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부 34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탁, 탁.
작은 양철통에 들어가 있는 장작이 불똥을 튀기며 타오른다.
최소한의 보온을 위해 작은 불길만을 유지하고 있는 공터의 장작불, 나는 그곳에 손을 비비며 피곤과 차가움으로 물든 몸을 서서히 녹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던 캠프는 어느새 짙은 침묵이 가라앉아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던 넓은 공터에 혼자 앉아 강 형사에게서 올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함께 작은 그릇을 들고 온 노인이 내 옆에서 털썩 앉았다.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 뼈 삭는다.”
그릇에는 나와 용팔이가 낮에 잡은 사슴고기와 함께 MRI를 적절하게 조리한 음식들이 담겨있었다.
이 많은 인원은 모두 먹기에는 모자랐을 텐데, 그래도 적당히 잘 분배해 먹은 모양이다.
나는 입맛이 없지만, 힘이 없는 몸을 생각해 그 그릇을 받았고 따뜻한 음식들을 억지로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감각이 없는 손끝과 느껴지지 않는 음식의 맛, 벌써 4시간이 넘게 지나갔음에도 변종 능력의 후유증은 남아있었다.
“몇 명이었나 죽였냐.”
그리고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반쯤 먹어가자 장작불을 조용히 바라보던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캠프로 복귀한 뒤로 아무에게도 교전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나와 오래 현장을 활동한 노인만큼은 나에게서 작은 변화를 느낀 모양.
강수련이 정성스레 요리했을 텐데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웠다. 나는 바닥에 조용히 그릇을 내려놓으며 노인에게 대답했다.
“총원은 대략 80명 정도 돼 보이고 추격조 일곱은 그 자리에서 사살했어요. 그리고 놈들이 점거한 그 마을은 아마 본부랑 이어지는 전진기지 개념인 것 같은데, 잡아 온 포로들을 가둬두는 곳이 따로 존재해요.”
내 자세한 대답에 노인은 작은 침음성을 삼키며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기지를 오고 가는 유동인구가 존재하겠지만 마을을 점거하고 있는 놈들의 숫자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비전투 인원인 우리와는 다르게 80명 대부분이 흉기와 총기로 무장하고 있는 광신도들. 그리고 그 뒤에 얼마나 많은 배후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의 반경은 점점 좁아져 간다.
노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주름진 이마를 긁었고 나는 남은 음식을 입에 전부 털어 넣으며 물었다.
“총기랑 탄약은요?”
억제력과 공권력이 없는 무법지대에서 마치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광신도들의 규모는 거대했고 인간을 사냥한다는 목적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를 태워줄 한국의 수송기도,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미 육군도 남부에 틀어박혀 움직일 기색도 보이지 않는 상태, 결국 우리는 사방에 적밖에 없는 타지에서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화기 보유량 질문에 노인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총기는 우리가 써야 하니까 제외하고, 원래 채연이네 캠프가 가지고 있는 건 자동소총 3자루에 사냥용 라이플 1자루. 그리고 나머지는 뭐 민수용 권총 3자루가 끝이야. 그나마 네가 오늘 노획한 총기까지 합치면 대충 무장은 시킬 수 있겠는데, 문제는 탄약이지. 이 근방에 길이 끊긴 지가 오래라 보급할 수 있는 곳이 한 곳도 없거든.”
종말 초기에는 남아있는 문명의 잔재에서 식량이든 무기든 충분히 보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말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급자족이 아니라면 물자를 얻기에는 힘든 상황, 더군다나 공식적으로는 봉쇄가 된 캘리포니아이기에 특별한 방법이 없다면 탄약의 확보는 어려운 것이 실상이었다.
노인은 기껏해야 한번 싸울 수 있을 만큼 남았다는 설명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광신도 놈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많은 인원과 넓은 수색반경, 그렇다는 건 우리 캠프의 위치가 놈들에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인데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정답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피곤으로 인해 뻑뻑해진 눈과 점점 둔해지는 온몸의 감각. 나는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핀다.
“먼저 치죠.”
그래, 결국 이 방법밖에 없다.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다간 점점 떨어지는 물자에 결국 밖으로 나올 것이고 놈들을 피해 도망쳐봤자 캘리포니아에선 한계가 분명하다.
