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부 3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명복을 빌어줄 시간이 없다.
나는 그나마 깨끗한 건초 더미를 싸늘하게 식어버린 여성의 몸을 덮어주었고 아이에게는 잠시 친모와 작별할 시간을 주었다.
이 아이는 과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단순히 숨이 멎어 썩어가는 것이 아닌 기억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재가 되어버리는 의미.
나는 그 지독한 현실을 알기에 너무나 어린아이와 마주하며 바닥에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피가 엉겨 붙은 바닥에 눈물이 스며들기도 전,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날 밤 채연이가 살기 위해 차 밑을 들어갔듯이, 그리고 이 아이가 본능적으로 나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했듯이, 본능에는 어떠한 제약도 이유도 필요 없는 것이다.
친모가 죽고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한 순간에도 지키고 싶은 자신의 생명.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이는 얼굴에 땟국물과 눈물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나에게 고개를 돌린다.
오른손에는 사람을 죽이는 권총을 잡고 왼손에는 사람을 살리는 동정을 잡는다.
이 지독하면서도 이질적인 모순 속에 나는 그래도 아이가 손을 잡아주기를 바랐다.
살아야 한다. 아무리 냉정한 현실이 목을 매고 살갗을 때려도 살아야 한다. 손을 내민 1초가 1시간처럼 느려지고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의 텅 비어있는 눈에는 내가 고시원을 뛰쳐나올 때 느꼈던 조그마한 각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많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정말 한 줌의 각오는 뜀박질을 위한 시발점이 되어준다.
“- - - - -후.”
아이는 입에 물고 있던 엄지를 천천히 빼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그대로 안아 올리며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짙은 숨을 훅 내뱉었다.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 찾아온 상태, 마을 곳곳에 보이는 빛들과 횃불이 만들어낸 붉은색 일렁임이 창고 틈 사이로 비춰와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유난히 흐린 먹구름이 달빛을 가린 칠흑의 밤, 나는 그대로 창고 밖을 빠져 나왔고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빛들을 피해 재빨리 조경수들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아이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옷깃을 꽉 잡는다. 간절한 삶의 열망에서 오는 힘이 내 피부 위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래, 나가자. 나는 그 작은 힘을 순풍 삼아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갈 생각에 낮은 울타리를 향해 뛰어갔다.
“거기 제대로 잡아!”
“push!”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낮 동안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던 놈들은 해가 지자마자 마을 주변을 횃불로 환하게 비추며 무언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에 처박아둔 트럭들을 밀고 마을에서 약탈한 자재들을 그곳으로 옮겨 담는다. 그리고 얼굴에 묘한 열기와 광기를 띄운 광신도들이 건물에서 하나씩 빠져나오자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처절한 두려움과 고통이 담겨있는 그 비명, 품에 안겨서 눈을 감은 아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포로들이 지르는 비명임을 알 수 있었다.
낭패다, 주변 분위기가 바뀌었다. 놈들은 무언가에 찌들기라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고함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더욱 처절해졌고 나는 내 시야가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무언가 의식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마다 찾아왔을 이 소란에 아이는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부들부들 몸을 떤다. 하지만 나는 신경을 간지럽히는 불쾌한 광기에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힐끔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까 해가 떠 있을 때만 해도 건물에 처박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광신도들은 해가 지자 밖으로 기어 나왔고 더불어 초병의 숫자와 주위를 돌아다니는 광신도들의 숫자도 증가했다.
길옆을 그대로 빙 돌아갔다간 발각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건초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밭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낮에는 완전한 평야 지대라 가로지르는 것이 위험했지만 지금처럼 달빛 한 점 없는 저녁에는 오히려 이곳이 안전했다.
나는 아이를 안은 상태에서 그대로 자세를 숙였고 마을과 건초 밭으로 이어지는 낮은 둔덕에 엉덩이를 걸쳤다.
뒤에서 들려오는 광기 어린 웃음과 포로들의 끔찍한 비명. 나는 그 방향만은 분명히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이를 악문다.
그리고 둔덕에 올려둔 엉덩이를 떼자 마른 풀들이 부스럭거리는 건초 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빨리 뛸 거야. 꼭 붙잡고 있으렴.”
아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옷깃을 꾹 붙잡고 있는 아이의 손길에 숨을 크게 들이키며 뜀박질에 방해가 되는 권총을 홀더에 집어넣었다.
자칫 하다가는 중간에 사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 나는 괜히 기거나 자세를 숙여 시간을 잡아먹느니 전속력으로 달려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꽉 동여맨 신발 끈과 마치 예열하듯 끌어 오르는 심장이 팔다리 근육을 팽창시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앞을 향해 뛰쳐나갔다.
- - - - -바사삭, 바삭!
주변에 들리는 소음은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마른 건초에서 생기는 부스러지는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바람 소리에 묻혀 서서히 사라지고 소음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은 내 몸은 앞으로 점점 더 앞으로 향한다.
멀어지는 빛과 놈들의 불쾌한 웃음소리, 나는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에 평야를 마치 내 앞마당처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바뀌지 않는다. 과연 나는 뛰고 있는가?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나는 마치 우주 공간을 뛰는 것 같았다.
숨이 거칠어지고 아이가 내 옷깃을 잡은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다리와 아이를 안고 있음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 속도. 홀더에 매달린 권총이 끊임없이 절그럭거리고 내 심장은 피곤이 아닌 점점 가까워지는 숲을 향해 뛰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라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도망친다!! 포로가 도망친다-!!!”
번쩍-!
그리고 내가 건초 밭에 중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그 순간 내 앞을 밝히는 밝은 손전등 빛과 함께 저 뒤에서 찢어지는 고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어 무사히 가로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변을 경계하던 초병이 우연히 어둠 속을 뛰어다니는 나를 발견한 모양.
