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40화 (240/313)

# 240

2부 37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라디오는 처음 보는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고 조잡한 스피커에서는 격한 잡음과 함께 목이 반쯤 쉬어버린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깨끗한 억양의 그 남자는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연설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사람이 많은 건물 안이었는지 윙윙 울리는 목소리와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하지만 뭉개지는 잡음과 작은 소리 때문에 연설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천천히 라디오 볼륨을 올리며 귀를 기울였다.

[ - - - -새로운 땅이 오고 있습니다.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착각하는 저 무도한 자들 앞에 드디어 새로운 법칙이 오고 있습니다. - - - 하늘은 한낱 인간이 예상치도 못한 형상으로 녹아내릴 것이고 땅 위에는 더러운 자들이 흘린 피와 시궁창 가득할 것입니다. 구시대의 법도, 법칙, 세계. 그 모든 것을 씻어 내릴 구원을 보십시오. 종말은 내일의 여명이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발밑을 보십시오, 창밖을 보십시오. 여러분, 곧 찾아올 거룩한 왕국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 - - Big Father! 오직 진실 된 아버지만이 저희를 굽어살피십니다. 거룩한 영광과 숭고한 자비를!]

힘 있는 목소리와 잡음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리는 억양, 라디오 속 남자는 대중의 이목을 잡아끄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설을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그가 내뱉는 마지막 단어와 문장을 곱씹으며 그 뒤에 들려오는 수많은 사람의 구호를 머릿속에 되새겼다.

신에게 거룩한 영광과 숭고한 자비를 달라. 분명 성스럽고 종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문장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속에 담겨있는 녹진한 불쾌를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라디오 내용은 그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었던 광신도들의 흔적처럼 보였으니까.

“- - - - -.”

나는 차가운 바람에 말라버린 입술을 핥으며 낡은 서바이벌 라디오를 들어 올렸다.

이성이 사라진 짐승 같은 광신도들도 이 라디오만큼은 소중히 하고 있었는지 플라스틱의 외관과 책상 주변은 너무나 깨끗했고 바닥이 쌓인 먼지 사이로는 그들이 무릎을 꿇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치 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듯 이 선동 라디오를 들었을 광신도들은 이 라디오 속 남자의 정체가 대략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배후, 끔찍한 학살극과 인간사냥을 벌이는 종교의 정체.

나는 라디오를 들고 부러진 십자가 뒤에 그려진 문양을 조용히 노려봤고 머지않아 커튼과 들고 있는 라디오를 챙겨 재빨리 교회 밖으로 나섰다.

“노획한 탄약은 저쪽에 분류해서 모아두세요! 그리고 시체는 저 건물에…… 어, 형님?”

교회 밖을 나서자 가장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점 정리에 바쁜 용팔이였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용팔이는 반가운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다 이내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발견하고 덩달아 말을 흐리기 시작했다.

[- - - - - -!]

그리고 내가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오른손에 잡힌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연설문을 내뱉는 남성의 목소리와 마치 미친 짐승들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으로 광적인 환호성을 보내는 수많은 광신도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들으면 들을수록 불쾌함과 걱정이 몰려오는 광기의 현장.

나는 좋게 포장되어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그 개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며 붕대로 쓰기 위해 가져온 커튼을 용팔이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잘 소독해서 올리버 중사한테 가져다 줘. 그리고 영감님 어디 계셔?”

쓸만한 천을 구하기 위해 교회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소득을 얻었다.

물론 놈들이 본거지로 쓰던 건물을 다 뒤져본다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물건들이 나오겠지만,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알리는 이 라디오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커튼을 받아든 용팔이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참을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온몸을 꽁꽁 묶어 잡아둔 광신도들이 갇혀있는 붉은색 창고 건물을 가리키며 대답해주었다.

“아마 저쪽에 계실걸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그 라디오는 또 뭐고요?”

용팔이는 라디오 속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통해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현장 수습에 바빠 보이는 일행들을 따로 부를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일단 노인과 상의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단 현장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급했다. 나는 용팔이에게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피했고 이내 노인이 있다는 창고로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메리제인이 말하길 놈들은 2차 격변 이후부터 소문이 돌 정도로 형체가 잡혀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 도착해 살펴본 놈들은 완전히 인지가 가능한 집단을 꾸리고 있었으며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조차 힘들 정도로 널리 분포되어있었다.