그나마 남아있는 선택지 중에 우리가 가장 자신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거점기지를 향한 선제공격이었다. 그리고 노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늘그막에 고생만 하는 노인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올해 수확한 식량들이 창고에 가득 쌓여 있었어요. 그리고 차량을 움직일 연료와 놈들이 사용하는 총기도 분명 충분하겠죠. 물론 리스크가 크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겠지.”
내가 말을 흐리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맞다. 우리가 놈들보다 유리한 건 상대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장점처럼 보이겠지만, 나와 노인의 눈에는 그나마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놈들이 선량한 생존자들에게서 뺏었을 물자를 다시 우리 뺏고 그것을 기반 삼아 보름 동안 버틸 수 있는 쉘터를 구축한다.
결정을 내린 순간 차곡차곡 머리에 쌓이는 계획이 내 머리를 맴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길게 하품하며 타오르는 장작불을 꺼버렸다.
힘들었던 하루가 또 이렇게 끝이 났다.
* * *
“동윤 씨.”
귓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오늘은 채연이가 아닌 강수련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이 캠프에 합류한 뒤로 웃음이 자주 늘었다는 강수련.
나는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햇살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다 이내 상반신을 일으키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돌아온 손끝에 감각과 뻑뻑하지 않고 또렷한 시야. 물론 약간의 근육통은 남아있었지만 크게 해가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도 움직이기 힘들면 어쩌나 했는데 새벽에 취한 깊은 잠이 몸을 회복시켜준 모양이다.
“채연이는요?”
그러고 보니 아침이면 나를 깨워주던 채연이가 보이지 않는다.
설마 어제 늦게 와서 삐지기라도 한 걸까? 그리고 내 질문에 조용히 웃음을 머금은 강수련은 이것부터 먹으라는 듯 따뜻한 수프가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나에게 내밀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옥수수와 사슴고기를 넣고 끓였는지 담백하고 구수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수프.
나는 후유증으로 사라졌던 입맛이 다시 되돌아옴을 느끼며 그대로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고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강수련은 침대 옆에 앉으며 커튼을 걷은 창밖을 조용히 가리켰다.
“- - - - - -.”
나는 강수련이 가리키는 검지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돌렸고 밖에서 평소 들을 수 없었던 힘찬 기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각이면 다들 일하느라 바쁜 시각이 아닌가? 평소라면 텅 비어있어야 할 공터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재빨리 수프를 입에 털어 넣은 뒤 침대에서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 나와 오두막 문을 열었다.
“더 빨리!!!”
오두막을 문을 열자 한쪽에서 매서운 고함을 지르는 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웬일인지 평소에 쓰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쓰고 마치 조교처럼 에덴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는 노인은 에덴에서 신병들에게 고함치던 그 모습 그대로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공터를 숨 가쁘게 뛰고 있는 건 올리버 중사를 포함한 군인들과 일부 생존자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었다.
10m 왕복 달리기를 하고 있는지 공터에 꽂혀있는 여러 개의 나뭇가지.
그리고 그곳을 찍고 찍기를 반복하며 쉼 없이 뛰기 시작한 생존자들은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서슬 퍼런 노인의 고함에 깜짝 놀라며 이를 악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는지 온몸이 땀범벅이 된 그들은 우리가 에덴에서 했던 훈련을 노인에게 그대로 받고 있었다.
그리고 오두막을 나와 내 옆에서 조용히 팔짱을 낀 강수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저기에 채연이도 있어요.”
뭐? 채연이도? 나는 깜짝 놀라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 시선을 던졌고 그곳에서 구슬땀을 흘린 채 뛰고 있는 채연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체구가 워낙 작아 군인들 몸에 가려져 있었던 채연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재빠르게 10m 왕복달리기를 하는 아이는 다른 생존자들과 다르게 얼굴에 기쁨이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기쁜 걸까? 얼마나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깨어난 것조차 모르는 채연이를 바라보며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 1세트 끝! 뽀시래기들 점심 먹고 와!”
그리고 한 10분쯤 지났을까, 생존자들은 진즉에 나가떨어진 지 오래고 마지막까지 남은 군인들과 일부 아이들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묘한 웃음으로 지켜보던 노인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크게 손뼉을 쳤고 이내 왕복 달리기의 끝을 알렸다.
그러자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흙바닥에 쓰러지는 아이와 군인들은 거칠게 달아오른 숨과 함께 탈력감에서 오는 신음을 내뱉는다.
