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2부 3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피부에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은 이마를 기분 좋게 훑고 지나간다.
오랜만에 깊은 잠자리에 들었는지 정신은 가을하늘만큼이나 맑았고 완전히 사라져버린 근육통은 제 컨디션을 찾아주는 기분이었다.
얼굴에는 평온한 표정이 맺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은 게으름이 향긋한 꽃냄새와 함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평온 속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 버릇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너무나 밝은 햇살이 내 얼굴로 쏟아져 내린다.
“- - - - - -.”
눈을 뜨자 폐부에 고여 있던 묵은 숨이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온몸에선 탈력감과 함께 숙취가 끝난 듯한 개운함이 몰려왔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천장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들어온다.
이곳은 또 어디지? 눈을 뜬 장소가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른함을 느끼며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자 하얀색 커튼이 일렁이는 평범한 가정집 내부가 주변 광경에 펼쳐진다.
종소리를 듣자마자 바닥에 쓰러진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치 꿈처럼 지나갔던 수많은 기억과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대충 인지가 가능했고 차에 실려 어딘가로 향하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었다.
이곳은 캠프가 아닌 걸까?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 있다는 걸 느리게 자각하고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침묵과 평온만이 가득했으며 이 방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열어둔 창문 앞에서 흔들리는 하얀색 커튼밖에 없었다.
아침인가? 낮인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지? 정신이 들자 내 머리에는 온통 의문밖에 없었다.
나는 일단 정말 포근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이불을 옆으로 치우며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향긋한 꽃냄새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대 오른쪽에는 하얀색 꽃병에 담긴 앙증맞은 들꽃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컵에 담긴 물과 함께 누군가 남긴 쪽지가 처연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순간 심한 갈증을 느끼며 거침없이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을 가져다 놓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아직도 물컵은 아직도 시원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물을 단숨에 마시며 열심히 양쪽 눈을 비볐고 이내 누군가 남기고 간 쪽지를 집어 재빨리 열어보았다. 그리고 쪽지를 읽는 순간 어이없는 웃음이 입가에 매달리고 의문이 풀렸다.
[안전한 곳이니까, 난동부리지 마라. 그리고 일어나길 기다리마.]
노인의 글씨체였다.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
장벽 안 에덴에서 처음 눈을 뜰 때가 기억나던 나는 노인의 말대로 얌전히 물컵과 쪽지를 내려놓으며 침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잠결에 빠져있던 정신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고 흐릿한 시야는 점점 또렷해진다.
그리고 내 몸을 살피자 어느새 깨끗한 갈아 입혀진 평상복과 다시 꼼꼼하게 치료된 상처 부위가 보인다.
나는 안전한 곳이라는 노인의 쪽지에 완전히 경계를 풀며 맨발로 침대에서 벗어났고 하얗게 페인트칠 된 문을 열며 방을 나섰다.
“- - - - 그러니까, 뇌가 원인일 수도 있다는 소리입니까?”
“다른 소견이 필요하지만, 일단 제 입장은 그렇습니다.”
“아니, 분명 라디오 소리에 반응해서…. 어?”
문을 열고 나오자, 정말 전형적인 미국의 가정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실에 놓은 소파와 책상 위에 널려져 있는 수많은 서적. 그리고 그 앞에는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는 노인과 통역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메리제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거실에는 그 둘뿐만이 아닌 내 상처를 치료해준 것으로 보이는 백인 의사가 하얀색 가운을 입고 서 있었는데,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표정을 굳혔다.
순간 시끄러웠던 거실에 맴도는 침묵과 어색함.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물었다.
“…몇 시예요?”
* * *
원인 불명의 두통과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코와 귀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와 급격하게 내려가기 시작하는 심박 수. 분명 몸에는 아무런 외상이 없었지만, 점점 나빠지는 내 상태에 현장에 있던 일행들은 공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능한 에덴의 의료팀이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닌 상황.
그나마 캠프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데려가 봤지만, 인턴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나마 할 수 있는 응급처치와 치료에도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늘어졌다고 했다.
물론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기고 병원도 제집처럼 다니는 나라고는 하지만 일행들이 아무런 수도 쓸 수 없었던 적은 이번 처음.
그나마 정신 상태가 멀쩡했던 노인이 에덴의 주치의와 연락도 취해보고 제일 가까운 안전지대를 찾아보려 했지만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호흡이 점점 꺼져가는 위급한 그 순간, 내 목숨을 살린 사람은 광신도들 사이에서 우리가 구한 생존자 중 하나였다.
‘저, 저희 마을에 의사가 있어요.’
우리가 구출한 이들은 국유림을 기점으로 존재하는 마을 각지에서 인간 사냥을 벌이는 광신도들에게 잡혀 온 생존자들이었다.
물론 마을 전체가 공격당해 갈 곳이 사라진 사람도 있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마을에서 떨어져 있다 잡혀 온 생존자들도 다수.
그리고 그 중 밤중에 습격을 당해 납치당한 한 생존자가 아직 건재한 자신의 마을에 병원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나를 그쪽으로 옮기는 건 어떠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내 상태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일행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점점 조급해져 가는 노인은 그 생존자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트럭을 준비시켰고 새벽이 지나 해가 뜨자마자 나를 그 마을로 호송시켰다.