그 순간 잠자고 있던 위험본능이 땡땡땡 경종을 울렸고 나는 주변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피해 이를 악물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자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뜀박질과 함께 내 뒤에서 멀어지는 바람 소리에 묻힌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 - - -잡아, 이 시발 - - -쫓으라고!!”
탕! 타앙-!!
생각보다 빠른 속도 앞에 놀란 놈들은 뒤늦게 마을을 뛰쳐나오며 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신 깜빡이며 점멸하는 손전등 불빛에 비친 나를 총으로 열심히 쏴보지만 길을 잃은 총알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핑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총알, 아이는 겁에 질렸는지 잔뜩 웅크리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고 나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본능을 뿌리치며 점점 가까워지는 숲을 향해 뛰어갔다.
“- - - - fu - -!”
그리고 20m 앞에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이 보일 때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건초 밭을 가로질러오는 손전등과 수십 개에 횃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망치는 포로를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는 놈들의 광기가 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마 이대로 어두운 숲을 향해 들어간다면 놈들에게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꼬리를 물고 캠프까지 복귀한다는 건 흔적을 따라 추격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연신 쫓아오는 놈들과 숲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현재 우리 캠프의 유일한 장점이라곤 은밀한 장소에 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빈약한 방어시설과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전투 인원. 만약 그런 무방비한 캠프의 위치가 놈들에게 들통난다면? 아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은 목사와 목에 총상을 입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여성의 시체가 천천히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자 내 두 눈은 마치 터질 듯 커지며 거칠게 솟아오른 숨과 심장을 집어삼켰다.
내 행동과 결정으로 인해 채연이네 캠프가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 한 문장이 뇌리에 박히자 거칠게 달아오른 심장은 자연스럽게 위기에 반응하며 따라오는 놈들을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사지가 여기가 절단 나는 한이 있어도 꼬리를 달고 복귀해서는 안 된다. 각오가 모여 목적이 되고 목적이 모여 행동이 된다.
고민을 떨쳐낸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숲을 향해 몸을 던졌다.
빠른 움직임과 휴대성을 위해서 소총은 놓고 왔다.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때 들고 다녔던 기관단총은 아쉽게도 없었으며 화기라고는 내 허벅지 홀더에 달린 9mm 권총이 전부.
들고 온 탄창도 겨우 두 개에 불과하니 이 건초 밭에서 교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소리.
나는 눈을 꽉 감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고 이내 눈꺼풀과 함께 흑색 러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칠흑 같던 숲은 감각이 자욱하니 깔린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적당한 장소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큰 바위를 넘고 또 넘는다. 경사가 있는 지형이 발은 연신 잡아끌고 이곳저곳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은 마치 나에게 도망가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저 뒤에서 들려오는 추격자들의 고함과 발소리, 일렁이는 횃불은 나에게 주황색 윽박을 지른다.
그리고 채 30초가 지나지 않아 숲이 빽빽한 중턱에 도착한 나는 몇 십 년을 살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거대한 나무에 미끄러지듯 멈추며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
거의 반쯤 공황 상태에 빠진 그 아이는 혹여나 내가 자신을 버릴까, 꼭 부여잡은 옷깃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벼랑 끝에 매달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이 머리를 넘나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아이까지 그 사선 위에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옷깃을 꾹 잡은 아이를 다시 한 번 들어 올려 썩어가는 뿌리가 만들어낸 굴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게 했다.
“꼭 돌아올 테니까, 여기 숨어있어.”
짙은 어둠 속에 가려진 뿌리 속은 내가 저들을 처치할 동안 아이를 안전하게 숨겨줄 것이다.
백 마디 거창한 말보다 내 입에서 들려오는 진심이 담겨있는 한마디, 눈동자를 파르르 떨고 있던 아이는 내 말과 눈빛에서 그 진심을 읽었는지 천천히 손에 힘을 풀며 내 옷깃을 놔주었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이젠 추억 속을 헤엄치고 있는 채연이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문득 그리움이 몰려온다.
그리고 나는 바쁜 와중에도 곧 피가 묻을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비록 비극적인 세상에 태어나 친모와 이웃들을 잃었지만, 모든 내 아이들이 그랬듯 사람에게서 얻은 상처를 분명 사람에게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아이를 어둠 속으로 숨겨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폐부가 터질 듯 숨을 크게 들이키며 놈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숲속, 풀벌레들은 모두 숨을 죽였는지 내 귀에는 이명과 놈들이 지르는 고함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친숙한 그 공허는 마치 내 몸을 어루만지는 근원처럼 다가와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게 했다.
손이 움직인다. 홀더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9mm 총알이 가득 차 있는 두 개의 탄창을 꺼내기 쉬운 곳에 꽂아놓는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으로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대검을 꺼내 들자, 날카롭게 간 날이 강화 플라스틱을 긁고 나오는 떨림이 손끝에 진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 - - - - -.”
1초, 2초, 3초. 아까 전 폐부까지 끌어당긴 숨이 고무줄이 끊기듯 내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압력으로 인해 눈은 저절로 감겼고 한껏 팽창해 있던 근육이 마치 풍선이 터지기라도 한 듯 흐물거려진다.
다시 한 번 1초, 2초, 3초.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총 6초라는 짧은 시간이 지났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숲과 나뭇가지를 관통하고 불어오는 돌풍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돌풍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과 함께 내 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을 뜨는 그 순간 어두웠던 숲속은 사라지고 온통 검은색 실로 이루어진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의 숨결, 발소리, 들고 다니는 횃불마저 모두 실로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어디 있는지 보인다. 느껴지지 않지만 어디 있는지 느껴진다. 지금 이 광경은 내가 수없이 죽이고 목을 매달았던 변종의 시야였다.