다는 소리에 급히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흘러내리는 금테 안경을 쓱 올리며 숨을 몰아쉬는 백인 의사.

그에게 큰 유감이 없었던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을 향해 서둘러 다가오는 그와 마주 봤다.

그러자 백인 의사는 자신이 챙겨온 종이봉투 꾸러미를 옷 속에서 꺼내 나에게 내밀며 조곤조곤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충분한 여건이 되시거든, 정밀 검사 꼭 받아보세요. 그리고 약을 드릴 테니 메모에 쓰여 있는 대로 꼭꼭 챙겨 드시고요.”

약을 준다고? 의사가 내민 봉투 꾸러미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갖가지 알약이 담겨있었다.

의료품이 거의 목숨과 비교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나에게 약을 건네는 백인 의사.

도대체 내가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 의문스러운 눈빛에도 의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빙긋 웃더니 저 뒤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남성들에게 제법 위엄있는 목소리로 엄포를 줬다.

“절대 뺏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확인해볼 테니까.”

마을 유일 의사라는 이름의 힘은 막강했다.

금방이라도 약을 뺏을 듯 이쪽을 노려보던 남성들은 백인 의사에 말 한마디에 불만스러운 시선을 황급히 돌렸고 우리에게 빨리 나오라는 말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의사가 내미는 약 꾸러미를 받아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흐렸다.

“이걸 어떻게…….”

“꼭 무사히 돌아가세요. 아이들 약도 챙겨뒀으니 아프실 때 먹이시고요.”

그리고 백인 의사는 첫 만남 때부터 그랬듯 내가 품은 의문을 단숨에 끊으며 자기 할 말만 했다.

하지만 그 단호한 끊음은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말 안 해도 다 괜찮다는 푸근한 감정을 품게 했고 나는 멍청한 얼굴로 약 꾸러미와 의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묘한 감정으로 막혀있는 입을 열려고 했다.

“이봐요! 빨리 나오라는 소리 안 들립니까?”

하지만 의사에 타박으로 짜증 지수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남자는 문 옆에 삐딱하게 서서 우리를 재촉했고 의사는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개를 꾸벅 숙인 노인과 메리제인은 서둘러 내 팔을 잡아끌었다.

“- - - - -아.”

나는 일행들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걸어가면서도 문 앞에 서 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대가 없는 호의. 그것은 적응하지 못할 만큼 생소했고 품속에 안겨있는 알약 꾸러미처럼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본 백인 의사는 낡은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주택을 나온 우리는 여전히 따끔한 주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마을 길을 걸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떨어지기 시작한 주황빛 황혼이 구름 사이에 끼어있었고 조용하던 마을은 집으로 돌아오는 주민들로 복잡해졌다.

하지만 우리와는 더 이상 관계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나와 일행들은 저 앞에서 보이는 마을 입구로 걸어가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마을 입구까지 우리를 끌고 온 남자들은 단단하게 닫혀있는 문을 열어주며 우리에게 경고했다.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십쇼.”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나는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고 노인은 또 한국말로 욕을 했다.

하지만 알아들을 리 없는 남자들은 기분 나쁜 듯 인상만을 찡그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보라는 신호에 재빨리 걸음을 옮긴 우리는 빅벤드 마을의 정문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를 차량으로 데리러 올 용팔이를 기다리는 것뿐,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고 노인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애들이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그래야죠.”

광신도들의 거점을 해치웠으니 당분간 이 근방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규모는 여전히 거대했고 우리는 에덴이 보낼 수송기가 올 때까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말 그대로 바쁘다. 병가 하루 만에 다시 출근하는 기분으로 입맛을 다신 나는 근처에 있을 용팔이를 부르기 위해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 - - - - -!!!”

그리고 앞주머니에 꽂아둔 무전기를 들어 올린 그 순간 방금 지나온 문 쪽에서 들려오는 절규 소리에 숲을 향해 걸어가던 우리의 발걸음은 반사적으로 멈췄다.

한 여성이 누군가에 호소하듯 울음이 섞인 처절한 애원을 하는 소리.