그렇게 혼절해 있던 나는 약 50분가량을 차로 달려 빅벤드(Big Bend) 라고 불리는 생존자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처음 우리에게 호송을 권유한 생존자는 자신을 구해준 우리에게 큰 호의를 품고 있었고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빅벤드 마을 사람들은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았고 줄 수 있는 건 전부 주겠다는 호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눈이 돌아가 버린 일행들과 외부인을 경계하는 마을주민들의 대치.
현장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으며 이성을 잃은 노인은 총알까지 장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위험천만한 대치 상태에 끼어들어 나를 치료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금테 안경을 쓴 백인 남자였다.
“두통은 조금 어떻습니까?”
에덴에서 내 주치의를 담당하고 있는 김 철이 날카로운 분위기에 써전이었다면, 내 앞에서 몸 상태를 물어보는 이 백인 남성은 천성이 착해 보이는 선인이었다.
하지만 그 실력만큼은 절대 모자라지 않는지 꼼꼼히 내 몸 상태를 확인하는 그의 자세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갖가지 질문을 받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괜찮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죽을 뻔했다는 노인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비록 통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일단 목숨을 건졌다는 것부터 천운.
나는 갑자기 찾아온 위기와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도와준 남자에게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러자 꼼꼼하게 차트를 기록하던 백인 남성은 얼굴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붕대 속 상처를 긁적이는 나에게 대답해주었다.
“아뇨, 제가 살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사족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병실 대용으로 쓰고 있는 다른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를 놀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그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다 저 뒤에서 진료가 끝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노인과 메리 제인에게 붙잡혀 온몸을 내줘야 했다.
노인은 내 얼굴을 떡 만두처럼 만졌고 메리 제인은 그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괜찮은 거지?”
“grandfather, 얼굴이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아요.”
“그냥 못생긴 거야.”
둘은 한국어와 영어를 어색하게 섞어가며 만담 같은 대화를 펼쳤지만, 사뭇 진지한 그들의 태도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던 나는 앵무새처럼 괜찮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완전히 괜찮아졌다는 걸 확신한 노인은 짙은 한숨과 함께 소파에 털썩 앉았고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장을 풀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많이 놀랐을 일행들.
나는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작은 읊조림과 함께 노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아, 채연이는 괜찮아요?”
“……우리 셋도 겨우 들어왔어. 다른 애들은 캠프에서 무사히 기다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아, 메리야! 용팔이한테 연락부터 해라!”
빅벤드 마을주민들은 내 치료는 허락했지만, 일행들이 마을 안으로 전부 들어오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무장해제와 함께 나를 포함한 3명으로 제한된 인원. 물론 별다른 수가 없었던 노인은 통역이 가능한 메리제인과 함께 나를 데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밖으로 나온 노인은 감정이 격해져 탈진하기 직전인 채연이를 수 시간 설득했고 이내 해가 지기 전에 캠프로 돌려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혼절해 있느라 아무 일도 몰랐던 나는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눈을 뜬 것이다.
똑똑
그리고 우리가 풀려버린 긴장의 여운을 한창 느끼고 있을 때쯤 굳게 닫혀있던 문에서 뜬금없이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며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 황급히 무전기를 내려놓는 메리제인과 소파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는 노인.
나는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들어와도 괜찮다는 대답을 던졌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살며시 열리며 몸에 권총 홀더를 소지하고 있는 남자 셋이 우리를 보며 인사를 했다.
“실례합니다, 일어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외부인을 경계한다고 하길래, 까칠한 태도를 보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를 찾아온 젊은 백인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에게 존칭을 붙이며 공손히 물었고 나는 예의상 도와줘서 고맙다는 대답과 함께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남성은 나와 손을 붙잡으며 우리의 모습을 살펴봄과 동시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몸이 괜찮으시다면, 서장님이 식사 한 끼 하자고 하십니다. 가능할까요?”
빅벤드 마을의 서장? 나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혹시 알고 있냐는 무언의 질문을 보냈지만, 노인은 만나본 적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느낌상 이 마을을 책임지는 사람인 것 같은데 노인의 말과는 다르게 외부인인 우리에게 살가운 호의를 보내는 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치료를 허락해 준 그들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던 나는 공손하게 존칭을 붙이는 그에게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 준비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캠프에 무전도 보내야 한다.
잠깐의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백인 남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나갔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조용히 무전기를 든 채 화장실로 향하는 메리제인과 내가 올 때 입고 있었던 임무복을 찾아 건네주는 노인.
나는 조용히 옷을 걸치며 몽롱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한 마른세수를 했고 이내 에덴의 모자를 눌러쓰며 노인에게 물었다.
“원래부터 저랬습니까?”
“아니, 어제 낮이랑 태도가 달라.”
어제랑 태도가 다르다.
노인은 분명 저들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방으로 찾아온 저들은 우리를 공손한 태도로 대했고 심지어 식사를 같이하자는 호의적인 제안까지 해왔다.
노골적인 적의보다 이유 없는 호의가 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바뀐 기류는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과 만남은 어차피 해결해야 하는 일 중 하나, 나는 캠프로 기다리고 있을 일행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신발 안에 넣어둔 날붙이 하나를 나에게 건넸고 나는 신발 뒤창에 그것을 조용히 숨기며 크게 숨을 내뱉는다.
물론 나를 대가 없이 치료해준 의사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터보다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식사 자리를 위해 나는 들이켰던 숨을 훅 내뱉으며 천천히 방문을 열었고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동시에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