흔한 종말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행보와 교리 속에 나는 놈들이 단순한 부랑자인지 아니면 정말 저 미친 말을 믿는 정신병자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이명처럼 들려오는 남자의 연설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어느새 창고 뒤쪽에 도착해있었고, 그곳에서 노인과 통역을 위해 동행하고 있는 메리제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왔냐?”

노인은 붙잡은 놈들을 심문하고 있었는지,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우리가 비록 이 거점을 성공적으로 차지하기는 했지만, 트럭을 통해 이어지는 다른 거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정사실.

그리고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노인은 일행들이 거점을 정리할 동안 치열한 정보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쯧.”

하지만 노인은 심문이 마음처럼 잘 안 되는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간이 의자에 앉아 날카로운 대검 날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벌한 분위기에 살며 고개를 끄덕이며 접근한 나는 아직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라디오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묶여있는 놈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노인의 뒤에서 얌전히 기립하고 서 있던 메리제인이 라디오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나에게 묻는다.

“Sir? 그거 혹시….”

“예배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일단 들어보십쇼.”

영어를 할 줄 아는 메리제인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연설의 정체를 대충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더 자세히 들어보라는 말과 함께 라디오에 손을 올려두었고 잠시 줄여두었던 볼륨을 천천히 올렸다.

그러자 먹먹한 공간감과 함께 남자의 연설이 크게 들려왔으며 덩달아 고개를 돌린 노인은 연설 속에 가미되어있는 이름 모를 광기와 불쾌함을 읽었는지 천천히 한쪽 눈가가 찡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연설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가만히 라디오 내용을 듣고 있었던 우리가 아닌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한 광신도였다.

“끅, 큭, 끄으으….”

이상한 신음을 내뱉으며 일어난 그는 3명의 광신도 중 유일하게 기절해 있던 놈이었다.

내 기억에는 강하게 머리를 맞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침을 질질 흘리는 그놈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온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풀려버린 눈과 흘러내리는 침처럼 힘이 없는 입. 라디오 내용에 집중하고 있던 우리는 순간 깜짝 놀라 옆에 내려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 뭐야, 이 새끼들. 아까는 백치처럼 비명도 안 지르던 것들이….”

노인의 심문은 독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 세 놈은 포박을 당하는 즉시 무슨 스위치라도 켜진 것처럼 백치처럼 변했고 거친 심문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이 전부 연극이라고 생각한 노인이 한동안 강도 높은 심문을 이어갔지만, 결국 놈들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어떤 충격에도 인형처럼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놈들은 라디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이 과연 종말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 땅은 원래부터 지옥이었고 그저 구분을 없애기 위한 문이 열렸을 뿐입니다. 신의 사도와 마주하고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세상은 정화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주, 아버지가 오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팔 벌려 끝이자 시작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부터 끝까지 잘 포장된 개소리였다.

나와 노인 그리고 메리제인조차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이 반쯤 풀린 이 광신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풀려버린 눈에는 붉은색 광기가 맴돌았고 침이 흐르던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겉으로만 봐도 완전히 미쳐버린 그들은 마약 때문에 머리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팔다리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라디오에서는 예배의 마지막을 올리는 말과 함께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아버지와 가장 가까워져야 합니다.]

딸랑- 딸랑- 딸랑.

예배는 그것으로 끝이었는지, 아까부터 들려오던 광신도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짙게 낀 안개처럼 먹먹한 남자의 목소리와 귀를 간지럽히는 작은 방울 소리만이 라디오 잡음과 함께 튀어나올 뿐이었다.

머릿속에 이명이 낀다.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그리고 종이 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한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메리제인이 깜짝 놀라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른다.

“W, What the-!”

“끄으으으아아아악-!!!!!!”