나는 무전기를 손에 든 채 고개를 살며시 돌렸고 그곳에서 한 자경단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또.”

노인의 말대로 뭔가 싶었다.

여성은 냉정한 얼굴로 자신을 밀어내는 자경단에게 울고 불며 달려들었고 나중에 가서는 무릎까지 꿇으며 무언가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성의 뒤로는 한 어린아이와 크게 다친 남자가 누워있었는데, 어째 멀리서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누구지?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그리고 그 얼굴을 알아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메리 제인이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 저 사람들 그 가족 아니에요?”

아, 맞다. 나는 다른 두 명은 몰라도 바닥에 누워있는 저 남자의 얼굴은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저 남자의 붕대를 감아준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셋 전부가 우리에게 구조를 받았던 빅벤드 마을의 주민들이라는 것인데, 왜 우리처럼 쫓겨나는 행색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전원이 들어와 있는 무전기를 앞주머니에 다시 꽂아두며 정문 앞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언쟁에 조용히 집중했다.

“- - - - 그이가 매우 아파요, 네? 제발, 제발! 일주일만 시간을 더 주세요.”

“마을 주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결과를 본 서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니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빨리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저, 저희는 세뇌 같은 거 안 받았어요! 그거 다 미친 소문인 거 아시잖아요!”

“제가 판단할 사항이 아닙니다.”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온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길 저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바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치료하자 했던 생존자라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주민들이 투표로 결정했다는 냉정한 말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문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그녀의 당황한 얼굴은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중상자와 아이 그리고 여자 한 명. 다른 캠프에 합류하지 못하는 이상 불모지에 떨어진 그들의 미래는 안 봐도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물러나세요, 이제부터는 경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 - - - -흐윽.”

억울하게 잡혀 두려움에 떨다, 천운에 닿아 힘들게 돌아온 가족.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주민들의 행동은 고생 많았다는 따뜻한 위로가 아닌, 광신도에게 잡혀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쏟아지는 질타의 시선이었다.

혹시 놈들처럼 수상한 마약을 하지 않았나? 놈들에게 몸을 내주지는 않았나? 고향으로 돌아와 화냥년이라고 불러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여자는 가족들에게 겨눠지는 총구에 비틀비틀 멀어지다 거대한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 어린 자식과 아픈 남편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듣지는 못했지만 주저앉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많은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른 입술을 핥은 나는 메리 제인에게 손짓하며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용팔아.”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저 금방 가요, 형님.]

“응, 고맙다. 그런데 트럭 짐칸에 자리 좀 만들어줄 수 있을까.”

[네? 아, 뭐 가능은 하지만….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없다. 나는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무전기를 다시 앞주머니에 꽂아 넣었고 버려진 가족들을 향해 황급히 뛰어가는 메리제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산등선에 걸쳐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한 황혼, 오늘도 어김없이 어김없이 하루가 끝나고 빅벤드 마을에도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곳곳에 켜지기 시작하는 횃불이 보이고 장벽 안에서는 사람들이 내뱉는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는 그곳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빅벤드를 등지고 걸어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뒤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울면서 고맙다고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와 피곤한지 길게 하품하는 노인의 모습.

저 멀리서는 사라져가는 황혼을 따라 달려오는 트럭 한 대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능선 아래로 뚜벅뚜벅 내려가며 어느새 아물어버린 목 상처의 붕대를 풀어버렸다.

“- - - - - -.”

저 멀리 트럭의 엔진소리가 들려오자 마을 장벽에서 우리를 향해 보내는 경계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중상을 입은 남성을 업으며 그들을 향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을 던졌다.

생존이 우선시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인 저들을 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종말이라고 말하는 괴물들의 존재와 인간 같지도 않은 광신도들의 구분 점은 그저 외관의 차이가 아닌, 그 속 안에 뭉쳐있는 더러운 구정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마지막 황혼이 만들어낸 우리 일행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오늘도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튼튼한 발걸음에 담았다. 우리의 그림자는 분명 같이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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