“아빠!”
하지만 우리의 귀여운 다람쥐는 지치지도 않는지, 훈련이 끝나자마자 내 쪽으로 뽀르르 달려들었다.
허공을 날아 그대로 품 안에 쏙 하고 들어오는 채연이. 나는 이제는 묵직해진 아이의 체중에 깜짝 놀라면서도 얼굴에 새겨지는 미소를 없앨 수가 없었다.
노인에게 훈련을 받는 내 아이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1세트를 무사히 받은 것에 대한 대견함이 느껴지는 아이러니.
나는 마치 학교에서 상을 받아온 것처럼 히히 웃는 채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안 힘들어?”
“응, 안 힘들어.”
온몸이 땀범벅이고 피부 너머로는 격한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데, 아이는 힘들지 않다고 능숙한 거짓말을 한다.
노인이 왜 이런 훈련을 시키는지 이해하면서도 내 아이들만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채연이는 이미 이만큼 성장해있었다.
내 윗배까지 오는 키와 귀여운 똑 단발,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엄마랑 밥 챙겨 먹고 있어, 알았지?”
마음 같아선 아이와 종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휴식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참을 내 품에 안겨서 머리를 비비던 채연이는 기특하게도 더는 보채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에게 볼 뽀뽀를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옆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강수련의 손을 잡으며 아쉬운 듯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아이와 마주 보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폐부에서 끌어올린 숨을 훅 내뱉으며 천천히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잘 따라오고 있어요?”
“어, 이 정도면 가르칠 맛나지.”
칭찬에 인색한 노인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수준이 높은 것인지.
선글라스를 조용히 벗은 노인은 아직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챙겨온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바삐 적고 있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공터는 어느덧 점심을 먹으러 간 사람들로 인해 조용해졌고 나는 가만히 서서 노인의 기록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서 기지개를 피는 용팔이와 함께 대략 7명쯤 되는 인원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영감님, 다 데려왔어요.”
용팔이 옆에는 부스스한 얼굴에 메리제인과 우리와 따로 움직이기로 했던 군인 3명, 그리고 캠프 초반부터 아이들과 같이 활동했다던 생존자 3명이 서 있었다.
대략 겉으로만 봐도 당장 전투가 가능한 인원만 보이는 상황, 나는 공터가 조용한 지금 노인이 그들을 왜 불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선글라스 사이로 걸어온 인원을 힐끔 바라본 노인은 천천히 다이어리를 접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전달했듯이, 상황은 대충 알 거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과 우리 사이에 신뢰와 유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목적을 언급하며 군인과 생존자들에게 이번 작전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암묵적인 동의를 보내며 이 자리에 참석했다.
나, 노인, 용팔이, 메리제인, 군인 3명과 생존자 3명. 총원 10명으로 이뤄진 사람들은 이번 선제공격을 진행할 작전팀인 것이다.
“저…. sir,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고 침묵이 감도는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질문이 올리버 중사의 입에서 나왔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에 클로에 병장과 이게 정말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얼굴에 담고 있는 나머지 인원들.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고 그 외 사람들을 대신해 총대를 멘 올리버가 노인과 나를 향해 물어왔다.
“그쪽 인원이 우리보다 몇 배는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정말 가능한 작전입니까?”
작전 인원이 적어 총기와 탄약은 충분히 보급되겠지만, 무려 8배 차이가 나는 인원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날아오는 총알에 벌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올리버의 질문은 어쩌면 합당한 의문일지도 모른다.
캠프를 지키는 것은 좋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 노인은 사람들 사이에 감돌고 있는 묘한 두려움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인이 아닌 일행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두에 서서 위험한 곳을 뚫고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내 책임이다.
도망치지도, 비겁하게 먼저 죽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언제나 그래왔듯 에덴의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리고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조용히 삼키며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뱉었다.
“확신이 서는 순간 참전하셔도 괜찮습니다. 먼저 후퇴하셔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다.
마치 실전에 투입되기 전 군인처럼 벼려지는 감각과 녹진하게 흘러나오는 숨. 수년간 에덴에서 배운 경험은 내 몸을 어김없이 강타하며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기류와 바뀐 분위기. 노인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내 옆에 섰으며 용팔이와 메리제인은 그 뒤를 따라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 본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며 말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그들 앞에서 보여주는 등이 더 설득력 있을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