메리제인의 욕설과 함께 고막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인간이 내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절한 남성의 고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메리제인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고 자신이 들고 있는 권총을 재빨리 들어 올린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장딴지를 물어뜯겼을 광적인 공격, 그리고 그 공격의 주범은 괴물도 변종도 아닌 맨 오른쪽에서 이상한 신음을 내뱉던 광신도였다.

노인은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손목과 발목의 묶인 속박을 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놈의 얼굴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속박을 끊기 위해 힘을 주는 손목 피부는 다 까져 피가 질질 흘렀고 우리를 노려보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흐를 듯 붉었다.

마치 미쳐버린 것처럼 입에 머금는 피거품과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짐승 같은 고함, 노인에게 얼굴을 걷어차인 광신도는 그 강한 일격에도 기절하지 않고 여전히 몸을 버둥거리며 메리제인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총을 들어 올린 메리제인은 방아쇠 위에 올린 검지를 부여잡으며 이걸 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으아아아-!”

예배는 끝이 났는지 라디오에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광신도 세 놈은 마치 머리에 필라멘트가 끊기기라도 한 듯 우리를 공격하려 하거나 스스로 성질을 못 이겨 온몸을 버둥거린다.

바닥에는 그들이 흘린 피로 피 칠갑이 되기 시작했다.

냉철하던 노인마저 그 기이한 현상에 할 말을 잃었으며 밖에서는 누군가 달려오는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 - - - -아.”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머리를 쑤셔오는 격통은 내 비명마저 틀어막았고 굳건한 다리는 그대로 힘이 풀려버린다.

버티려고 했지만, 이 고통은 살아생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도였다. 털썩,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엉덩방아를 찍었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종소리는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마치 노이즈가 낀 듯 흐릿한 머리와 불어오는 이명으로 인해 먹먹해진 귀.

그리고 그 순간 저쪽에서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 날뛰던 노인이 바닥에 주저앉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야! 야 이놈아, 정신 차려! 넌 또 왜 그래!!”

나도 모른다.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고 휴식으로 풀려있던 근육은 마치 전기를 가하기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점점 힘이 없어지는 사지와 이성적인 생각을 거부하게 하는 격한 두통. 이곳에 있는 일행 중 유일하게 나만이 이상 반응을 보이며 고통받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이지? 나는 잔뜩 경직된 얼굴로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쓸어내렸고 내 어깨를 흔드는 노인과 마주 봤다.

“메리제인, 그 새끼들 그냥 쏴버려!”

가면 갈수록 발광을 하는 놈들과 점점 심각해지는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노인은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은 결국 메리제인을 돌아보며 사격명령을 내렸고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나를 둘러업는다.

삐이이이- 마치 옆에서 폭격을 맞기라도 한 듯 짙어지는 이명과 초점을 잡기 힘들어지는 눈.

주변에는 소리를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아침 해는 눈부시기 그지없었다. 나는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 - -공격이라도 당한 겁니까?!”

“아니야, 갑자기 쓰러졌어!! - - -이봐, 거기 들것- - -!”

마치 깊은 허공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짙은 부유감.

쓰러져 일어날 수 없는 내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들려 다녔고 가늘게 뜬 시야에는 너무나 밝은 해와 다급한 일행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명이 낀 귓가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리만이 내가 무슨 상황에 부닥쳤는지 알려주는 무의식에 실마리였다.

점점 빨려 들어간다. 세상은 휙 휙 지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숨을 쉬는지 혹은 살아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 - - - 뭐라도 해봐!’

‘- - -저, 저는 산부인과 인턴이에요!’

‘이런 젠장!’

‘- - - -아빠!’

마치 빈 곳에 둥둥 떠다니는 부표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반가운 채연이의 목소리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게 했고 이상하게도 많이 어려진 채연이가 나를 보며 울고 있었다.

여러 가지 소음이 들린다. 노인의 목소리, 용팔이의 목소리. 시끄러운 무전기 소리.

꿈인 걸까? 온몸에선 부유감이 느껴지고 주변 풍경이 휙 휙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와 숲이 빠르게 지나가는 차 밖 풍경이 가늘게 뜬 내 시야에 남는다.

아직 아침인지 눈이 너무 부시다. 힘겹게 뜬 눈꺼풀을 서서히 감자, 의식이 저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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